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80
권희진 기자
권희진 기자
전단지에 비친 세상
전단지에 비친 세상
입력
2015-12-28 11:24
|
수정 2015-12-2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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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식당, 피트니스센터, 학원 등 곳곳에 뿌려지는 전단지.
무심히 받는 사람에겐 귀찮은 종이 한 장이지만, 배포하는 아주머니들에게는 시급 1만 원의 고된 일자리입니다.
누군가에겐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한 희망이기도 하고, 억울한 사정을 알아 달라는 목소리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치워버려야 할 지저분한 쓰레기이기도 한 전단지.
저마다의 사연을 통해 2015년 12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아봅니다.
----------------------------------------
직장인들이 몰려나오는 시간이면 어느 곳이든, 길목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손길들이 분주합니다.
"원두커피 서비스, 음료 서비스.."
점심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재빨리 달려가 전단지를 건네 봅니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습니다.
무안하지만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전단지를 건네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선뜻 손 내밀어 받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느덧 끝나가는 점심시간.
아직도 꽤 남은 전단지에 마음이 급해지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행인들을 따라가 손에 쥐어주다시피 필사적으로 전단지를 건넵니다.
돌려야 할 전단지가 남으면, 식당에서 받기로 한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통로가 넓어서 여기는 막 뛰어다녀야 돼요. 한동안은 뛰어야 돼요."
받는 입장에선, 받자니 성가시고 안 받자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지못해 받은 전단지들은 대부분 눈길조차 못 받고 구겨지거나, 휴지통에 버려집니다.
"버릴만한데도 마땅히 없고, 보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거의 안 받죠."
3시간을 동분서주한 끝에, 한 시간에 만 원씩, 오늘 일당 3만 원을 받았습니다.
쑥쓰럽고 무안한 상황들을 견뎌야 하고, 비나 눈이 오면 할 수도 없는 일이 전단지를 돌리는 일입니다.
꽤 힘들고 고된 노동인데다 경우에 따라 경범죄로 과태료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전단지를 돌리는 건 특별한 기술 없이 서민들이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일자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김 모 씨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김 모 씨]
"택배, 자장면 배달 뭐 세탁소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게 앞에 차가 서있으면.. 어디서 나올지 몰라도 그 앞에서만 있으면 이렇게 한 번 나오는 게 보이면 쫓아 들어가고.."
[김 모 씨]
"길거리 할 때는 괜찮은데 추워서 그렇고.. 이거(아파트 배포)는 눈치 봐야 되고."
16층 아파트 맨 윗층에서부터 한집 한집 현관문에 전단지를 붙이면서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출입구 비밀번호를 모르니 드나드는 사람이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김 모 씨]
"우체국 아저씨들 들어오시잖아요. 저런 분들 들어오시면 또 반갑다고.. 저쪽으로 가야 돼 이제."
대여섯 시간 동안, 1천 장의 전단지를 모두 붙이고 나면 일당 4만 원.
아파트 경비원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애써 붙인 전단지를 고스란히 다시 수거해야 합니다.
[김 모 씨]
"가방 뺏어서 자기가 갖고 있을 테니까 떼어가지고 내려오세요.(그러죠) 운 없는 날은 연타로 걸린다고. 이 아파트 들어가도 걸리고 다른 아파트 들어가도 걸리고."
65살 강이 태 씨는 동네 마트의 전단지 1천 장을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지역에 돌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전단지를 붙이는 일이 이젠 그의 직업입니다.
"추우시죠?"
"예. 날씨가 꽤 춥습니다."
IMF로 정리해고당한 뒤 자영업에 뛰어들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영업도 실패하고,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한지 벌써 몇 년째 하지만 건강한 동안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강의태]
"자영업 하다가 신통치 않아 가지고 그만두고 뭐 특별한 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강 씨처럼 오전에 사무실에 모여 전단지를 받아서 돌리고 일당을 버 는 사람들 대부분은 갑자기 직장을 잃은 중년 남성들입니다.
"처음엔 걷는 거니까 별거 없겠지 했는데. (천만에요.) 발바닥에 물집 잡히고.. 아 놀랐어요."
대형마트와 경쟁해야 하는 영세한 동네 마트나 자영업자 입장에선, 장당 50원 정도의 비용으로 이만한 홍보수단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김용주/마트 경영]
"저희 같은 자영업자들은 뭐 방송매체나 기타 등등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하기 때문에."
전단지는 특히 좁은 지역에서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전단지는 자주,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는 수단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기댈 곳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이 전단지에 담기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습니다. 91년도에 여기 안산에서 유괴를 당했습니다.."
24년 전인 91년 여름, 정원식 씨는 10살 난 맏딸 정유리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동네에서 놀던 정 양을 누군가가 억지로 데려갔다는 증언.
유괴라고 신고했지만 경찰은 가출이라고 했고, 이후 24년 동안, 딸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안산공단 근로자였던 가난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딸을 찾는 전단지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습니다..."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한 가닥의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얘가 이걸 받아볼 수도 있는 것이고.. 얘는 혹시 이 부모가 저를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거든요.."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언젠가는 한 번 이렇게 돌리면 어디선가는 꼭 볼 수가 있을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드는 거죠."
하지만 전철의 빈 광고판에 전단지를 붙이게 해달라는 부탁은 번번이 거부됐고, 전단지를 나눠주다 단속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철도청에서 이렇게 붙여 넣을 수 있는 그런 자리 좀 만들어줬으면.. (지금 여기다 붙이면 안돼요?") 안 되죠. (전단지를) 못 돌리게도 하는데.."
정 씨가 내미는 전단지를 유심히 읽는 승객들은 사연을 묻거나 위로를 건네기도 합니다.
[이미홍]
"용기라도 좀 드리고 싶었어요. 열심히 찾아서 언젠가는 꼭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정 씨의 사연을 담은 전단지는 그대로 반으로 접혀 그대로 무릎 위에 놓이기도 하고, 객차의 선반 위에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낸 승객들은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파묻고, 그런 승객들에게 정 씨는 덜컹이는 전철에서
비틀거리며 전단지를 건넵니다.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지하철에서 돌리는 것이 밖에서 돌리는 것보다 손실이 덜 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접든지 해가지고 호주머니에 넣든지 밖에 가서 버릴망정 전철 안에서는 안 버리더라고요."
이튿날, 공항철도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정 씨가 자신이 건넸던 전단지를 쓰레기통에서 발견했습니다.
정 씨는 구겨진 전단지를 주운 뒤 곱게 펴서 다시 승객들에게 건네기 시작합니다.
"실종된 딸을 찾고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용산역 광장.
10년 전 해고된 KTX 여승무원 2명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실례합니다. 가시면서 읽어봐주세요."
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2심까지의 판결은 지난 2월 대법원 판결에서 뒤집혔습니다.
복직을 향한 법적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매주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철도공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미정/KTX 해고 승무원]
"많이 민망하죠. 그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절대. 어떤 분들은 아예 멀찌감치 서 보고서는 이렇게 팔짱을 끼고 오세요. 안 받겠다는 의지죠."
기차역으로 오가는 바쁜 발걸음.
해고, 복직 같은 무거운 단어들.
남의 일엔 무심한 게 인지상정인지라 어쩌면 당연하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버려진 전단지를 볼 때면 착잡합니다.
[김승하/KTX 해고 승무원]
"비정규직이나 이런 분이 없으면 이제 이런 거에 대해서 남의 세상 얘기라고 느끼실 수 있으니까. 그럼 별 관심 없이 그냥 버리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냥 그런 생각은 해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해고된 지 10년.
이제는 엄마가 되고, 주부가 됐지만 전단지를 돌리는 일은 매주 반복됩니다.
작지만 간절한 자신들의 목소리가 어디엔가 가닿을 거라는 희망을 아직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미정/KTX 해고 승무원]
"이렇게 만들어서 돌리면 뭐 열에 한 명 정도는 보지 않을까요. 아니면 100에 한 명이라도? 조금 더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거 저희가 생각하는 목표는 그거인 거 같아요."
한 장에 불과 수십 원 정도로 다른 광고 수단보다 값싼 비용.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내용과 사연을 읽을 수도 있다는 장점.
주로 신장개업한 영세 자영업자나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 싶은 개인들이 전단지를 많이 제작했지만, 경기 침체와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그것도 예전 일이 됐다고 합니다.
[조순호 사장/인쇄업체]
"예전에는 전단을 뿌렸을 때 몇만 장 단위로 뿌렸거든요. 근데 지금은 뭐 한 천 부, 이천 부, 단위가 예전보다는 십분의 일 이상으로 줄었습니다."
한 장 한 장 사람의 손으로 건네지는 전단지에는 넉넉하지 않은 자영업자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기대가 담기기도 하고 내 소중한 사람을 찾아달라는, 억울한 사정을 좀 알아달라는, 절박한 사연으로 채워져 있기도 합니다.
가던 길을 가로막는 성가신 종이 한 장이지만 한 번쯤 손을 내밀어 그 속에 담긴 이웃들의 삶을 읽어봐도 좋을 겨울입니다.
무심히 받는 사람에겐 귀찮은 종이 한 장이지만, 배포하는 아주머니들에게는 시급 1만 원의 고된 일자리입니다.
누군가에겐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한 희망이기도 하고, 억울한 사정을 알아 달라는 목소리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치워버려야 할 지저분한 쓰레기이기도 한 전단지.
저마다의 사연을 통해 2015년 12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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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이 몰려나오는 시간이면 어느 곳이든, 길목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손길들이 분주합니다.
"원두커피 서비스, 음료 서비스.."
점심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재빨리 달려가 전단지를 건네 봅니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습니다.
무안하지만 태연한 척,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전단지를 건네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선뜻 손 내밀어 받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느덧 끝나가는 점심시간.
아직도 꽤 남은 전단지에 마음이 급해지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행인들을 따라가 손에 쥐어주다시피 필사적으로 전단지를 건넵니다.
돌려야 할 전단지가 남으면, 식당에서 받기로 한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통로가 넓어서 여기는 막 뛰어다녀야 돼요. 한동안은 뛰어야 돼요."
받는 입장에선, 받자니 성가시고 안 받자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마지못해 받은 전단지들은 대부분 눈길조차 못 받고 구겨지거나, 휴지통에 버려집니다.
"버릴만한데도 마땅히 없고, 보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거의 안 받죠."
3시간을 동분서주한 끝에, 한 시간에 만 원씩, 오늘 일당 3만 원을 받았습니다.
쑥쓰럽고 무안한 상황들을 견뎌야 하고, 비나 눈이 오면 할 수도 없는 일이 전단지를 돌리는 일입니다.
꽤 힘들고 고된 노동인데다 경우에 따라 경범죄로 과태료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전단지를 돌리는 건 특별한 기술 없이 서민들이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일자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김 모 씨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김 모 씨]
"택배, 자장면 배달 뭐 세탁소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게 앞에 차가 서있으면.. 어디서 나올지 몰라도 그 앞에서만 있으면 이렇게 한 번 나오는 게 보이면 쫓아 들어가고.."
[김 모 씨]
"길거리 할 때는 괜찮은데 추워서 그렇고.. 이거(아파트 배포)는 눈치 봐야 되고."
16층 아파트 맨 윗층에서부터 한집 한집 현관문에 전단지를 붙이면서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출입구 비밀번호를 모르니 드나드는 사람이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김 모 씨]
"우체국 아저씨들 들어오시잖아요. 저런 분들 들어오시면 또 반갑다고.. 저쪽으로 가야 돼 이제."
대여섯 시간 동안, 1천 장의 전단지를 모두 붙이고 나면 일당 4만 원.
아파트 경비원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애써 붙인 전단지를 고스란히 다시 수거해야 합니다.
[김 모 씨]
"가방 뺏어서 자기가 갖고 있을 테니까 떼어가지고 내려오세요.(그러죠) 운 없는 날은 연타로 걸린다고. 이 아파트 들어가도 걸리고 다른 아파트 들어가도 걸리고."
65살 강이 태 씨는 동네 마트의 전단지 1천 장을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지역에 돌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전단지를 붙이는 일이 이젠 그의 직업입니다.
"추우시죠?"
"예. 날씨가 꽤 춥습니다."
IMF로 정리해고당한 뒤 자영업에 뛰어들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영업도 실패하고,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한지 벌써 몇 년째 하지만 건강한 동안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강의태]
"자영업 하다가 신통치 않아 가지고 그만두고 뭐 특별한 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강 씨처럼 오전에 사무실에 모여 전단지를 받아서 돌리고 일당을 버 는 사람들 대부분은 갑자기 직장을 잃은 중년 남성들입니다.
"처음엔 걷는 거니까 별거 없겠지 했는데. (천만에요.) 발바닥에 물집 잡히고.. 아 놀랐어요."
대형마트와 경쟁해야 하는 영세한 동네 마트나 자영업자 입장에선, 장당 50원 정도의 비용으로 이만한 홍보수단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김용주/마트 경영]
"저희 같은 자영업자들은 뭐 방송매체나 기타 등등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하기 때문에."
전단지는 특히 좁은 지역에서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전단지는 자주,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는 수단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기댈 곳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이 전단지에 담기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습니다. 91년도에 여기 안산에서 유괴를 당했습니다.."
24년 전인 91년 여름, 정원식 씨는 10살 난 맏딸 정유리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동네에서 놀던 정 양을 누군가가 억지로 데려갔다는 증언.
유괴라고 신고했지만 경찰은 가출이라고 했고, 이후 24년 동안, 딸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안산공단 근로자였던 가난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딸을 찾는 전단지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습니다..."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한 가닥의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얘가 이걸 받아볼 수도 있는 것이고.. 얘는 혹시 이 부모가 저를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거든요.."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언젠가는 한 번 이렇게 돌리면 어디선가는 꼭 볼 수가 있을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드는 거죠."
하지만 전철의 빈 광고판에 전단지를 붙이게 해달라는 부탁은 번번이 거부됐고, 전단지를 나눠주다 단속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철도청에서 이렇게 붙여 넣을 수 있는 그런 자리 좀 만들어줬으면.. (지금 여기다 붙이면 안돼요?") 안 되죠. (전단지를) 못 돌리게도 하는데.."
정 씨가 내미는 전단지를 유심히 읽는 승객들은 사연을 묻거나 위로를 건네기도 합니다.
[이미홍]
"용기라도 좀 드리고 싶었어요. 열심히 찾아서 언젠가는 꼭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정 씨의 사연을 담은 전단지는 그대로 반으로 접혀 그대로 무릎 위에 놓이기도 하고, 객차의 선반 위에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낸 승객들은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파묻고, 그런 승객들에게 정 씨는 덜컹이는 전철에서
비틀거리며 전단지를 건넵니다.
[정원식/정유리 양 아버지]
"지하철에서 돌리는 것이 밖에서 돌리는 것보다 손실이 덜 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접든지 해가지고 호주머니에 넣든지 밖에 가서 버릴망정 전철 안에서는 안 버리더라고요."
이튿날, 공항철도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정 씨가 자신이 건넸던 전단지를 쓰레기통에서 발견했습니다.
정 씨는 구겨진 전단지를 주운 뒤 곱게 펴서 다시 승객들에게 건네기 시작합니다.
"실종된 딸을 찾고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용산역 광장.
10년 전 해고된 KTX 여승무원 2명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실례합니다. 가시면서 읽어봐주세요."
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2심까지의 판결은 지난 2월 대법원 판결에서 뒤집혔습니다.
복직을 향한 법적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매주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철도공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미정/KTX 해고 승무원]
"많이 민망하죠. 그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절대. 어떤 분들은 아예 멀찌감치 서 보고서는 이렇게 팔짱을 끼고 오세요. 안 받겠다는 의지죠."
기차역으로 오가는 바쁜 발걸음.
해고, 복직 같은 무거운 단어들.
남의 일엔 무심한 게 인지상정인지라 어쩌면 당연하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버려진 전단지를 볼 때면 착잡합니다.
[김승하/KTX 해고 승무원]
"비정규직이나 이런 분이 없으면 이제 이런 거에 대해서 남의 세상 얘기라고 느끼실 수 있으니까. 그럼 별 관심 없이 그냥 버리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냥 그런 생각은 해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해고된 지 10년.
이제는 엄마가 되고, 주부가 됐지만 전단지를 돌리는 일은 매주 반복됩니다.
작지만 간절한 자신들의 목소리가 어디엔가 가닿을 거라는 희망을 아직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미정/KTX 해고 승무원]
"이렇게 만들어서 돌리면 뭐 열에 한 명 정도는 보지 않을까요. 아니면 100에 한 명이라도? 조금 더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거 저희가 생각하는 목표는 그거인 거 같아요."
한 장에 불과 수십 원 정도로 다른 광고 수단보다 값싼 비용.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내용과 사연을 읽을 수도 있다는 장점.
주로 신장개업한 영세 자영업자나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 싶은 개인들이 전단지를 많이 제작했지만, 경기 침체와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그것도 예전 일이 됐다고 합니다.
[조순호 사장/인쇄업체]
"예전에는 전단을 뿌렸을 때 몇만 장 단위로 뿌렸거든요. 근데 지금은 뭐 한 천 부, 이천 부, 단위가 예전보다는 십분의 일 이상으로 줄었습니다."
한 장 한 장 사람의 손으로 건네지는 전단지에는 넉넉하지 않은 자영업자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기대가 담기기도 하고 내 소중한 사람을 찾아달라는, 억울한 사정을 좀 알아달라는, 절박한 사연으로 채워져 있기도 합니다.
가던 길을 가로막는 성가신 종이 한 장이지만 한 번쯤 손을 내밀어 그 속에 담긴 이웃들의 삶을 읽어봐도 좋을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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