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매거진2580
송양환 기자
송양환 기자
아빠의 전쟁
아빠의 전쟁
입력
2016-06-13 10:58
|
수정 2016-06-13 14:15
재생목록
경기도에 사는 정 모 씨는 재혼 가정의 가장입니다.
정씨가 키우던 자녀 2명과 아내가 키우던 자녀 2명이 한가족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는 몇 달 전 뜻하지 않은 일을 겪었습니다.
다둥이 가족 전기요금 감면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것입니다.
주민등록등본 상 아내의 자녀들이 자식이 아닌 ‘동거인 ’을로 표기돼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정 씨는 행정자치부에도 문의했지만 자식으로 인정받으려면 차라리 입양을 하라는 답만 들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재혼 가정의 가장은 역시 배우자의 자녀가 동거인으로 표시돼 있어 자녀의 학교로부터 ’위장전입자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하는데요.
내 가족인데 남들은 가족이 아니라고 하는 재혼 가정.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세상의 벽, 그로 인한 상처를 들여다봅니다.
------------------------------------------------
정봉용 씨와 좌혜경 씨는 2011년에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버지가 키우던 아들 둘, 어머니가 키우던 남매가 함께 살게 됐고, 서먹함도 잠시, 이제는 서로 없이는 못 사는 가족이 됐습니다.
[정도영/넷째 아들]
"운동을 같이할 수 있고 또 제가 슛을 차면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같이 축구를 할 사람이 있고 그런 게 좋아요."
듬직한 아들 셋에 독일로 유학 간 딸까지 자녀가 4명인 행복한 다둥이 가족이지만 부모에게는 남모를 속앓이가 있습니다.
네 아이 중 두 명은 주민등록표상 부부의 자녀이지만, 다른 두 명은 자녀가 아닌 동거인이기 때문입니다.
[좌혜경]
"진짜 나라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표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제 자식을 동거인으로 남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저도 남편이랑 마찬가지로 이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요."
한집에서 부대끼며 함께 살고, 부부는 혼인신고도 돼 있는 법적으로도 분명한 한가족입니다.
그런데 주민등록표에는 두 아이가 '동거인'으로 나오고, 이 세 글자 때문에 여섯 식구는 사회 곳곳에서 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씨 부부는, 재혼 뒤 초등학생이던 큰아들의 전학을 위해 발급받은 주민등록등본에서 '동거인'이라는 표기를 처음 봤습니다.
[정봉용]
"그때는 제가 세대주로 되어 있었거든요? 제 아들놈 두 놈은 저희들 '자'로 되어 있는데, 딸하고 막내 아이는 '동거인'으로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깜짝 놀랐죠."
아이가 모르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학교에 제출했지만, 선생님은 등본이 이상하다며 아이를 불러 동거인들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정구윤/첫째 아들]
"'동거인'이라는 단어를 그때는 몰랐고 가족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어요. 재혼을 했는데 이미. 결혼인데, 합쳐진 건데, 근데 그걸 보고 가족이 아니라고 하면 그걸 뭐.."
이후에도 등본에 적힌 동거인이라는 세 글자는 아이들의 마음을 후벼 팠습니다.
[정봉용]
"'아빠 왜 저는 아빠의 딸로 안 돼 있고 동거인으로 돼 있는 거죠?' 그러면서 울먹울먹 했던 기억이 있죠.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떻게든 그 말을 없애고 싶어, 부부는 남편과 부인이 각각 세대주가 되도록 다시 전입신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을 세대주로 한 등본에는 아들 두 명이 '자'로 나왔고 부인을 세대주로 한 등본에는 딸과 막내아들이 '자'로 나왔습니다.
동거인은 없앴지만, 재혼하기 전처럼 부부가 함께 나오지 않고 자녀도 둘씩 따로 나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머니를 세대주로 하고 등본엔 둘째 딸과 막내아들이 '자'로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동거인'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첫째와 셋째가 다른 형제들을 위해 자신들이 동거인이 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정다운/셋째 아들]
"차라리 제가, 저는 감당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얘(동생)는 어리니까 그런 것을 잘 몰라도 어쩔 땐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상처를 준 건 남들의 시선뿐이 아니었습니다.
경기도에서 발행하는 아이 플러스 카드.
두 자녀 이상 가구가 발급 대상이고 세 자녀 이상이면 추가혜택이 주어집니다.
정씨는 이 카드를 발급받으러 은행을 찾았지만 3자녀 이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A 은행 직원]
"가족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것(등본)만 보시면 동거인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게 '자'로 돼서 딱 나왔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한 장으로 끝나는 건데 이게 복잡한 경우여서."
또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
[B 은행 직원]
"근데 저기 아직 합가가 안 되신 건가요? (합가 됐죠)"이런 경우에는 법원에다가 바꿔 달라고 말씀하시거나, 저희는 일단 은행에서는 서류상으로만 업무 처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방법이 없어요."
지난 2월엔 자녀가 셋 이상이면 전기요금을 할인해주는 제도가 있어 한전에 신청했지만 역시 거부당했습니다.
등본에 자녀가 둘 뿐이라 자격이 안 된다고 한 겁니다.
[공진식 차장/한국전력 고양지사]
"저희는 주민등록표상에 나와 있는 '자' 또는 '손'이 3인 이상일 경우에 저희가 세 자녀 이상 할인을 해 주고 있습니다."
재혼 가정임을 설명하고 가족관계증명서 등 다른 서류도 제출하겠다고 했지만 등본상 자녀가 아니니 안 된다는 말 뿐.
정씨는 국민 신문고에 재혼 가정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라며 민원을 올렸고, 한전은 뒤늦게 요금을 할인해주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정봉용]
"단돈 1만 원, 2만 원 할인받으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기존의 가정과 재혼 가정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이런 주홍글씨, 낙인이 찍혀 있는데 이걸 정부에서 알고 계시는가, 저는 그걸 여쭤보려는 거고, 그걸 개선시켜 달라고 신문고에 올린 겁니다."
엄연히 한가족인데 재혼 가정이라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동거인이란 꼬리표가 붙고 가족이 맞냐고 의심받는 상황.
정부는 왜 제도를 이렇게 운영하고 있는 걸까요.
2008년, 호주제를 폐지하는 민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가족의 규정도 바뀌었습니다.
법률상 가족이 아니었던 배우자의 직계혈족이 가족에 포함되었고 이에 따라 재혼한 배우자의 자녀도 법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된 겁니다.
그런데 주민등록등본에 나오는 '동거인'은 재혼 자녀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에 쓰였던 용어가 현재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겁니다.
동거인은 사전적으로 '가족이 아니면서 어떤 가족과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
많은 재혼 가정들은 자녀들이 이 표기 때문에 낙인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며 용어를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병철 대표/차별 없는 가정을 위한 시민연합]
"일단 (민법에) 가족이라고 지칭했으면 표시도 가족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자녀'라는 단어가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재혼 자녀'라든지 '처의 자'라든지 '부의 자'라든지 그럼 가족이라는 게 인정이 되잖아요."
그러나 행정자치부는 재혼 자녀가 혈연을 통한 친자녀는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구분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오히려 동거인이라는 용어가 재혼 가정을 배려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행정자치부 관계자]
"'모의자'라든지 '부의 자'라든지 이게 원칙적으로는 맞는 표현이잖아요.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재혼 가정임이 드러난다는 문제가 있어서 예전에 '동거인'이라는 표기를 한 거거든요."
하지만, 같은 정부 기관들도 차 '동거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2년 재혼한 이 모 씨.
아내의 아들을 한 가족으로 키워왔는데 3년 전 아이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교육청으로부터 황당한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 OO]
"'얘가 왜 동거인으로 돼 있습니까? 이거 위장전입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는 거죠. 뭐라고 얘기를 하나면요. '가족으로 등재돼 있는 등본을 가지고 오세요.' 현행 방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가져오라는 거예요."
법무법인 사무장인 이씨는 법률 지식을 동원해 행정자치부의 동거인 표기가 부당하다고 곳곳에 민원을 넣었고 소송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동거인 표기는 법이 아니고 행자부의 내부 지침일 뿐이라 어찌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이 OO]
"벽에 부딪힌 느낌이에요. (재혼 자녀) 그걸 왜 구분할 필요성이 있는데요? 이건 아이들을 차별해야 되겠다는 의지로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거거든요."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표에서 동거인을 없애고 싶으면 차라리 친양자로 입양하라고 안내합니다.
[행정자치부 콜센터]
"자녀는 자녀인데 혈연이 아니다 보니 '동거인'으로 표시가 되는 거거든요. 만약에 그런 게 싫고 선생님의 자녀로 표시를 원한다면 친양자 입양을 했을 경우에는 자녀로 표시가 됩니다."
이씨도 아이가 계속 차별받게 될 것이 두려워 결국 올해 아이를 친양자로 입양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좋은 해결책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OO]
"친 입양을 하게 되면요. 아이들이 친생부모와의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반드시 친생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친생부모와 연락이 되지 않고 동의를 받지 못하는 그런 많은 가정들은 뭐 어떡하라고요."
주민등록표의 기능은 한 주소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목적이고, 가족관계는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서류 한 장으로 한 국민의 모든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행정편의적 발상 때문에 주민등록표에 불필요한 가족관계까지 표시하면서 '동거인' 같은 문제가 생겼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설현천 변호사]
"가족관계 정보는 이것도 개인정보라 할 것인데 그것을 불필요하게 주민등록부가 반영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국가가 가족관계 등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로 활용한다는 것은 법 위반의 문제도 생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때문에 재혼 가정 자녀들의 기본권까지 침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설현천 변호사]
"'동거인'으로 표시가 돼서 학교에서 혹은 다른 친구들에게 놀림이 되거나 차별을 받는 경우 이것은 행복추구권의 침해가 될 수도 있고, 주민등록법이 그런 것을 강제하고, 그런 것을 표시해서 아이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는 평등권 침해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거든요."
지난해 재혼 비율은 약 22%.
이혼이나 재혼은 더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고 이에 따라 한 부모 가정과 재혼 가정이 증가하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등 가족의 형태는 빠르게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과 행정은 이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인천에서 서울 노원구로 왕복 하루 5시간을 통학하는 대학생 김 모 씨.
학교가 있는 노원구에 대학생을 위한 행복주택이 생긴다고 해 신청했다가 마음만 다쳤습니다.
10여 년 전 아버지와 이혼한 뒤 연락조차 닿지 않는 어머니의 서류가 없다며 거절당한 겁니다.
[김 OO/대학생]
"제3자 정보동의서에 어머니 서명이 없다. 그래서 서류를 처리해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엄마랑 아빠가 이혼했고 10년 넘게 연락이 안 된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지금 제 가족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이렇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행복주택 담당자는 무조건 어머니 사인을 받아오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SH공사 직원]
"아버님과 어머님이 이혼하신 거지 자녀분 하고까지 관계가 단절된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혼을 하셨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김씨는 깊은 고민이 없는 정책에 상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김 OO/대학생]
"내가 잘못했나? 이런 생각까지 들기도 하더라고요. 제가 잘못한 건 전혀 없는데. 한 부모가정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가정이 존재하잖아요. 좀 여러 방면에서 생각을 해보고 정책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가족은 사람 수나 행정 서류의 표기만으로 구분하고, 판단할 수 없는 한 사람의 가장 소중한 울타리입니다.
[정원오 교수/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제는 안 맞는 거죠. 한 부모 가정은 비정상이고 양부모 가정이 정상이고, 또 4인 가구가 정상, 이런 개념이 거의 없어지는 시대가 도래한 거죠."
기존의 제도와 관행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있고 나아가 사회적 차별을 만들고 있다면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개선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정씨가 키우던 자녀 2명과 아내가 키우던 자녀 2명이 한가족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꾸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는 몇 달 전 뜻하지 않은 일을 겪었습니다.
다둥이 가족 전기요금 감면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것입니다.
주민등록등본 상 아내의 자녀들이 자식이 아닌 ‘동거인 ’을로 표기돼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정 씨는 행정자치부에도 문의했지만 자식으로 인정받으려면 차라리 입양을 하라는 답만 들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재혼 가정의 가장은 역시 배우자의 자녀가 동거인으로 표시돼 있어 자녀의 학교로부터 ’위장전입자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하는데요.
내 가족인데 남들은 가족이 아니라고 하는 재혼 가정.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세상의 벽, 그로 인한 상처를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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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용 씨와 좌혜경 씨는 2011년에 재혼해 새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버지가 키우던 아들 둘, 어머니가 키우던 남매가 함께 살게 됐고, 서먹함도 잠시, 이제는 서로 없이는 못 사는 가족이 됐습니다.
[정도영/넷째 아들]
"운동을 같이할 수 있고 또 제가 슛을 차면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같이 축구를 할 사람이 있고 그런 게 좋아요."
듬직한 아들 셋에 독일로 유학 간 딸까지 자녀가 4명인 행복한 다둥이 가족이지만 부모에게는 남모를 속앓이가 있습니다.
네 아이 중 두 명은 주민등록표상 부부의 자녀이지만, 다른 두 명은 자녀가 아닌 동거인이기 때문입니다.
[좌혜경]
"진짜 나라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표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제 자식을 동거인으로 남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저도 남편이랑 마찬가지로 이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요."
한집에서 부대끼며 함께 살고, 부부는 혼인신고도 돼 있는 법적으로도 분명한 한가족입니다.
그런데 주민등록표에는 두 아이가 '동거인'으로 나오고, 이 세 글자 때문에 여섯 식구는 사회 곳곳에서 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씨 부부는, 재혼 뒤 초등학생이던 큰아들의 전학을 위해 발급받은 주민등록등본에서 '동거인'이라는 표기를 처음 봤습니다.
[정봉용]
"그때는 제가 세대주로 되어 있었거든요? 제 아들놈 두 놈은 저희들 '자'로 되어 있는데, 딸하고 막내 아이는 '동거인'으로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깜짝 놀랐죠."
아이가 모르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학교에 제출했지만, 선생님은 등본이 이상하다며 아이를 불러 동거인들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정구윤/첫째 아들]
"'동거인'이라는 단어를 그때는 몰랐고 가족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어요. 재혼을 했는데 이미. 결혼인데, 합쳐진 건데, 근데 그걸 보고 가족이 아니라고 하면 그걸 뭐.."
이후에도 등본에 적힌 동거인이라는 세 글자는 아이들의 마음을 후벼 팠습니다.
[정봉용]
"'아빠 왜 저는 아빠의 딸로 안 돼 있고 동거인으로 돼 있는 거죠?' 그러면서 울먹울먹 했던 기억이 있죠.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떻게든 그 말을 없애고 싶어, 부부는 남편과 부인이 각각 세대주가 되도록 다시 전입신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을 세대주로 한 등본에는 아들 두 명이 '자'로 나왔고 부인을 세대주로 한 등본에는 딸과 막내아들이 '자'로 나왔습니다.
동거인은 없앴지만, 재혼하기 전처럼 부부가 함께 나오지 않고 자녀도 둘씩 따로 나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머니를 세대주로 하고 등본엔 둘째 딸과 막내아들이 '자'로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동거인'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첫째와 셋째가 다른 형제들을 위해 자신들이 동거인이 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정다운/셋째 아들]
"차라리 제가, 저는 감당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얘(동생)는 어리니까 그런 것을 잘 몰라도 어쩔 땐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
상처를 준 건 남들의 시선뿐이 아니었습니다.
경기도에서 발행하는 아이 플러스 카드.
두 자녀 이상 가구가 발급 대상이고 세 자녀 이상이면 추가혜택이 주어집니다.
정씨는 이 카드를 발급받으러 은행을 찾았지만 3자녀 이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A 은행 직원]
"가족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것(등본)만 보시면 동거인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게 '자'로 돼서 딱 나왔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한 장으로 끝나는 건데 이게 복잡한 경우여서."
또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
[B 은행 직원]
"근데 저기 아직 합가가 안 되신 건가요? (합가 됐죠)"이런 경우에는 법원에다가 바꿔 달라고 말씀하시거나, 저희는 일단 은행에서는 서류상으로만 업무 처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방법이 없어요."
지난 2월엔 자녀가 셋 이상이면 전기요금을 할인해주는 제도가 있어 한전에 신청했지만 역시 거부당했습니다.
등본에 자녀가 둘 뿐이라 자격이 안 된다고 한 겁니다.
[공진식 차장/한국전력 고양지사]
"저희는 주민등록표상에 나와 있는 '자' 또는 '손'이 3인 이상일 경우에 저희가 세 자녀 이상 할인을 해 주고 있습니다."
재혼 가정임을 설명하고 가족관계증명서 등 다른 서류도 제출하겠다고 했지만 등본상 자녀가 아니니 안 된다는 말 뿐.
정씨는 국민 신문고에 재혼 가정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라며 민원을 올렸고, 한전은 뒤늦게 요금을 할인해주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정봉용]
"단돈 1만 원, 2만 원 할인받으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기존의 가정과 재혼 가정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이런 주홍글씨, 낙인이 찍혀 있는데 이걸 정부에서 알고 계시는가, 저는 그걸 여쭤보려는 거고, 그걸 개선시켜 달라고 신문고에 올린 겁니다."
엄연히 한가족인데 재혼 가정이라는 이유로 자녀들에게 동거인이란 꼬리표가 붙고 가족이 맞냐고 의심받는 상황.
정부는 왜 제도를 이렇게 운영하고 있는 걸까요.
2008년, 호주제를 폐지하는 민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가족의 규정도 바뀌었습니다.
법률상 가족이 아니었던 배우자의 직계혈족이 가족에 포함되었고 이에 따라 재혼한 배우자의 자녀도 법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된 겁니다.
그런데 주민등록등본에 나오는 '동거인'은 재혼 자녀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에 쓰였던 용어가 현재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겁니다.
동거인은 사전적으로 '가족이 아니면서 어떤 가족과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
많은 재혼 가정들은 자녀들이 이 표기 때문에 낙인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며 용어를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병철 대표/차별 없는 가정을 위한 시민연합]
"일단 (민법에) 가족이라고 지칭했으면 표시도 가족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자녀'라는 단어가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재혼 자녀'라든지 '처의 자'라든지 '부의 자'라든지 그럼 가족이라는 게 인정이 되잖아요."
그러나 행정자치부는 재혼 자녀가 혈연을 통한 친자녀는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구분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오히려 동거인이라는 용어가 재혼 가정을 배려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행정자치부 관계자]
"'모의자'라든지 '부의 자'라든지 이게 원칙적으로는 맞는 표현이잖아요.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재혼 가정임이 드러난다는 문제가 있어서 예전에 '동거인'이라는 표기를 한 거거든요."
하지만, 같은 정부 기관들도 차 '동거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2년 재혼한 이 모 씨.
아내의 아들을 한 가족으로 키워왔는데 3년 전 아이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교육청으로부터 황당한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 OO]
"'얘가 왜 동거인으로 돼 있습니까? 이거 위장전입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는 거죠. 뭐라고 얘기를 하나면요. '가족으로 등재돼 있는 등본을 가지고 오세요.' 현행 방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가져오라는 거예요."
법무법인 사무장인 이씨는 법률 지식을 동원해 행정자치부의 동거인 표기가 부당하다고 곳곳에 민원을 넣었고 소송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동거인 표기는 법이 아니고 행자부의 내부 지침일 뿐이라 어찌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이 OO]
"벽에 부딪힌 느낌이에요. (재혼 자녀) 그걸 왜 구분할 필요성이 있는데요? 이건 아이들을 차별해야 되겠다는 의지로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거거든요."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표에서 동거인을 없애고 싶으면 차라리 친양자로 입양하라고 안내합니다.
[행정자치부 콜센터]
"자녀는 자녀인데 혈연이 아니다 보니 '동거인'으로 표시가 되는 거거든요. 만약에 그런 게 싫고 선생님의 자녀로 표시를 원한다면 친양자 입양을 했을 경우에는 자녀로 표시가 됩니다."
이씨도 아이가 계속 차별받게 될 것이 두려워 결국 올해 아이를 친양자로 입양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좋은 해결책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OO]
"친 입양을 하게 되면요. 아이들이 친생부모와의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반드시 친생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친생부모와 연락이 되지 않고 동의를 받지 못하는 그런 많은 가정들은 뭐 어떡하라고요."
주민등록표의 기능은 한 주소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목적이고, 가족관계는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서류 한 장으로 한 국민의 모든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행정편의적 발상 때문에 주민등록표에 불필요한 가족관계까지 표시하면서 '동거인' 같은 문제가 생겼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설현천 변호사]
"가족관계 정보는 이것도 개인정보라 할 것인데 그것을 불필요하게 주민등록부가 반영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국가가 가족관계 등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로 활용한다는 것은 법 위반의 문제도 생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때문에 재혼 가정 자녀들의 기본권까지 침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설현천 변호사]
"'동거인'으로 표시가 돼서 학교에서 혹은 다른 친구들에게 놀림이 되거나 차별을 받는 경우 이것은 행복추구권의 침해가 될 수도 있고, 주민등록법이 그런 것을 강제하고, 그런 것을 표시해서 아이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는 평등권 침해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거든요."
지난해 재혼 비율은 약 22%.
이혼이나 재혼은 더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고 이에 따라 한 부모 가정과 재혼 가정이 증가하고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등 가족의 형태는 빠르게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과 행정은 이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인천에서 서울 노원구로 왕복 하루 5시간을 통학하는 대학생 김 모 씨.
학교가 있는 노원구에 대학생을 위한 행복주택이 생긴다고 해 신청했다가 마음만 다쳤습니다.
10여 년 전 아버지와 이혼한 뒤 연락조차 닿지 않는 어머니의 서류가 없다며 거절당한 겁니다.
[김 OO/대학생]
"제3자 정보동의서에 어머니 서명이 없다. 그래서 서류를 처리해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엄마랑 아빠가 이혼했고 10년 넘게 연락이 안 된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지금 제 가족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이렇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행복주택 담당자는 무조건 어머니 사인을 받아오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SH공사 직원]
"아버님과 어머님이 이혼하신 거지 자녀분 하고까지 관계가 단절된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혼을 하셨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김씨는 깊은 고민이 없는 정책에 상처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김 OO/대학생]
"내가 잘못했나? 이런 생각까지 들기도 하더라고요. 제가 잘못한 건 전혀 없는데. 한 부모가정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가정이 존재하잖아요. 좀 여러 방면에서 생각을 해보고 정책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가족은 사람 수나 행정 서류의 표기만으로 구분하고, 판단할 수 없는 한 사람의 가장 소중한 울타리입니다.
[정원오 교수/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제는 안 맞는 거죠. 한 부모 가정은 비정상이고 양부모 가정이 정상이고, 또 4인 가구가 정상, 이런 개념이 거의 없어지는 시대가 도래한 거죠."
기존의 제도와 관행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있고 나아가 사회적 차별을 만들고 있다면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개선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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