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시사매거진2580
기자이미지 이필희 기자

나의 살던 고향은...

나의 살던 고향은...
입력 2016-05-30 10:59 | 수정 2016-05-30 14:12
재생목록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된 서울 둔촌동과 경기도 과천의 주공아파트.

    재건축이 결정돼 이미 이주를 시작했거나, 이주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민들 대부분이 새 아파트가 가져다줄 편리함과 재산가치 향상에 큰 기대를 갖고 있지만,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데 아쉬움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유소년 시절부터 삶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온 청년 세대들은 사라지는 고향에 대한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아파트 키드' 세대에게 고향의 추억이란 무엇일까요?

    -----------------------------------------

    소파, 냉장고, 책장..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이 발코니 너머 이삿짐 차량에 실립니다.

    재건축 결정으로 철거가 예정되면서 집을 비우는 겁니다.

    20년 가까이 살던 아파트.

    집안 곳곳에 세월만큼의 정이 묻어있습니다.

    [김효선]
    "어제 유리창에 뭐가 묻으니까 그걸 닦는 거예요. 오늘 이사 갈 집을..(이사 갈 집을 뭐하러 닦으세요?) 정이 들어서 이게 내 집인 거예요. 그냥 내 공간이에요."

    짐이 빠져나간 집안이 어느새 휑해졌습니다.

    오늘 떠나고 나면 곧 사라질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 하나하나 마음에 되새겨 봅니다.

    [김효선]
    "봄 되면 저 뒤에 벚꽃나무, 가을에는 단풍나무 빨갛게. 겨울 되면 눈꽃이 또 너무 예뻐요. 이게 사시사철 다 좋아요."

    안방 창문에 붙여놓았던 그림처럼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은 휴대전화로 찍어 간직합니다.

    [김효선]
    "(창문에다가 그림을 붙이신 거예요?) 네 (직접 그리셔서?) 네, 리모델링이 돈이 너무 비싸서 그냥 안에는 안 하고.."

    재건축 공사기간 동안 떨어져 지내야 할 이웃사촌, 지금 같은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과 아쉬움이 교차합니다.

    [김효선]
    "(아유 이제 3년 후에 보겠네.) 그러니까..3년 후에 비슷한 동이라야 되는데 몇 평 신청했어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할 일.

    다시 못 볼 정든 집, 그 앞에선 자신을 사진 속에 새겨넣습니다.

    [김효선]
    "(집이 만약 사람이라면 어떤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너무 고마웠다고 해야죠, 그동안. (20년 동안 고마웠다?) 네, 좋은 기억 남게 해주고 고맙고, 불편한 건 그리 생각이 안 나고 좋은 것만 생각이 날 정도니까.."

    지어진 지 30년이 넘은 아파트들이 곳곳에서 재건축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곳 과천시도 1단지를 포함해 6개 단지가 동시에 재건축을 추진 중입니다.

    부족한 주차공간이나 녹슨 배관 등 오래된 아파트의 불편함 때문에 재건축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됐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살아온 공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추억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년 퇴직 후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운 노창래 씨.

    시간이 날 때마다 아파트 단지 곳곳을 찍고 있습니다.

    [노창래]
    "여기 살던 사람들이 떠나갔다 다시 입주하게 되면 옛날 모습을, 옛날에는 어땠을까 하는 걸 회상하고 싶은 그런 욕구도 있지 않을까.."

    오늘은 아파트 출입구를 감싸며 하얗게 피어오른 장미넝쿨이 눈에 들어옵니다.

    1층에 사는 주민이 16년 동안 길러온 겁니다.

    계절마다 바뀌는 아파트의 모습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동안은 꽃이나 나무처럼 아름다운 모습 위주로 찍었지만, 재건축이 임박한 지금은 찍는 대상이 조금 변했다고 합니다.

    [노창래]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평이하게 담는 것도 필요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번 여름에는 시간을 내서 그런 쪽으로..."

    주민이 아닌데도 아파트를 기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현선씨는 지난 3월부터 이주가 시작된 1단지를 매주 한 번씩 찾고 있습니다.

    빈집 구석에 버리고 간 옷걸이.

    집주인의 손 글씨가 붙어 있는 스위치.

    살던 사람의 흔적이 남겨진 물건 여기저기에 묻어있습니다.

    [현선/사진 전공 대학생]
    '내가 여기 있었다', 이 공간이 그런 걸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저는 받았어요. 여기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이걸 만졌다.."

    처음에는 수업 과제 때문에 과천을 찾았지만 사라질 아파트를 사진에 담으면서 차츰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현 선/대학생 사진 전공]
    "'그때 내가 살았던 그 풍경 그런 것들을 기록으로 내가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했을 때 제가 '여기 있어요' 이렇게 보여드리고 싶은.."

    이곳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어느덧 성인이 된 20-30대 청년들.

    이른바 '아파트 키드'들은 누구보다 재건축이 아쉽습니다.

    오래된 약수터에서 물을 마셔보기도 하고 공중전화 박스에도 들어가 봅니다.

    [김태준]
    "지금은 눈에 보이지만 여기가 다른 건물이 올라와서 내가 알지 못한 것들로 채워질 때 여기가 뭐였더라.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게 아쉬워요."

    친구들과 뛰어놀던 단지 안의 공터.

    놀이터 곳곳.

    이들에게는 여기가 고향입니다.

    [이한진]
    "세 달 뒤면 이 모습 못 봐. 이 나무 못 봐, 이 나무 사라져. 그런 거 얘기하면 아 나도 좀 찍어놔야겠다. 이렇게 하거든요."

    어린 시절 앙상했던 나무들은 어느새 5층 아파트보다 훌쩍 커버렸고, 친구들과 달리기 놀이를 하던 단지 내 도로가 지금은 인도까지 주차장이 돼 버렸습니다.

    [이한진]
    "전시공간이라도 놔뒀으면 좋겠다. 저게 훗날 '옛날에 여기 이런 건물이 있었다'라고 하는..문화재라는 게 사실 그런 거잖아요. 옛날에 주거 형태가 이랬다. 그 당시에는 주공 아파트라는 게 있었단다 얘들아.."

    1970년대 계획도시로 지어진 과천시의 아파트는 단지 구조에서도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똑같은 남향 아파트가 줄줄이 늘어서 있지만,

    출입구는 건물과 건물이 마주 보도록 설계됐습니다.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두 동이 출입구를 마주 보고 있다 보니까 그다음 동들 사이에서 아주 넓은 녹지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두 가지 장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지 중앙은 차량이 관통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보행자들이 안심하고 걸어다닐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자연스레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많다 보니 주민들은 쉽게 친해지고 자주 교류했다고 기억합니다.

    [이한진]
    "사람들이랑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한 시간 정도 서서 얘기하고 그러거든요. 1단지에서 읍내 나가는데 십 분밖에 안 걸리는데, 전 한두 시간 걸린 적도 있어요."

    공동 주택이라는 새로운 주거 양식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봤던 설계 당시의 고민이 단지 구조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겁니다.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획일적인 아파트 문화, 주거 형식, 이런 것들이 공동주택 단지의, 아파트의 약점이잖아요. 그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과거의 주변 이웃처럼, 형식은 다르지만 그런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지어진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서울 강동구의 둔촌주공아파트도 재건축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내년 초쯤 5,900여 세대의 이주가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 이 아파트에서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아파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외경뿐 아니라 주민들이 살아가는 집 안의 공간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는 겁니다.

    단지 남쪽의 산자락에 인접한 김기수 씨의 집.

    2층 거실에서 바라보는 바깥 모습은 울창한 숲 그 자체입니다.

    건물에 붙어서 자란 산수유나무는 가지가 집 안으로 들어올 정돕니다.

    [김기수]
    "나무와 꽃이 이 정도로 이렇게 우거지고 울창한 아파트를 찾아보기 힘들었거든요. 저도 이제 친구집도 가보고 친척집도 가보고 하는 데이게 너무 아까워요."

    사진으로 남겨도 되지만 굳이 동영상으로 찍는 건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 들을 함께 담기 위해서입니다.

    [라야/영상작가]
    "몇 시에는 학교 종소리가 들렸지 약간 이런 것들. 거기에서 느껴지는 추억, 기억 그런 게 많이 남잖아요. 그런 걸 함께 남기고 싶어서 꼭 이 집에서 들리는 소리로.."

    아침이면 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

    근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등.

    사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의 특징이 눈과 귀로 전해집니다.

    늦은 오후 현관문을 열면 햇빛이 거실 깊숙이 들어오는 정현지씨의 집.

    해질녘 석양빛이 붉게 물들면 어머니와 함께 복도로 나와 저무는 해를 바라봅니다.

    [정현지]
    "컴퓨터를 하고 있다가 딱 창문을 바라보면 그 빛이 너무 아름다운거에요. 그러면 바로 복도로 나가죠."

    집 안의 촬영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집 안의 물건과 그 공간만으로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생활해왔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라야/영상작가]
    "그 집을 한 번 영상으로 훑으면 '아, 어떤 걸 좋아하는 사람이겠구나!'라든가 아니면 이 사람의 취미나 습관이나 그런 게 보이니까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을 둔촌아파트에서 보낸 한기린씨.

    지금은 인근의 재건축 아파트에 살지만 할머니가 이곳으로 이사 오시면서 옛날 기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나 확인하는 화장실 문의 작은 유리창이나, 나무 창문을 손으로 돌려 잠그는 장치 등은 언제 봐도 정겹습니다.

    [한기린]
    "아예 태어날 때부터, 제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이 공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공간이 되게 소중하게 느껴지고 여기 안에 있었던 일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 이렇게 보면 하나하나씩 기억에 남고.."

    이렇게 집안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곳은 총 12가구.

    이 작업은 재건축을 앞두고 아파트의 추억을 담은 책을 낸 이인규 씨와 집 안의 모습을 촬영해주는 활동을 하던 작가 라야 씨가 뜻을 모으면서 시작됐습니다.

    [이인규]
    "완전히 새것을 우리가 얻게 되겠지만 또 그만큼 잃게 되는 것들도 있다라는 생각을 잘 못하는 것 같아서 그런 이야기들도 좀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추억을 담은 책자를 세 권이나 내왔던 데다 주민들의 꾸준한 호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4년 안전문제로 철거된 기린 놀이터.

    당시 SNS로 작별 불꽃놀이 행사가 논의되자 주민 100여 명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둔촌아파트에서 자라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한 최현주 씨도 철거 전 두 살배기 아들과 함께 기린놀이터를 찾았습니다.

    [최현주]
    "엄마, 아빠가 다 여기 살았었으니까 그리고 맨날 놀았었으니까 그리고 아이가 그때 두 돌이 안 됐었는데 그때 미끄럼을 태워주고 싶었어요."

    30년 넘게 추억이 쌓인 미끄럼틀은 불과 하루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인규]
    "그걸 못 보겠더라고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아서 기린 미끄럼틀 하나 없어지는 것도 너무 슬퍼서 집들 부수는 건 아마 못 볼 것 같아요."

    196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대단지 아파트는 어느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거 문화가 됐습니다.

    흔히 성냥갑이라는 말로 비하되기도 하고 세월의 흐름 속에 철거와 재건축의 운명을 맞고 있지만, 아파트는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 개인의 역사이자 이 시대 대한민국의 생활상이기도 합니다.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 살면서도 부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아직 문화유산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주민들이 떠나간 자리.

    낡고 금 간 아파트도 곧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수십 년을 버텨온 아파트에 담긴 가치, 그 속에서 울며 웃었던 소중한 삶의 기억들은 높고 번듯한 새 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쉽게 버릴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