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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갈 곳 잃은 '폐지 전사'

갈 곳 잃은 '폐지 전사'
입력 2015-12-21 11:48 | 수정 2015-12-2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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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골목을 돌며 재활용 폐지를 줍는 노인들, 전국에 17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 재활용 '개미 군단' 덕에 한국의 폐지 회수율은 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런데 2년 전 개정된 법 때문에 이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법 개정으로 도심에 있는 고물상들이 모두 떠나야 하는 상황이 돼 노인들이 폐지를 주워 와도 팔 곳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부가 입만 열면 재활용을 외치면서 정작 폐지가 모이는 고물상은 폐기물 처리 업체로 취급해 쫓아내고 있다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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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을 자축하는 인파와 네온사인이 물결치는 밤거리, 오늘도 어김없이 김 씨 할아버지의 손수레가 나타납니다.

    상가 앞 쓰레기 더미에서 종이 상자만 골라 담습니다.

    [김 ○○/80세]
    "(이런 건 안 돼요?) 안 돼 안 돼. (고물상이) 받지도 않아요. 그건 돈도 안 되고. 박스만 주워야 돼요."

    이 근방에서 폐지 줍는 노인은 서른 명에 이릅니다.

    경쟁이라면 경쟁이지만 이곳에도 그들만의 룰이 있습니다.

    "안 돼 안 돼. 가져가는 사람 따로 있어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 참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참 멋지게 먹고살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두운 도시의 거리,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습니다.

    [김 ○○/80세]
    "(위험해요 이거) 위험해도 건너야지 어떻게 해."

    그렇게 두 시간 만에 빈 수레가 가득해졌습니다.

    낮 시간까지 하루 예닐곱 시간 종이박스를 줍고 손에 쥐는 돈은 1만 원 안팎.

    그래도 김 씨 할아버지는 이 거리 폐지 노인 중엔 벌이가 좋은 편입니다.

    [김 ○○/80세]
    "(하루에 돈으로 치면 얼마나 버세요?) 많이 벌면 만 한 2천 원. 보통은 뭐 7, 8천 원."

    할아버지에겐 폐지가 곧 생계의 수단입니다.

    [김 ○○/80세]
    "반찬도 사 먹고 전기 세도 내고 나한텐 폐지가 돈이지 이게. 한 푼이라도 내 호주머니한테 들어오는."

    재활용 전사로 불리는 폐지 노인은 전국에 17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또 이들이 폐지를 가져다 파는 고물상은 7만 개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고물상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떠나야 할 처지입니다.

    바뀐 법 때문에 도심에서 퇴출당하는 겁니다.

    새벽 시간 주택가 고물상, 열지도 않은 문 앞에 손수레가 줄을 섰습니다.

    "(매일 1등으로 오세요?) 응 매일 1등(왜 이렇게 일찍 나오세요?) 늙어서 잠이 없으니까 하하."

    아침 6시 반, 고물상 문이 열리자 어르신들이 하나둘 몰려듭니다.

    전날 온종일 모은 폐지를 저울에 달고 그 자리에서 현금을 받습니다.

    "시퍼런 거(만 원짜리) 하나 줘. 촬영도 하는데 네 사장님? (시퍼런 거 안 되겠는데?)그래도 빨간 영감(오천 원짜리) 하나 받아 가는가.. 하하."

    하루 평균 3, 4천 원 벌이가 대부분이지만 한 푼 한 푼이 요긴합니다.

    "천 원이고 이천 원이고 주는 거 현찰 주니까 그게 얼마나 고마워요. 요즘 같은 때는 천 원짜리 반찬 사먹 는 것도 벌벌 떠는데."

    "손자들한테 투자해 손자들 이제 대학교 갈 때 얼마."

    그런데 얼마 전, 고물상으로 구청 공문이 날아왔습니다.

    소음 때문에 민원이 들어왔는데 원래 주택가에선 고물상을 할 수 없으니 떠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최영호/A고물상]
    "주거지에 입지할 수 없다 이거죠. 다른 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요. 만약에 그 자리를 찾으려면 진짜 산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재작년 7월 폐기물 관리법이 바뀌면서 전엔 세무서에 사업자등록만 하면 고물상을 운영할 수 있었지만 이젠 관청에 폐기물처리업 신고를 해야 합니다.

    고물상이 들어설 수 있는 곳도 주거지나 상업지역은 안되고, 공업, 녹지 지역의 잡종지에서만 가능하게 됐습니다.

    [최영호/A고물상]
    "황당했죠. 저도 뭐 그럴 줄 알았으면 아예 시작을 안 했을 거고 원래 (고물상) 하던 데고 그래서 이제 되는 줄 알았죠."

    전국 고물상의 90% 이상이 잡종지가 아닌 곳에 있기 때문에 지금 자리에서 떠나야 할 형편이라는 게 전국 고물상 연합회 조사 결과입니다.

    서울의 경우 고물상이 허락되는 잡종지는 전체 면적의 2.9%, 경기도는 2.8%에 불과합니다.

    [정재안/전국고물상연합회]
    "도심에서 고물상이 떠나가지고 외곽으로 간들 그 땅도 없을뿐더러 실제로는 1,2%의 입지조건과 그만한 능력이 되는 그 재활용업체들이 없죠."

    당장 떠나라는 계고장이 전국의 고물상으로 날아들고 있고 실제로 법 시행 이후 2년 사이 정부 추산 2천 개, 업계 추산 5천 개의 고물상이 사라졌습니다.

    [봉주헌 대표/폐지노인복지연대]
    "주변에서 민원 하나가 들어오게 되면 발발 떨게 되고 결국은 그 행정 처분을 받아야 되는 그런 상황들이 오니까/더러워서 고물상을 관두겠다."

    전문신고꾼까지 등장했습니다.

    충남 아산시의 한 고물상, 논과 밭 사이에 고물상을 차린 지 12년 됐습니다.

    [나기정/B고물상]
    "(처음엔) 그냥 죽은 땅이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숲이 우리 사람 키 정도. 가슴 정도까지 올라올 정도로 잡풀들로만 이렇게 무성해있던 땅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지난 10월 농지에선 고물상을 할 수 없으니 접으라는 계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이런 계고장을 받은 주변 고물상이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나기정/B고물상]
    "3개월 정도 앞서서 두 개 업체가 걸려서 올 초인가 천안도 130군데인가 140군데인가 또 신고가 들어와 가지고 천안은 아주 그냥 난리가 났습니다."

    아산시는 고물상의 입지 조건을 잘 아는 전문 신고꾼 한 사람의 신고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산시 관계자]
    "전문적으로 하는 분이 있어요. 교통 신고 환경 같은 경우 사진 찍어가지고 하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농파라치라고 해서."

    고물상의 입지 조건을 잡종지로 제한한 건 혐오 시설로 분류됐기 때문입니다.

    고물상이 취급하는 폐지나 고철, 폐포장제는 모두 재활용 자원이 아니라 폐기물이고 따라서 고물상은 '분뇨 및 쓰레기 처리 시설'에 포함된다는 게 단속의 근거입니다.

    [단속 지자체]
    "대분류 쪽에 들어가는 게 이제 분뇨 및 쓰레기 처리 시설이고 그 하위 메뉴에 고물상이 포함돼 있다는 거예요."

    정부는 폐지가 재활용 대상이고, 재활용률을 높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폐지를 모아 놓으면 분뇨나 쓰레기로 취급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창섭 의장/자원재활용연대]
    "국민들에게 이걸 모아서 순환자원 재활용률을 높여야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모으는 과정이 폐기물을 처리하고 모으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건 모순된 어떤 시스템 고물상도, 폐지 노인도 그럼 자신들이 지금까지 쓰레기를 그토록 공들여 주워온 거냐고 반발합니다."

    [정재안 본부장/전국고물상연합회]
    "쓰레기들은 쓰레기봉투를 사서 거기 담어서 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주워오시는 것이 폐기되어야 할 폐기물이라 그러면 어느 누가 그것을 사겠습니까?"

    하지만 재활용 자원 수거에 있어 폐지 노인과 고물상의 역할은 없어선 안 되는 수준에 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재활용 자원을 수집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집니다.

    지자체와 계약을 맺은 전문 업체가 아파트 등을 돌며 수거하는 공공영역, 그리고 폐지 노인 등이 구석구석을 돌며 수거한 뒤 고물상으로 갖다 주는 민간 영역.

    서울시의 경우 이 민간영역에서 수거된 재활용 자원이 전체의 42%에 달할 정도로 그 기능이 큽니다.

    실제 우리나라의 폐지 회수율이 무려 90%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 폐지 노인이라는 전 세계 유례없는 수집 일꾼과 고물상이란 수집 거점의 덕이란 걸 정부도 인정합니다.

    [임양석 사무관/환경부 자원재활용과]
    "폐지나 고철 이런 것들은 수집할 수 있는 곳이 가장 가까운 곳이 주거지역이나 상업지역인데 거기에 고물상이 없으면 그 폐지나 고철 수집하는 분들이 가지고 멀리까지 가실 수가 없어요."

    고물상이 자리를 잃고 떠나면 그들이 수거하던 만큼의 재활용 자원이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될지 모르고 지자체는 이를 수거하는데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합니다.

    또 주로 영세 자영업자인 고물상 업자들은 물론 폐지를 주워 생활을 하는 노인들 역시 생계를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정희/76세]
    "아따 소리는 와 그렇게 지르고 가노?"

    최정희 할머니도 동네 골목을 돌며 종이 박스를 줍습니다.

    또 주로 영세 자영업자인 고물상 업자들은 물론 폐지를 주워 생활을 하는 노인들 역시 생계를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정희/76세]
    "아따 소리는 와 그렇게 지르고 가노?"

    최정희 할머니도 동네 골목을 돌며 종이 박스를 줍습니다.

    [최정희/76세]
    "3일에 한 번 가서 천 원도 받고 2천 원도 받는데 그게 뭔 돈이 돼요. 그럭저럭 먹고살지만 내가 만약에 아프면 자식들한테 짐 될까 봐 걱정이지."

    혼자 사는 집 입구와 방 한 켠에는 빈 병과 헌 옷이 가득합니다.

    목돈이 필요할 때 내다 팔려고 1년 넘게 모은 것들입니다.

    [최정희/76세]
    "기일 한 번씩 돌아오면 좀 돈이 많이 들잖아요. (지금 생각하시는 건 할아버지 제사 때?) 저거라도 꺼내놔야 돈을 장만해야 조기라도 한 마리 사잖아요."

    할머니에게 고물상은 쌀도 사고 남편 제삿상에 올릴 생선도 살 수 있게 폐지를 사주는 고마운 곳입니다.

    [최정희/76세]
    "(만약에 고물상 없어져 가지고 이거 팔 데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그럼 그도 저도 못하면 굶어 죽나 그런 생각 들지요."

    한 복지단체가 폐지 노인 200명을 1대 1로 면접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폐지 노인의 실상을 정리해 보면, (나이는 70대로 혼자 살지만 동네 말동무도 없고 심한 우울증과 관절염, 고혈압을 앓고 있지만 돈 걱정에 병원은 잘 가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7일 폐지를 주워 한 달에 8만 6천 원을 법니다.)

    [임철진/생명나눔재단 사무총장]
    "그분들한테는 이 폐지는요 그야말로 생명줄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주거문제 해결도 안 되죠. 먹을 수 있는 먹거리 해결도 안 되죠. 그야말로 행동할 수 있는 기반입니다."

    그래서 고물상은 폐지를 사고파는 거래처 이상의 공간입니다.

    [임철진 사무총장/생명나눔재단]
    "고물상이 없어진다면 아마 이 노인들이 고물상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갈 가능성이 있겠죠. 아니면 포기한다든가요. 그냥 포기가 아니죠 삶을 포기할 수도 있는 거죠."

    이 때문에 고물상이 더럽고 시끄럽다는 이유로 도심에서 무조건 퇴출시킬 게 아니라 환경친화적인 시설로 개선해 도심과 공존하도록 해달라는 게 업계와 폐지 노인들의 요구입니다.

    [봉주헌 대표/폐지노인복지연대]
    "소음이나 분진이나 냄새나 이런 거에 대해서 환경성 기준을 일정하게 만들면 그거에 대해서 재활용업계들이 고물상들이 그걸 동의하고 하겠다."

    정부 역시 문제점을 인정한다며 폐기물과 재활용자원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고 고물상이 현재의 자리에서 영업할 수 있는 법 개정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임양석 사무관/환경부 자원재활용과]
    "처음의 문제는 환경적인 문제 때문에 접근을 하게 됐는데 나중에 보다 보니까 이런 이제 입지 문제라든가 이런 게 드러나게 된 거거든요. 환경부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고물상은 그저 종이와 고철, 캔 깡통이 쌓여있는 폐기물 창고가 아닙니다.

    음지에 버려졌던 재활용 자원이 빛을 보는 집합소이고 그 일을 하는 누군가에겐 생계를 건 일터입니다.

    더럽다며 안 보이는 먼 곳으로 치우는 게 아니라 공존하는 길을 찾는 것, 재활용 정책의 출발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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