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80
이필희 기자
이필희 기자
100년 맞은 아픔의 섬 '소록도', 세월은 흘렀지만..
100년 맞은 아픔의 섬 '소록도', 세월은 흘렀지만..
입력
2016-03-07 11:37
|
수정 2016-03-0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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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들이 격리 수용돼 왔던 전라남도 고흥군의 소록도 병원이 올해로 설립 100년을 맞았습니다.
치료제 개발로 더이상 격리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견과 차별로 점철된 인권 유린의 역사입니다.
치유의 섬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살펴봅니다.
------------------------------------------------------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항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섬.
어린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입니다.
거리는 가까워도 거친 물살 탓에 육지와 격리돼 있던 이 섬은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외부인들의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방문객들이 하얗게 피어오른 매화를 배경으로 추억을 사진에 담습니다.
1940년 한센병 환자들의 손으로 조성된 중앙공원.
편백 나무와 향나무 등 일본과 대만에서 들여온 100여 종의 나무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김호순/관광객]
"좋게 해 놨다 그래서 한 번 가보자 그래서 왔어요."
(와 보시니까 어떠세요?)
"너무 아주 잘 해 놨어요."
(잘 해 놨어요?)
"깔끔하게."
중앙공원 입구 앞쪽의 빨간 벽돌 건물들은 감금실과 검시실.
일제 강점기 시절 말을 듣지 않는다며 환자들을 강제로 가두고 체벌했던 곳입니다.
[차관희/관광객]
"시신이 들어오면 여기서 시신을 다 해부했던 데야."
[차관희/관광객]
"소록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실제로 보여주면 더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아서 왔어요."
시신을 해부했던 검시실의 한쪽 방에는 남성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했던 이른바 단종수술대가 남아있습니다.
[배연하/고흥군 문화관광해설사]
"마취도 하지 않고 생으로 강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어마어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3.1절을 맞아 소록도를 찾은 사람들에겐 감회가 더 새롭습니다.
[박삼석/관광객]
"일본의 어떤 그런 만행, 우리들의 무관심,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당하지 않았나.."
지금은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배연하/고흥군 문화관광해설사]
"이 안쪽에서 설명할 때도 절대 들어오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밖에서 쭈삣쭈삣 들여다보시는 분들도 아직도 많으세요."
소록도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소록도를 찾는 방문객은 한해 30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단절의 공간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소록도.
하지만 잘못된 상식에서 비롯된 멸시와 차별은 소록도 한센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올해 여든 살의 장인심 할머니.
꽃다운 16살 이 섬에 들어온 뒤 어느새 60여 년이 흘렀습니다.
21살 되던 해 이곳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뤘지만 아이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유전되는 병이 아니었지만 한센인 부부의 임신을 제한하는 규정 탓에 강제로 끌려가 낙태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장인심/소록도 주민]
"그냥 애를 죽였는지 긁어내 어린 것은.. 이제 핏덩어리로 조그마한 것은 긁어낸다고."
평생 아이를 아쉬워하던 남편은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났고, 혼자 남은 할머니는 점점 더 가족이 그립습니다.
[장인심/소록도 주민]
"명절이면 다른 사람들은 찾아와요. 나도 아들, 딸 하나 있었으면 어떻게 생긴 사람을 낳았을까."
소록도에서 7~8KM 떨어진 오마도 간척지.
10.7 제곱킬로미터의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1962년 당시 한센병이 완치된 2천여 명의 소록도 주민들이 이 간척사업에 동원됐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장비는 전혀 없었습니다. 돌과 흙을 운반해 가지고 우리 힘으로 이 둑을 다 만들게 됐습니다."
거친 해류와 싸워가며 맨손으로 둑을 쌓다 보니 방조제 중간이 바다로 휘어져 있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인부가 동원돼 가지고 흙을 갖다 부어 놓으면 자고 나면 흙이 간 곳이 없고, 바다로 침하되가지고.."
하루 일당은 그 시절 순대국 한 그릇 값인 30원.
그렇게 2년 가까이 일했지만 마지막 6개월은 그 돈조차 받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계속했던 건 간척지에 한센인 1000세대를 정착시키겠다는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내보내지도 외출해주지도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활 속에서 소록도에서 살다가 바다를 메워가지고 우리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다니까."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오마도 원주민들의 반대가 부담스러웠던 정부는 간척지 이주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세월이 지나 억울함을 호소해보려고 했지만 당시 일을 했다는 걸 입증해줄 근로자 명단이나 봉급 명세서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그런 문제를 법적으로 추진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참고 사셨군요) 꾹 참고, 입 다물고 지금까지 살아왔었습니다."
소록도 곳곳엔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각종 차별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소록대교 아래에 남아 있는 부서진 콘크리트 시설물.
제비 선창이라 불린 이곳은 한센인들이 육지로 가는 배를 타는 곳이었습니다.
육지와 더 가까운 소록도 선착장은 병원 직원 등 비한센인들 전용이었습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외출 허가 받으면 새벽에 나와 걸어서 여기까지 와서 가고 전송도 하고.. (그 시간대도 새벽 시간대에요? ) 새벽에 (왜요?) 녹동항 가도 남 안 볼 때 첫 차나.. 안 그러면 걸어서 가야 돼, 안 태워주니까."
차별은 환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지난 1917년 한센병 치료를 위해 소록도에 처음 세워진 자혜의원.
이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방치된 건물이 하나 나타납니다.
콘크리트 더미만 남은 이곳은 결핵 환자를 따로 수용한 결핵 병동이었습니다.
소록도 환자들 사이에서도 결핵에 걸린 사람을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차별했기 때문입니다.
[김OO/소록도 주민]
"같이 사는 동료 환자들한테 이중의 차별을 받고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막기 위해서..."
소록도 사람들은 의사들이 쉬는 공휴일에 죽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숨진 사람의 시신은 곧바로 해부 실습용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금요일 날 죽었다 그러면 식구들이 하룻밤을 같이 자줘. 그래서 해부 안 하고 장례하도록."
해부가 끝나면 곧바로 화장이 됐고, 유골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죽어서도 육지로 나갈 수 없어 납골당의 자리가 꽉 차면 오래된 순서대로 1년에 한 번씩 뒷편의 무덤에 합장을 했습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죽고 나서도 무덤 하나 못 가지고, 남녀 구분 없이 한 데 묻혔으니까 얼마나 비참해."
소록도 '사랑의 집'이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미용 봉사 때문입니다.
[송영남 지부장/고흥군 미용협회]
"잘해보려고 아주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써요. 연세가 드셔서 흰머리가 나니까 염색을, 젊어지려고 염색을 또 많이 해요."
소록도를 찾는 자원봉사자는 한해 4천 명 가량.
이들은 병동과 마을에서 소록도 주민들을 도우며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문재원/자원봉사자]
"가까이 가면 안 되고 뭔가 접촉하면 안 되고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래 갖고 괜히 사람을 피한다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한 해 발생하는 한센병 환자 수는 예닐곱 명 수준.
하지만 약만 먹으면 바로 치료되는 '정복된 병'인 만큼 사실상 환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박승규 외과과장/소록도병원]
"지금 병원 치료를 받는 내용들은 한센병의 후유증이죠. 말단의 신경을 침범해서 신경을 마비시켜버립니다. 그것 때문에 문제들이 생기는 거죠."
지금 소록도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완치된 상태.
전염 우려가 없는데도 소록도는 부분 개방만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릇된 인식과 편견을 가진 외부인들이 주민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조성래 선도반장/원생자치회]
"여기 문둥이가 어디 살아요? 그러거든. 우리한테 직접 묻는단 말이요. 그러면 우리가 뭔 대답을 하겠어요. 비일비재해요, 아직까지도."
오는 5월 소록도 병원은 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습니다.
소록도 주민들이 참여하는 100년사 편찬 작업은 질병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다시없기를 바라는 기원이기도 합니다.
[박형철 원장/소록도 병원]
"새로운 질병이 생기더라도 질병으로 인해서 상대방을 차별하거나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죠."
100주년을 기념해 새로 만든 박물관에는 역사 자료뿐 아니라 주민들이 장애가 있는 손으로 그리고 쓴 작품들도 함께 전시할 계획입니다.
1960년대부터 40년 동안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보살폈던 마리안느 수녀도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김OO/소록도 주민]
"(오시면 어떤 말씀을 전해주고 싶으세요?) 뭐 반갑다고 하는 거죠 뭐. 그리고 조금 더 농담 심하게 하면.. 어 지금까지 살아 있었네?."
이들의 작은 바람은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인 똑같은 사람으로 봐달라는 겁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다 나은 사람 보고 왜 한센인이라고 불러. 결핵 걸렸다가 나으면 그게 결핵인이야? 안 해야 돼. 일본도 무척 고민을 했더라고 그래서 회복자라 하고.."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소록도 100년의 역사.
일본은 과거의 한센병 대책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자국민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대만 등 다른 나라의 피해자에게도 1인당 1억 원 수준의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소록도 피해자들은 2011년부터 우리 정부를 상대로 강제 불임수술과 낙태수술로 침해당한 인권 피해에 대해 소송을 걸었고, 5건의 소송에서 480여 명이 하급심에서 승소했지만, 정부는 대법원의 판단까지 받아보겠다는 입장입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힘없는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일본에서 했으면 우리도 해줘버리면 끝나는 일을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
당시 불임, 낙태 수술은 동의하에 이뤄졌다며 강제 수술의 증거를 입증하라는 게 정부측 주장입니다.
[박영립 변호사/한센인권보호단장]
"국민 보호 의무를 다하거나 그래놓지 않고서는 이제 와서 그것을 그들에게,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그건 너무 가혹하죠. 그건 공평하지도 않죠."
소록도 주민 수는 1950년대 6천여 명에서 현재 550여 명.
평균 나이 74세로 주민수는 점차 줄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슴에 서린 한들이, 백 년 동안 소록도가 품고 있는 아픈 상처가 더 늦기 전에 씻길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치료제 개발로 더이상 격리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견과 차별로 점철된 인권 유린의 역사입니다.
치유의 섬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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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군 녹동항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섬.
어린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소록도입니다.
거리는 가까워도 거친 물살 탓에 육지와 격리돼 있던 이 섬은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외부인들의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방문객들이 하얗게 피어오른 매화를 배경으로 추억을 사진에 담습니다.
1940년 한센병 환자들의 손으로 조성된 중앙공원.
편백 나무와 향나무 등 일본과 대만에서 들여온 100여 종의 나무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김호순/관광객]
"좋게 해 놨다 그래서 한 번 가보자 그래서 왔어요."
(와 보시니까 어떠세요?)
"너무 아주 잘 해 놨어요."
(잘 해 놨어요?)
"깔끔하게."
중앙공원 입구 앞쪽의 빨간 벽돌 건물들은 감금실과 검시실.
일제 강점기 시절 말을 듣지 않는다며 환자들을 강제로 가두고 체벌했던 곳입니다.
[차관희/관광객]
"시신이 들어오면 여기서 시신을 다 해부했던 데야."
[차관희/관광객]
"소록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실제로 보여주면 더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아서 왔어요."
시신을 해부했던 검시실의 한쪽 방에는 남성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했던 이른바 단종수술대가 남아있습니다.
[배연하/고흥군 문화관광해설사]
"마취도 하지 않고 생으로 강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어마어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3.1절을 맞아 소록도를 찾은 사람들에겐 감회가 더 새롭습니다.
[박삼석/관광객]
"일본의 어떤 그런 만행, 우리들의 무관심,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당하지 않았나.."
지금은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배연하/고흥군 문화관광해설사]
"이 안쪽에서 설명할 때도 절대 들어오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밖에서 쭈삣쭈삣 들여다보시는 분들도 아직도 많으세요."
소록도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소록도를 찾는 방문객은 한해 30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단절의 공간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소록도.
하지만 잘못된 상식에서 비롯된 멸시와 차별은 소록도 한센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올해 여든 살의 장인심 할머니.
꽃다운 16살 이 섬에 들어온 뒤 어느새 60여 년이 흘렀습니다.
21살 되던 해 이곳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뤘지만 아이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유전되는 병이 아니었지만 한센인 부부의 임신을 제한하는 규정 탓에 강제로 끌려가 낙태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장인심/소록도 주민]
"그냥 애를 죽였는지 긁어내 어린 것은.. 이제 핏덩어리로 조그마한 것은 긁어낸다고."
평생 아이를 아쉬워하던 남편은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났고, 혼자 남은 할머니는 점점 더 가족이 그립습니다.
[장인심/소록도 주민]
"명절이면 다른 사람들은 찾아와요. 나도 아들, 딸 하나 있었으면 어떻게 생긴 사람을 낳았을까."
소록도에서 7~8KM 떨어진 오마도 간척지.
10.7 제곱킬로미터의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1962년 당시 한센병이 완치된 2천여 명의 소록도 주민들이 이 간척사업에 동원됐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장비는 전혀 없었습니다. 돌과 흙을 운반해 가지고 우리 힘으로 이 둑을 다 만들게 됐습니다."
거친 해류와 싸워가며 맨손으로 둑을 쌓다 보니 방조제 중간이 바다로 휘어져 있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인부가 동원돼 가지고 흙을 갖다 부어 놓으면 자고 나면 흙이 간 곳이 없고, 바다로 침하되가지고.."
하루 일당은 그 시절 순대국 한 그릇 값인 30원.
그렇게 2년 가까이 일했지만 마지막 6개월은 그 돈조차 받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계속했던 건 간척지에 한센인 1000세대를 정착시키겠다는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내보내지도 외출해주지도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활 속에서 소록도에서 살다가 바다를 메워가지고 우리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다니까."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오마도 원주민들의 반대가 부담스러웠던 정부는 간척지 이주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세월이 지나 억울함을 호소해보려고 했지만 당시 일을 했다는 걸 입증해줄 근로자 명단이나 봉급 명세서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최금주/소록도 주민]
"그런 문제를 법적으로 추진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참고 사셨군요) 꾹 참고, 입 다물고 지금까지 살아왔었습니다."
소록도 곳곳엔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각종 차별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소록대교 아래에 남아 있는 부서진 콘크리트 시설물.
제비 선창이라 불린 이곳은 한센인들이 육지로 가는 배를 타는 곳이었습니다.
육지와 더 가까운 소록도 선착장은 병원 직원 등 비한센인들 전용이었습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외출 허가 받으면 새벽에 나와 걸어서 여기까지 와서 가고 전송도 하고.. (그 시간대도 새벽 시간대에요? ) 새벽에 (왜요?) 녹동항 가도 남 안 볼 때 첫 차나.. 안 그러면 걸어서 가야 돼, 안 태워주니까."
차별은 환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지난 1917년 한센병 치료를 위해 소록도에 처음 세워진 자혜의원.
이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방치된 건물이 하나 나타납니다.
콘크리트 더미만 남은 이곳은 결핵 환자를 따로 수용한 결핵 병동이었습니다.
소록도 환자들 사이에서도 결핵에 걸린 사람을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차별했기 때문입니다.
[김OO/소록도 주민]
"같이 사는 동료 환자들한테 이중의 차별을 받고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막기 위해서..."
소록도 사람들은 의사들이 쉬는 공휴일에 죽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숨진 사람의 시신은 곧바로 해부 실습용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금요일 날 죽었다 그러면 식구들이 하룻밤을 같이 자줘. 그래서 해부 안 하고 장례하도록."
해부가 끝나면 곧바로 화장이 됐고, 유골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죽어서도 육지로 나갈 수 없어 납골당의 자리가 꽉 차면 오래된 순서대로 1년에 한 번씩 뒷편의 무덤에 합장을 했습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죽고 나서도 무덤 하나 못 가지고, 남녀 구분 없이 한 데 묻혔으니까 얼마나 비참해."
소록도 '사랑의 집'이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미용 봉사 때문입니다.
[송영남 지부장/고흥군 미용협회]
"잘해보려고 아주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써요. 연세가 드셔서 흰머리가 나니까 염색을, 젊어지려고 염색을 또 많이 해요."
소록도를 찾는 자원봉사자는 한해 4천 명 가량.
이들은 병동과 마을에서 소록도 주민들을 도우며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문재원/자원봉사자]
"가까이 가면 안 되고 뭔가 접촉하면 안 되고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래 갖고 괜히 사람을 피한다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한 해 발생하는 한센병 환자 수는 예닐곱 명 수준.
하지만 약만 먹으면 바로 치료되는 '정복된 병'인 만큼 사실상 환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박승규 외과과장/소록도병원]
"지금 병원 치료를 받는 내용들은 한센병의 후유증이죠. 말단의 신경을 침범해서 신경을 마비시켜버립니다. 그것 때문에 문제들이 생기는 거죠."
지금 소록도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완치된 상태.
전염 우려가 없는데도 소록도는 부분 개방만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릇된 인식과 편견을 가진 외부인들이 주민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조성래 선도반장/원생자치회]
"여기 문둥이가 어디 살아요? 그러거든. 우리한테 직접 묻는단 말이요. 그러면 우리가 뭔 대답을 하겠어요. 비일비재해요, 아직까지도."
오는 5월 소록도 병원은 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습니다.
소록도 주민들이 참여하는 100년사 편찬 작업은 질병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다시없기를 바라는 기원이기도 합니다.
[박형철 원장/소록도 병원]
"새로운 질병이 생기더라도 질병으로 인해서 상대방을 차별하거나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죠."
100주년을 기념해 새로 만든 박물관에는 역사 자료뿐 아니라 주민들이 장애가 있는 손으로 그리고 쓴 작품들도 함께 전시할 계획입니다.
1960년대부터 40년 동안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보살폈던 마리안느 수녀도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김OO/소록도 주민]
"(오시면 어떤 말씀을 전해주고 싶으세요?) 뭐 반갑다고 하는 거죠 뭐. 그리고 조금 더 농담 심하게 하면.. 어 지금까지 살아 있었네?."
이들의 작은 바람은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인 똑같은 사람으로 봐달라는 겁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다 나은 사람 보고 왜 한센인이라고 불러. 결핵 걸렸다가 나으면 그게 결핵인이야? 안 해야 돼. 일본도 무척 고민을 했더라고 그래서 회복자라 하고.."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소록도 100년의 역사.
일본은 과거의 한센병 대책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자국민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대만 등 다른 나라의 피해자에게도 1인당 1억 원 수준의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소록도 피해자들은 2011년부터 우리 정부를 상대로 강제 불임수술과 낙태수술로 침해당한 인권 피해에 대해 소송을 걸었고, 5건의 소송에서 480여 명이 하급심에서 승소했지만, 정부는 대법원의 판단까지 받아보겠다는 입장입니다.
[강선봉/소록도 주민]
"힘없는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일본에서 했으면 우리도 해줘버리면 끝나는 일을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
당시 불임, 낙태 수술은 동의하에 이뤄졌다며 강제 수술의 증거를 입증하라는 게 정부측 주장입니다.
[박영립 변호사/한센인권보호단장]
"국민 보호 의무를 다하거나 그래놓지 않고서는 이제 와서 그것을 그들에게,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그건 너무 가혹하죠. 그건 공평하지도 않죠."
소록도 주민 수는 1950년대 6천여 명에서 현재 550여 명.
평균 나이 74세로 주민수는 점차 줄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슴에 서린 한들이, 백 년 동안 소록도가 품고 있는 아픈 상처가 더 늦기 전에 씻길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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