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이필희 기자

교수님의 '표지갈이'

교수님의 '표지갈이'
입력 2015-12-07 10:45 | 수정 2015-12-15 11:22
재생목록
    한 대학 전공서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한 대학의 현직 교수입니다.

    그런데 6개월 후, 책 내용은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는데 표지에 적힌 저자의 인원수가 갑자기 8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다른 전공 서적. 제목은 그대로인데 겉표지 색깔만 바뀌었고, 저자는 2명에서 4명, 또다시 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학계와 출판계에서 암암리에 벌어져 온 소위 '표지 갈이'.

    일부 교수들은 이렇게 남의 책에 이름만 얹어 놓고 본인의 연구 실적으로 학교에 제출해 보수를 더 받아 가기도 했습니다.

    2580이 접촉한 해당 교수들은 "관행이다", "몰랐다" "출판사 탓이다" 등 다양한 입장을 내놨는데.. 심지어 "사람 죽인 것도 아니 지 않느냐" 고 반문한 학자도 있었습니다.

    출판사- 교수-대학, 그 사이에서 오랜 세월 지속돼온 거북한 공생관계를 추적합니다.

    -------------------------------------------------------------------------

    서울에 있는 이 대학교는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학교엔 방송사 취재진이 잇따라 다녀갔고, 교수님들이 검찰청에 불려 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A 대학 학생]
    "(뉴스 나온 거 보신 적 있으세요?) 보긴 봤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어떤 내용을 보셨어요?) 여기 나오고 표지 바꿔가지고.."

    여러 명의 교수가 검찰 수사를 받은 한 학과는 답변을 피했고.

    [학과 관계자]
    "(사실이 맞는 건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아 제가 공식적으로 답 드릴 부분은 없네요."

    학생들은 거론되는 교수가 누굴지 궁금해하며 동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
    "혹시 이 교수님 아니야 이거 밖에 없지.. 교수님 이름이나 그런 거 나오면 아마 그 수업은 피하게 되지 않을까..."

    한꺼번에 여러 명의 교수들이 수사 대상이 되면서 당황스러운 건 학교도 마찬가집니다.

    [학교 관계자]
    "지난 주에 저희 쪽으로 수사 협조 요청을 해 왔었어요. 그래서 이제 관련 자료만 요구를 한 상태에요."

    학업에 전념해야 할 대학이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이 학교의 한 학과에서는 전체 교수의 절반가량이 수사 대상이 됐을 정도입니다.

    이 학교 외에도 전국 70여 개 대학에서 200명 넘는 교수가 지금 검찰의 수사선 상에 놓여 있습니다.

    교수들이 쓴 책 때문입니다.

    환경에 관한 두 권의 책입니다.

    같은 주제로 하나는 제어공학, 다른 하나는 방지 기술이라는 제목이 뒤에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책 표지의 사진은 두 권 모두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으로 같습니다.

    맨 앞부터 한 장씩 차례로 넘겨봤습니다.

    목차는 물론 책의 내용과 편집 형태, 글자 색깔까지 모두 똑같고, 심지어 마지막 페이지의 숫자까지 똑같습니다.

    두 책에서 차이가 나는 건 저자의 수.

    작년 9월에 나온 제어공학은 저자가 한 명인데 반해, 올 3월 출간된 방지 기술은 저자가 무려 8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른바 '표지갈이', 겉장만 바꾼 겁니다.

    먼저 출간된 제어공학 책을 쓴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내년 정년 퇴임을 앞두고 그동안의 강의 자료와 연구 등을 정리해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책을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제목만 바꿔 출간한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출판사 부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김 OO 교수/A 대학교]
    "내가 내년에 학교를 퇴임을 하고 나면 그나마도 (출판사의) 판로가 다 끊기는데, (출판사가) 아는 사람 그러면 원하는 사람 그렇게 조각을 해서 왔더라고.. 다 아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쓰지도 않은 책에 이름을 올리고 원저자가 이를 받아준 것은 모두 저작권법 위반입니다.

    이름을 올린 교수들에게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이 OO 교수/B 대학교]
    "(한 분마다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따로 말씀드릴 내용이 없습니다. 끊습니다."

    교수들은 대체로 저작권법 위반인지 몰랐다고 말합니다.

    관행으로 다 그렇게 해왔다며, 오히려 억울해했습니다.

    [박 OO 교수/C 대학교]
    "소설 책 빼고는 다, 모든 교수들이 공동으로 지어서 이름 넣어서 쓰죠. 한 10년간 안 하는 곳도 하나 도 없습니다. 다 조사해보세요."

    또 다른 현직 교수.

    [최 OO 교수/D 대학교]
    "같아요? 내용이? (네, 페이지 수도 같고 목차도 같고.) 아 그래요? 저보고 부탁한다고 저자 동의가 있었으니까 한 번 넣어달라고 그러더라구요."

    다른 사람의 책에 글자 하나 안 쓰고 이름을 올렸지만, 순수한 의도였다고 했습니다.

    [최 OO 교수/D 대학교]
    "큰 살인죄도 아니고 도둑질도 아니고 어디 가서 나쁜 짓 한 것도 아니잖아요. 경제 사범도 엄청나게 많고 그런데 이것이 순수한 동기에서부터 잘 모르고 시작한 그런 내용인데..."

    이번엔 출판사를 찾아가 봤습니다.

    간판은 다른 출판사의 이름으로 돼 있고, 자리를 지키는 직원은 서너 명에 불과했습니다.

    [A 출판사 직원]
    "(말씀을 좀 여쭤봐야 될 게 있어서..) 아무도 대답해주실 수 있는 분이 안 계신데.."

    표지만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들을 수 없었습니다.

    [A 출판사 직원]
    "일단 조사받고 있는 거 충실하게 하고, 어떤 결론이 난 게 아직 아니고.. 말씀 따로 전달해 드릴게 없다고.."

    2580은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이공계 전공서적 가운데 표지갈이가 의심되는 책을 골라봤습니다.

    환경분야에 대한 분석 교재.

    국가가 시행하는 수질오염 관련 자격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다들 한 번씩 공부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각각 2010년과 11년, 13년에 출간됐습니다.

    책 제목과 배경 사진은 모두 같지만 2013년 판 만 표지 색깔이 보라색이 아닌 녹색 계열로 바뀌었습니다.

    책의 한가운데인 154쪽을 펴 봤습니다.

    세 책 모두 같은 내용과 그림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쪽 수는 2013년 판 만 368쪽으로 이전 책보다 4쪽 적었습니다.

    먹는 물의 수질 기준에 관한 내용이 2013년도부터 빠진 겁니다.

    내용은 줄었는데 저자 수는 오히려 2명에서 4명, 4명에서 5명으로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름을 추가로 올린 한 교수는, 출판사가 충분한 협의 없이 자신의 이름을 올려 책부터 내버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OO 교수/E 대학교]
    "내용을 좀 검토해라 그렇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책이 나왔더라. 왜 그렇게 했냐고 물으니까 책 재고가 많이 남아 가지고 새로 인쇄를 못하게 됐다..."

    또 다른 교수도 자신은 출판사에 이용당한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 OO 교수/F 대학교]
    "교재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이름 넣어도 되겠냐고.. 그때 그거를 안됩니다라고 얘기했어야 되는데 뭐 그러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죠. 멍청하니까 당하는 거예요."

    몰랐다, 가볍게 생각했다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저작권법 위반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같은 출판사가 펴낸 공학 개론 책 2권입니다.

    각각 2009년과 2010년에 출간됐는데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톱니바퀴를 표지 디자인으로 사용했습니다.

    속을 살펴보면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역시 저자는 4명에서 6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한 교수는 출판사의 영업 방식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저자로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박 OO 교수/G 대학교]
    "그 사람들은 무조건 넣고 보는 거에요. 책에다 이름을 넣고 나한테 찾아와서 책을 (교재로) 써달라는 식으로 얘기해요."

    그렇지만 굳이 이름을 빼란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막상 저작권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고 나니 후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박 OO 교수/G 대학교]
    "이게 이렇게까지 커지고 사회적으로 교수들이 굉장히 나쁜 놈이고 도둑놈이고 속된 말로 쓰레기 취급을 받으니까 굉장히 위축되고 애들 보기도 창피하고 수업도 제대로 못하겠고.."

    해당 출판사를 찾아가 '표지갈이'를 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출판사 관계자는 전공 서적은 판매량이 너무 적으며, 더구나 요즘은 학생들이 책 한 권을 파일로 복사해 나눠보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안 팔린다고 말합니다.

    [B 출판사 관계자]
    "교재는 두 학기 짜리가 없습니다. 한 학기에요. 한 번 팔면 끝나요. 1년에 한 번. 대한민국 웬만한 대학 교재가, 한 종당 1년에 200~300권 팔기도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장을 바꾸고 저자도 늘리면 조금이라도 더 팔 수 있다는 겁니다.

    [B 출판사 관계자]
    "분명히 잘못된 건 맞습니다. 잘못한 건 맞다. 저도 몰랐는데, 할 때는 몰랐는데 검찰이랑 나라에서 잘못됐다고 하니까, 아 생각해보니까 그렇구나."

    교수들은 책에 이름을 올려 실적을 쌓고, 출판사는 재고 책을 팔아 치우고.

    이 공공연한 공생 관계는 표지만 바꾼 책에 스스럼없이 이름을 올리는 관행이 수십 년간 이어져 왔기에 가능했습니다.

    [박찬구 서울대 교수/한국윤리학 회장]
    "오로지 학자적인 양심하고 정직성의 문제죠. 그런 식으로 슬쩍 그렇게 그야말로 무임승차를 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죠. 부도덕한 일입니다."

    [노영희 변호사]
    "영리 목적으로 책을 출판한 경우잖아요. 본인이 그냥 혼자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이런 경우에는 고소가 없어도 처벌할 수 있게끔 규정이 돼 있는 거죠."

    또 표지만 바꾼 책을 연구 실적으로 제출했다면 업무방해 혐의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노영희 변호사]
    "연구 실적도 없고 성과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실적이 있는 것처럼 조작을 해서 대학교에 자신을 재임용해달라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대학에서는 교수를 재임용하는 업무, 그 업무를 방해하는 셈이 되는 거죠."

    실제로 한 교수는 표지갈이 책을 자신의 출판 실적으로 학교에 보고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최 OO 교수/H 대학교]
    "재임용이나 정년 보장에는 저희는 교재를 사용하지 않아요, 실적에만.. 실적해 가지고 하면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한 10만 원 더 받아요. (실적으로 올린 부분에 대해서는?) 네 인정합니다. 그건 잘못한 것 맞죠."

    학계에서는 이 같은 표지갈이가 표절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문학 인천대 교수/출판학회 부회장]
    "저작권 관련 교육이 우리나라에 거의 없다. 나쁘다라는 인식을 못하고 있는데서 그런 것 생겨나.. 표절하고 표지갈이하고 비교하면 정말 표절은 아무것도 아닌 거죠."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교수를 믿고 비싼 값에 전공 책을 사서 공부하는 학생들입니다.

    [학생]
    "저희는 그냥 사는 거죠. 교수님이 지정해주시면 그냥 학교 서점에서 그냥.."

    [학생]
    "안 좋더라도 결국에는 교수님이 보는 책을 보는 게 답이라.. 그래서 좀 아쉽죠. (비싸도 사야 되고?) 네 비싸도 사야죠. 이게 3만 원이야? 하면서 삽니다."

    검찰은 입건된 2백여 명의 교수들 가운데 원저자 등을 제외하고 고의성이 인정되는 교수들을 이르면 다음 주 중 기소할 방침입니다.

    기소 대상이 되는 교수만 1백 명이 넘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또 교육부는 수사 결과를 토대로 연구 윤리 위반이 확인되면 엄중 조치하도록 각 대학에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피땀 흘린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열매를 기존의 성과물에 하나하나 더 쌓아올려 학문적 업적을 이루는 것.

    학자의 업이 그것이고, 대학의 교수를 우리 사회가 지성으로 예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민선/대학생]
    "저희가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분이어야 되는데 그런 행위 자체는 법적으로도 어긋나고 일반 상식선에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니까.."

    남이 쓴 책에 이름을 올려 자신의 저서로 둔갑시키는 교수를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합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