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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이미지 권희진 기자

갈라진 '사각의 링'

갈라진 '사각의 링'
입력 2014-11-24 08:37 | 수정 2014-11-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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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과 역경을 딛고 챔피언의 꿈을 좇는 권투선수, 일명 헝그리 복서.

    이들의 처우가 열악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명색이 프로무대라고 하는 프로복싱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당하게 받아야 할 대전료가 중간에 사라지는가 하면 경기를 치르고도 아예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권투계는 이권다툼 속에 사분오열돼 1년 사이에 관련 단체가 연맹, 협회, 위원회 등 4개로 쪼개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유명우, 홍수환 등 국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권투영웅들도 서로 등 돌리고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프로권투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

    "탁탁탁탁.."

    한국 챔피언 도전을 사흘 앞둔 막바지 훈련.

    "늘어지면 안돼 더, 더, 더!"

    34살의 나이, 이번 경기가 사실상 마지막 기회임을 떠올리며 숨막히는 훈련의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힘을 내야지 더! 더! 더!"

    체중이 3킬로그램이나 빠질 정도로 땀을 흘렸지만 계체량을 통과하려면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이영균 34 / 프로복서▶
    "순간적인 체중감량을 하는 거라 물을 굉장히 마시고 싶습니다."

    결전의 날이 밝았습니다.

    주먹을 꼼꼼히 점검하고, 좁은 대기실에서 마지막으로 몸을 풉니다.

    ◀이영균 34 / 프로복서▶
    "이번에 지면 아마 조금 쉽지 않은 그런 상황이긴 한데..그래도 뭐 최선을 다해야죠."

    "땡!! 1라운드 시작!"

    이날 대회의 간판 경기, 한국 타이틀매치가 시작됐습니다.

    챔피언의 주먹 아래로 파고드는 도전자 이영균 선수.

    챔피언은 노련했습니다.

    좌우와 앞 뒤로 가볍게 움직이며 긴팔을 이용한 효과적인 타격.

    "퍼퍽"

    도전자는 우직하게 다가들며 챔피언의 얼굴에 주먹을 던졌습니다.

    곧 챔피언의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영균아 커버해야지..영균아 커버.."
    "어퍼! 어퍼!"

    (5회 끝나고)
    "거칠게 하란 말야!!"

    6라운드.

    챔피언의 주먹은 더 날카로와졌고, 누적된 충격에 도전자의 눈동자는 풀려갔습니다.

    (경기 중단)

    경기가 일방적으로 흐르자 주심은 챔피언의 TKO 승을 선언하며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씁쓸한 코치 표정..)

    패배한 도전자의 주먹을 감쌌던 붕대는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멍한 도전자 표정)

    반 년을 매달렸던 한국타이틀전이 이렇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영균 선수는 대전료로 70여만 원을 손에 쥐었습니다.

    1라운드에 15만원, 10라운드 시합 대전료 150만원에서 매니저 비용과 트레이너 비용 등을 떼고나니 절반만 남았습니다.

    여기에서 서울집에서 대회장인 경북 달성군까지의 교통비와 하루치 숙박비 등을 다시 뺀 돈이 소득입니다.

    그나마 1라운드에 10만원이던 대전료가 최근 15만원으로 올라서 이 정도를 번 겁니다.

    "맨주먹으로 가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권투선수들을 우리는 흔히 헝그리복서라고 부릅니다.

    반 년을 준비해 70만원을 번 이영균 선수처럼, 권투선수들의 열악한 처지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정당히 받아야 할 돈 조차 중간에 떼이거나 아예 못 받는다면 분명 이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작년 9월 8일,

    경남 거창에서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여자슈퍼플라이급 세계타이틀매치가 열렸습니다.

    주최측이 대회가 끝난 뒤 후원자인 거창군에 제출한 대전료 내역입니다.

    타이틀매치의 주인공인 유희정 선수에게 2천만원을 줬다고 돼 있습니다.

    정말 그 돈을 받았는지 물어봤습니다.

    ◀ 유희정 / 프로복서 ▶
    "오 진짜요? 저 몰랐는데. 저한테 1,000만 원 얘기하시던데. 그 1,000만 원을 나눠서 실수령액이 530만 원이라는 것 밖에.."

    원래 대전료가 2천만원이라는 건 이제야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습니다.

    ◀ 유희정 / 프로복서 ▶
    "오늘 알았어요 오늘, 웬일이야.. 다 두 배로 돼 있네요"

    이날 출전한 유 선수의 남편 유명구 선수도 200만 원을 받게 돼 있었지만 그 역시 절반인 100만 원만 받았습니다.

    선수들은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 유희정 / 프로복서 ▶
    "계약서라기보다는 돈 수령한 거 있잖아요. 돈 받으면 수령 서명하잖아요. 그런 형태로 받은 거 밖에는.."

    주최 측에 왜 그랬냐고 묻자 처음엔 잡아뗍니다.

    ◀ 당시 대회 기획자(프로모터) ▶
    "그렇지 않습니다. 확인 다시 해보시고요."

    관련 서류가 있다고 하자, 복잡한 사정이 있다며 말끝을 흐립니다.

    ◀ 당시 대회 기획자(프로모터) ▶
    "왜 이렇게 돈을 조금 주신 거예요?"
    "얘기하려고 하면 복잡한데.."

    거창군은 이 대회에 5천만원의 예산을 지원했습니다.

    한국권투위원회가 이 돈을 어떻게 썼는지 사후에 거창시에 제출한 확인서입니다.

    필리핀과 태국 등 동남아 선수들과 감독관에게 지출한 3천만원 가운데 호텔비가 356만원입니다.

    꽤 극진한 대우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일까.

    확인해보니 김해공항에 도착한 4명의 외국인들을 마중온 사람은 대회 관계자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김해에 사는 대회 참가자, 유명구 선수였습니다.

    유 선수는 이들을 자기 차에 태워 집 근처 여관에 데려갔고, 심지어 여관비도 자기 돈으로 냈습니다.

    ◀ 유명구 / 프로복서▶
    "제가 여관비 받은 것도 없고요. 내가 픽업한다고 돈을 받은 것도 없고요."

    대회 장소인 거창군으로 이동한 외국인들은 이번엔 1박에 4만원짜리 모텔에 묵었습니다.

    ◀ 모텔 주인▶
    "그 때 당시 여기 숙박비가 하루에 얼마예요?"
    "저희 사장님 오빠가 그 뭐고 거창 권투협회장이어서 지원을 해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냥."

    지난 3월 1일, IFBA 여자 미니플라이급
    세계타이틀 매치.

    챔피언 김단비 선수는 3차 방어에 성공했지만 대전료 1천만 원을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기획사가 권투위원회에 대전료 1천만 원을 공탁했지만 권투위원회는 돈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당시 권투위원회가 내분으로 어수선한 상태여서 관련 서류를 챙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 서성인 / 한국권투위원회 사무총장 ▶
    "그 돈에 대한 출처가 분명하면 대전료를 지급하겠다. 근데 지금까지 그 서류를 안 가지고 오고 있어요."

    하지만 김단비 선수 측은 대전료에 대해 권투위원회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 김단비 선수 측근 ▶
    "돈을 줄 생각이 있다면 어떤 서류가 필요하니까 어떤 서류를 달라고 하든지 그런게 돼야 되는 거 아니에요?"

    대전료를 받을 기약도 없이 김단비 선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권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보험가입조차 안되는 권투선수들은 시합 중 생기는 부상이나 사망사고 등에 대비해 권투위원회에 대전료 일부를 건강보호기금으로 적립합니다.

    지난 2008년, 권투 경기 후유증으로 사망한 최요삼 선수.

    건강보호기금에서 치료비와 위로금이 나와야 했지만 기금이 없어 받지 못했습니다.

    ◀ 김한상 / 권투체육관장 ▶
    "우리끼리 '체육관장협의회'라는 걸 만들어서 돈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서 빼가지고 1000만원을 준 걸로 알고 있어요."

    2년 뒤 23살 가장 배기석 선수가 경기 직후 숨졌을 때도 기금에서 나온 돈은 없었습니다.

    선수들의 매값이나 다름없는 대전료로 적립한 건강보호기금은 어디로 간 걸까.

    권투인들은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비영리 사단법인인 권투위원회가 회원들에게도 회계 내역을 공개하지 않고 외부 회계 감사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 김한상 / 권투체육관장 ▶
    "그러니까 이걸 우리가 알아볼 수가 없어요. 돈을 어떻게 썼는지. 어디다 썼는지. 있는지, 없는지."

    ◀ 강신준 / 전 권투위 사무총장 ▶
    "사무처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사무총장. 그리고 회장..이 두 사람은 알겠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돈이 드나드는 내역을요?"
    "그렇죠."

    "그동안 권투선수들의 대전료나 건강보호기금을 둘러싼 잡음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협회나 위원회의 회장과 임원 자리를 둘러싼 고소, 고발전까지 이어지면서 선수들의 권익은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4전 5기의 신화를 써냈던 한국 권투계의 스타, 홍수환 권투위원회 회장이 경찰서에나왔습니다.

    ◀ 홍수환 / 한국권투위원회장 ▶
    "뭐 문제가 있습니까?"
    "회장 자리를 놓고 반대하는 파들이 있는 거 같아요"

    홍수환 씨가 권투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된 지난 7월 4일의 이사회 회의록이 조작됐다는 의혹 때문입니다.

    회의에 참석한 이사 7명이 만장일치로 홍 회장을 추대했다는 이 회의록엔 7명의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2명은 회의장에 없었습니다.

    이사회가 열린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 당시 권투위 이사 ▶
    "사전에 연락같은 거 받으신게 있었어요 혹시?'
    "통보 받은 거 없습니다."

    서명에 사용된 자신의 도장은 누군가가 만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당시 권투위 이사 ▶
    "이 도장은 처음 봤습니다.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요."

    사문서를 위조했다는 의혹에 대해 권투위원회 측은 단순한 실수였다고 해명했습니다.

    ◀ 서성인 / 한국권투위원회 사무총장 ▶
    "실수로 남의 도장을 찍은 건가요?"
    "그렇죠. 서류를 내야되니까 회의록을 가지고 등기도 해야 되고 여러가지 하다보니까 실수가 있었어요."

    홍수환 회장 등을 고소한 전임 권투위원회 집행부 측이 공개한 CCTV 영상입니다.

    한 남성이 의자에 앉은 남성을 넘어뜨리더니 가방을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 넘어진 사람을 발로 밟은 뒤, 자리를 떠났습니다.

    권투위원회의 법인통장과 도장을 입수하기 위해 전.현직 임원 사이에 벌어진 폭행 사건입니다.

    권투위원회 회장 직을 둘러싼 이런 식의 분쟁은 회장의 막강한 권력 때문입니다.

    ◀ 강신준 / 전 권투위 사무총장 ▶
    "시합 승인도 그렇고 각종 라이센스, 자격증이 필요하잖아요. 그 자격증에 대한 권한도 권투 위원회 회장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권력은 큰데도 선출 과정이 투명하지 않아 권투위원회 회장의 적법성 논란은 거의 매번 불거졌습니다.

    ◀ 김한상 / 권투체육관장 ▶
    "이사를 아는 사람은 0.1%도 안돼요. 어떤 사람이 이사인지. 그런데 그 이사들이 몇 명이 모여서 주물떡 주물떡 해가지고 회장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회장이 만들어지면 무슨 쿠데타에 성공한 것처럼.."

    권투위원회가 이렇게 극심한 혼란에 빠져드는 동안 한국의 프로권투는 붕괴 직전의 위기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지난 8월, 전 챔피언 유명우씨가 주축이 된 4번째 프로권투 단체, 한국권투연맹이 출범했습니다.

    한국권투위원회, 한국권투협회, 한국권투연맹, 한국프로권투연맹, 불과 1년 사이에 프로권투계가 4개로 분열된 것입니다.

    ◀ 유명우 / 전 챔피언▶
    "같은 연맹에서 같이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체육관 관장들을 모아서 회의한 결과 차라리 그러면 법인 한 개 만들어서 따로 가자."

    ◀ 홍수환 / 한국권투위원회장 ▶
    "저로서는 선배로서도 그렇고 같은 권투인으로서도 그렇고 한국복싱을 살리는 입장에서 섭섭할 뿐이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투 영웅, 홍수환과 유명우는 이렇게 서로 등을 돌렸습니다.

    권투계는 갈갈이 찢어졌습니다.

    ◀ 유명우 / 전 챔피언▶
    "서로 자기 단체 아니라고 안 도와주고 말 한마디 응원 한마디도 안 해주고 그게 지금 프로복싱 현실입니다. 저는 한국이란 나라 싫습니다 솔직히. 프로복싱 선수로서."

    가뜩이나 얇은 선수층이 4개의 소속으로 갈라지면서 선수들은 수입은 커녕, 시합할 상대조차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 김한상 / 권투체육관장 ▶
    "선수는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이리저리 찢어지면 권투는 어떻게 살겠어요?"

    위원회를 이끌 권력의 선출과, 수입, 지출 등 그 어느 것도 투명하지 않은 권투위원회의 실상은 결국 한국 권투의 몰락을 자초했습니다.

    ◀ 유명우 / 전 챔피언▶
    "권투 인기도 없고 누가 광고도 안해요. 안 하는데 정말 그분들한테 억지로 광고한다고 억지로 돈 받아올 때는 얼마나. 저도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얼마나 부끄럽고 힘듭니까."

    많은 선수들이 못 견디고 떠난 자리엔 여전히 두 주먹만으로 성공하겠다며 챔피언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권투선수들의 단체가 바로 서지 않는다면 꿈을 위해 흘리는 그들의 땀은 영영 헛고생으로 그치고 말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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