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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강나림 기자

[2580 20주년 특집] - 2580이 조명한 사람들

[2580 20주년 특집] - 2580이 조명한 사람들
입력 2014-03-10 10:28 | 수정 2014-03-1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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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년 2580이 들여다본 수많은 얼굴과 사연들..

    우리와 아주 다른 삶을 사는 특별한 사람도 있었고, 누구나 한번쯤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이웃도 있었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삶 속엔 굴곡진 시대가 녹아 있었고, 동시에 살 맛 나는 세상임을 일깨워주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궁금해졌습니다.

    ◀ 유태호 ▶
    (이름이 뭐에요?)
    “유태호에요.”
    (몇 살이에요?)
    “여 섯살이에요.”
    (태호 좋아하는 노래 한번 불러줄 수 있어요?)
    “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여섯 살 태호. 날 때부터 팔이 없습니다. 발가락은 여덟 개.

    떼굴떼굴 열심히 굴러갑니다. 점심 시간에 늦었기 때문입니다.

    ◀ 유태호 ▶
    “엄마 치즈 넣었어요?”
    (치즈 넣었어 빨리 먹어)

    태호는 혼자 힘으로 하는 걸 좋아합니다.

    살아도 평생 누워서 지낼 줄 알았던 아이. 아이의 의지에 어른들도 감탄할 지경입니다.

    ◀ 유태호 ▶
    (태호가 지금 몸에서 뭐가 없어요?) “ 팔!”
    (팔이 없어서 다리로 살기 힘들지 않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스스로 해내겠다는 태호의 이 한마디는 우리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조차 큰 도전이었던 태호는 건강하게 잘 자라 어느덧 중학교 2학년.

    이젠 학교에서 태호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일 겁니다.

    어떤 도전은 주변에 희망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세상을 바꿉니다.

    1998년 2580은 장애로 양 팔을 쓰지 못하지만 운전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학생, 박재현 군을 만났습니다.

    처음 면허시험장을 찾아갔을 땐 신체 시험부터 문전 박대를 당했습니다.

    ◀ 박재현 ▶
    “의사가 나를 한번 봐. 나를 보더니 그냥 가라고 해. 한번 훑어보더니..저리가 저리가 막 무시조로 그렇게 얘기하는거야.”

    그로부터 1년 뒤.

    재현 씨는 발로 핸들과 깜박이 등을 조정할 수 있도록 직접 개조한 자동차를 타고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 박재현 ▶
    “나 아니더라도 누군가 해야 될 일이라면 내가 해보자. 그래서 그 벽이 낮춰진다면..할 수 있겠구나. 아직은 포기할 단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 다짐한대로 재현 씨는 세상의 벽을 낮췄습니다.

    2580을 통해 그의 사연이 처음 알려지고 6개월 뒤,

    재현 씨 같은 양팔 장애인이 운전면허를 딸 수 있게 법이 개정됐고, 2001년 1월. 재현 씨는 발로 운전해 면허를 따냈습니다.

    ◀ 박재현 ▶
    “겁나는 건 없습니다. 마치 제 몸에 날개를 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죠.”

    16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재현 씨는 지금 장애인들의 자립 생활을 돕는 민간 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취재진을 만나 오랜만에 그 때 그 자동차에 오른 재현씨는,

    장애인에 대한 벽이 사라질 때까지, 도전을 끝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 박재현 ▶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도 있구요. 그런데 중요한 건 미리 그렇게 생각을 안 된다고 생각을 해서는 바뀌거나 변화되어지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귀병을 갖고 태어나 세살 때 오른쪽 뇌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은 은총이,

    이런 은총이와 함께 달리는 아빠.

    아버지는 위대했습니다.

    51.5km의 철인 3종 경기 올림픽 코스.

    은총이 아빠는 4시간 30분 만에 완주했습니다.

    용기를 내 아들을 세상 밖에 데리고 나온 아빠의 진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처음 대회에 나가고 4년이 지난 지금, 은총이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더 이상 따갑지 않습니다.

    ◀ 박지훈/은총이 아빠 ▶
    “예전에는 정말 손가락질 하면서 ‘괴물이다.’라고 하고, 사람 맞냐고 하고, 막 혀 차고 슬금슬금 피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2580 나오고 나서 정말 지금은 아마 손가락질하던 이 손가락이 쑥 들어가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시면서..

    은총이 아빠는 5월에도 철인 3종 경기에 나갑니다.

    희귀병 아동들의 재활 병원 건립을 위한, 은총이 이름을 걸고 열리는 대회입니다.

    이번 경기에서도 아빠는 끝까지 달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박지훈/은총이 아빠 ▶
    “아들한테 그거 하나만은 꼭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우리 아들이 그냥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고, 아픈 몸을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세상 살아가는데,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뭐든 이룰 수 있다 은총아. ”

    사람 사는 모습이 항상 밝고, 희망에 차있기만 한 건 아니기에

    2580에 비친 삶은 사실 고단하고, 팍팍한 것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한 때 건설회사 과장님이었지만 IMF 여파로 회사가 부도난 뒤, 구두닦이에 나선 부부의 이야기..

    ◀ 최병학 ▶
    “갑자기 밑바닥으로 뚝 떨어뜨리니까 사람을..제일 바닥 아니에요. 하는 일이. 인간이 바닥이 아니고 하는 일이 제일 바닥 아닙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일을 하고 있다는 자체라는 걸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 최병학 ▶
    “나가면서 어깨가 쫙 펴져요. 나는 내가 오늘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서 간다. 내가 일할 자리를 찾아서 가는거에요. 갈 데가 있어 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사업장이니까. 그게 발걸음이 무진장 가벼워요..”

    새벽 목욕탕 청소, 신문 배달 떡 배달, 학원차 운전과 사이사이 폐지 수집까지.

    하루 20시간, 7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 눈 팔지 않고 IMF 때 진 빚을 달마다 갚아온 가장.

    지난주 이 씨는 마지막 남은 빚 100만 원을 송금했습니다.이로써 빚 3억5천만 원을 모두 갚은 것입니다.

    ◀ 이종룡 ▶
    “10년 빚 갚았지 뭐..뭐 땜시 이렇게 눈물이 쏟아진대요.”

    2580은 이 씨를 수소문했지만 1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해야 했습니다.

    시대의 굴곡을 온 몸으로 겪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이들의 사연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사는 게 나 혼자만 버거운 게 아니라는 위안이기도 했습니다.

    웬만한 야채는 다 있다고 해서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야채 백화점'이라고 부릅니다.

    박순자 씨가 오늘도 제일 먼저 나와 있습니다.

    ◀ 박순자 ▶
    “어제도 공치고 오늘도 손님도 안 붙어요. 계속 그래요 요새..”

    새벽시장에서 사온 야채를 5백 원 1천 원 얹어 팔고,

    단속이라도 하는 날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야채 행상 할머니들..

    ◀SYN▶
    아고고 사람 죽겠어..

    자식한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늙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이들은 고단했던 그 시절의 얼굴이었습니다.

    ◀ 심성성 ▶
    “자식들한테 돈 달라고 하기가 어렵고, 돈도 잘 벌면 안하지만, 돈 못 버는 자식들한테 돈 달라고 손 벌려? 아직 내가 몸 성하니까 벌어서 내가 쓰는거지...”

    15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 그들만의 백화점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당시 쉰 여섯, 막내였던 박순자 할머니를 근처에서 어렵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할머니들은 그 자리를 떠나거나, 혹은 세상을 떠나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 박순자 ▶
    “(소식) 안 들어, 헤어지고 그 다음에 끝이야. 멍청하지, 지금같이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하고 그러질 않고 헤어지니까 끝이지 뭐..”

    몸이 허락하는 한 자식에게 기대지 않겠다는 마음은 떠나간 할머니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박순자 ▶
    “그럼 해야지 집에서 놀면 뭐해 노는 사람이 놀지 일하던 사람 못 놀아. 나 수족 못 쓸 때까지 하는거지 뭐. 나 수족 못 쓸때 까지 해”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이웃이 누구보다 특별한 2580의 주인공이 되곤 했습니다.

    나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도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울림은 크고 깊었습니다.

    7살 난 아들을 키우는 최희정 씨 부부.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는 바람에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모가 이혼해 갈 곳이 없어진 푸름이를 맡아서 키우기로 했습니다.

    ◀ 정 헌·최정희 ▶
    “수입원이 없어졌으니까..어려운 건 좀 있죠. 재정적으로 (그럼 아이를 하나 더 키운다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힘들죠. 힘든데도 그래도 못 먹는 사람 있는데 우리는 그래도 밥은 먹고 있잖아요. 조금 쪼개서 쓴다고 생각하면 되죠.”

    7살 아들, 6개월 된 딸과 함께 지하 13평 주택에 사는 오정희 씨도 부모가 이혼한 형진이를 맡았습니다.

    손이 한창 많이 갈 자신의 갓난아이를 두고도 어떻게 남의 아이를 키울 생각을 했을까.

    ◀ 오정희 ▶
    “저희 같은 경우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도 아니고 사실 소득으로 치면 도시 거의 하층에 속하거든요. 이런 식으로라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거의 저희는 사회에 봉사할 길이 없어요. 돈이 많아서 고아원에 기부할 것도 아니고..”

    방지턱을 타고 넘은 차들이 도로에 떨어지면서 길은 움푹 패였습니다.

    ◀ 이강윤 ▶
    “지금 고속방지턱 높다는 게 이겁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높아가지고 차가 올라갓다가 쿵 떨어지니 이게 말이 됩니까?”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이강윤 씨.이 씨 때문에 바뀐 것도 의외로 많습니다.

    눈에 밟히는 게 많아 늘 분주했던 택시기사 이강윤씨.

    다시 만난 이 씨의 트렁크엔 지난 5년 동안 민원을 넣은 서류가 가득합니다.

    남의 동네 과속 방지턱을 낮추고, 지나가는 매연 차량을 신고하고,

    개선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 씨.

    왜 그리 피곤하게 사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에게 되묻습니다.

    ◀ 이강윤 ▶
    “하찮은 게 모여가지고, 그런 게 하나하나 개선되면 사회가 발전된다고 전 그렇게 생각하고 사회 곳곳에 내가 알고 있는 영역, 그걸 내가 개선하고. 또 다른 사람이 자기 분야의 그것을 개선하고. 그러면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지는거 아닐까요?”

    지난 20년, 2580에 비친 현실이 고단하지 않은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함께 힘을 내자며 살며시 서로에게 손을 건넨 사람들.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했던 이들이 바로 2580의 힘이고 대한민국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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