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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12회 Full] <단독> 1985, 구조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은폐된 죽음.

[스트레이트 12회 Full] <단독> 1985, 구조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은폐된 죽음.
입력 2018-05-28 07:52 | 수정 2018-05-28 09:53
스트레이트 12회 Full 단독 1985 구조하지 않았다 전두환과 은폐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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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기자]
    양윤경 imagine0402@gmail.com
    이정신 geist1@imbc.com




    ◀김의성▶
    안녕하십니까. 스트레이트 김의성입니다.

    ◀주진우▶
    안녕하세요. 주진우입니다.

    ◀김의성▶
    내일 5월28일은 전두환 씨의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80년 광주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증언했던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자신의 회고록에서 비방한 혐의로 기소가 됐는데요. 그런데 전두환 씨의 연기 요청으로 재판은 7월16일에 열리게 됐습니다.

    ◀주진우▶
    전두환 씨는 21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97년 4월 반란 수괴, 내란 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는데요. 다시 판결을 받게 됐습니다. 역사의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의성▶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신군부에 맞서 싸우다 죽어간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고 왜곡, 조작했던 전두환 씨. 그런데 은폐, 조작된 죽음은 이것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정신, 양윤경 기자 나와있습니다.

    ◀양윤경▶
    네, 말씀하신 것처럼 군사정권 당시는 은폐와 조작의 시대였습니다. 밭을 갈던 농부가 간첩으로 조작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도 그 당시였습니다.

    ◀김의성▶
    네, 참으로 엄혹한 시절이었죠.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다치고 죽었던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주진우▶
    전두환 씨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반란군 수괴였습니다. 정당성이 아예 없지요. 그래서 그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서 총과 칼을 휘둘렀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면서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정신▶
    그렇습니다. 전두환 씨는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정권 내내 무력을 이용해서 시민들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수 있는 사건은 죽음조차 가차 없이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했습니다. 스트레이트는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충격적인 제보를 입수했습니다.





    [VCR 1]

    호젓하고 고즈넉한 팔당호 호반 한 쪽은 생태습지와 공원이 조성돼 있고, 45번 국도가 들어선 건너편엔 아무일 없다는듯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평온하기만한 팔당호지만, 30여 년 전 이곳에서 포성과 굉음 속에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믿기 힘든 제보가 스트레이트에 들어왔습니다.

    대한뉴스 (1985년 9월)
    "건군 제37주년을 맞아 중서부전선에서 펼쳐진 85 필승특전훈련"

    1985년 9월 27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물론 전현직 장차관, 국회의원, 주한외교사절, 정재계 학계 언론계 인사 등 4500여명이 참관한 가운데 국군의 날을 앞두고 대규모 시범훈련이 펼쳐졌습니다. 특전사 2300명을 비롯해 육해공군 주한미군까지 모두 3500명의 병력이 참여한 건군 이래 최대 규모 시범훈련. 전투기, 공격헬기, 수송기, 수륙양용전차 등 당시 최신 병기들도 총동원됐습니다.

    하지만 전투력 증강을 위한 실제 군사훈련이라기보다는 국군의 날 행사처럼 각본을 짜서 연습을 한 달 넘게 하는 보여주기 식 시범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30여년 전 이 시범훈련 도중 탱크 한 대가 팔당호에 빠졌다는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장원규 (당시 시범훈련 참관 특전사 소위)▶
    “전차 11대로 알고 있어요. 11대가 기동훈련을 하는 거예요. 그 중 3~4대에서 연막탄이 막 나오는 거예요. 달려가다가 그걸 보고 있었는데 깡하고 쇠가 쇠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추돌이 된 거죠. 추돌되면서 한 대가 팔당 호수로 빠진 거예요. 그래서 그게 빠져 가지고 떨어지면서 굴러 내린 거예요.

    더 놀라운 건 이런 위급하고 중대한 사고가 났는데도 시범 훈련 행사가 다 끝날 때까지 아무런 구호 조치가 없었다는 겁니다.

    ◀장원규 (당시 시범훈련 참관 특전사 소위)▶
    "세월호 그런 거 있을 때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저기 그 때 공기가 있었던 그 탱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좀 구해야 되는데 ‘그 사람들이 죽겠구나‘ 그런 생각 했거든요. 마음이 답답하고 그랬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앉아있고?) 그렇죠. (훈련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랬던 건가요? 그 상태로 있었던 건가요?) 그렇죠. 훈련 끝나고 나서야 그때서야 움직였죠.“

    제보자는 당시 막 임관해 훈련엔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지원 병력으로 현장을 참관했다는 전직 특전사 장교였습니다.

    ◀장원규 (당시 시범훈련 참관 특전사 소위)▶
    (특별히 기억을 잘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그거 충격적인 사건이죠. 탱크가 물에 들어가서 뒤집혀 있는 장면을 본 게 충격적인 거죠. 이게 밝혀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제가 오랫동안 했었고요. 어쨌든 (구조) 노력은 안했으니까 바로. 그게 저는 그때 젊은 나이, 혈기가 있는 상황에서 그걸 보고 분통이 터지잖아요."

    먼저 당시 훈련 장면을 담은 정부 영상기록물을 살펴봤습니다. 10여분 분량 정부 영상기록물엔, 탱크 기동 장면이 7초 정도 짧게 삽입돼 있을 뿐 사고 장면은 없었습니다. 더 짧게 편집된 대한뉴스나 국방뉴스엔 아예 탱크 기동 장면은 편집돼 있었습니다. 사고 관련 언급도 전무했습니다.

    <당시 국방뉴스>
    "(전두환은) 유사시 오늘의 시범 훈련처럼 하면 아군의 별다른 피해 없이 임무를 훌륭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당시 신문들도 검색해봤습니다. 대대적인 훈련 홍보 기사들만 실렸을 뿐, 사고 소식은 한 줄 없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이 보관중인 85필승특전훈련 관련 기록물 전체를 청구해 받아봤습니다. 7백 페이지가 넘는 자료엔 안기부를 비롯한 각 부처의 참관인 동원이나 주차 안내 계획까지 세세히 나와 있었지만, 역시 탱크 사고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사실 확인이 어려운 막연한 순간, 마지막으로 MBC 지하영상자료실을 찾았습니다. 지금까지 보관된 당시 촬영 테이프는 단 한 개. 단서가 있을까. 촬영 테이프엔 당시 전두환 대통령 등이 앉아있던 이른바 VIP 참관석에서 시범행사를 찍은 18분 분량 영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건너편 호반에서 이뤄진 문제의 탱크 기동 장면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엔 별 일 없어보였습니다.

    그런데...

    탱크들이 달리는 호반 언덕 바로 아래 수면 한 켠에서 특이한 현상이 포착됐습니다. 하얀 기포로 보이는 물기둥 여러 개가 지속적으로 솟구치는 듯한 모습. 잔잔한 다른 수면과 달리 유독 이 수면에서만 발생하고, 기포 기둥 주변 물결의 크기도 예사롭지 않게 컸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이한 현상에도 시범 행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됐고,

    <시범행사 안내방송>
    "우렁찬 굉음과 함께 적진을 누비는 지상의 왕자.."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의 박수갈채와 함께 시범행사 영상은 끝났습니다.




    [Studio]

    ◀김의성▶
    그런데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고 관련된 국가 기록물 문서나 영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서요. 보도 지침까지 만들어서 언론을 통제하던 시절이니까 기사화 되지 않은 건 이해를 합니다. 근데 만약 그렇다면 이 사고가 진짜 있었던 사고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죠?

    ◀양윤경▶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사고가 있은 지 33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목격자들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증거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정신▶
    그런데 사고의 흔적, 단서가 MBC 지하 자료실에서 찾은 18분짜리 영상에 있었습니다. 앞서 보신 영상에서 기포들이 솟구치는 장면, 보셨을 겁니다. 놀랍게도 이 짧은 영상 속에 33년 전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VCR 2]

    MBC 영상자료에 담긴 문제의 기포 현상에 대해 영상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화질을 높이고 흔들림을 보정해서 프레임 단위로 영상을 쪼개서 본 결과. 외부에서 돌덩이 같은 물체가 계속 떨어지면서 생긴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황민구 소장 (법영상분석연구소)▶
    "이 정도 부피 크기를 가진 피사체면 굉장히 큰 돌이나 이런 거여야 하는데 이게 돌, 작은 돌 몇 개가 떨어져서 이런 파향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고요. 뭔가 이렇게 돌이 하나 튀어서 생기는 물방울로 보긴 어렵고요 뭔가 계속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물기둥이 치고 올라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적으로 안에 있는 공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외부 요인이 아닌, 물 속 내부의 공기가 솟구친다는 건데, 기포 기둥이 여러 곳에서 치솟는 게 전형적으로 차량이 빠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유사하다고 했습니다.

    ◀황민구 소장 (법영상분석연구소)▶
    "여러 군데에서 (기포가) 나와요. 솟구쳐 올라오듯이 올라오기 때문에 이런 거는 전형적으로 자동차가 물에 빠졌을 때라든지, 배가 침몰했을 때 안에 있는 가스의 공기가 바깥으로 분출되면서 나오는 패턴하고 유사하다고 보여집니다."

    더 특이한 건, 이 기포 기둥이 솟구치는 수면 위로 매연 같은 뿌연 연기까지 발생한 거였습니다.

    ◀황민구 소장 (법영상분석연구소)▶
    "위에 이렇게 떠가는 피사체들, 이런 것들이 연기로 보여 지거든요. 잠기면서도 뭔가 연기가 계속 나고 있는...안에 있는 가스가 나오는데 다만 그 가스가 저렇게 회색을 띄게끔 나오
    는 인공적인 거야 하겠죠. 그냥 일반적인 공기라면 저렇게 회색으로 나오진 않겠죠."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탱크 관련 내용은 영상전문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터였습니다.

    ◀황민구 소장 (법영상분석연구소)▶
    "다만 주변에 탱크가 이렇게 지나가거든요. 원근감을 감안하더라도 그 탱크 정도의 큰 피사체가 저 안에 있을 가능성이 저는 있다고 보여집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죠? 더 이상 뭐) 탱크가 빠졌어요? (예?) 탱크가 빠졌어요? (처음에 이 영상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 혹시 뭐?) 그냥 ‘뭔가 빠졌구나’라고 (그냥 바로?) 예. 뭐가 빠졌구나“

    뭔가 물 속에 빠졌지만, 그게 탱크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 제보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해당 영상을 보여주기 전에 사고 전후 상황을 다시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시범 행사가 다 끝난 뒤 사고 현장에 가서 현장 통제 업무에 투입됐다는 제보자. 그 때의 기억을 다시 더듬었습니다.

    ◀장원규 당시 특전사 소위▶
    "이제 전봇대가 하나 이렇게 쓰러졌어요. 그리고 전봇대 전선주가 길가에 이렇게 널브러져 있었고요." "아 가서 봤더니 전선들이 널브러져 있고 전봇대도 이렇게 부러져 있었던가요?" "하나가 이렇게 부러져 있었었다."

    제보자와 함께 영상을 확인해봤습니다. 실제로 기포가 올라오는 수면 왼쪽 언덕에 이미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전신주 하나를, 기동하던 탱크 한 대가 치고 가면서 반대편으로 다시 쓰러뜨리는 장면이 보입니다.

    ◀장원규 당시 특전사 소위▶
    “다시 한 번 기억을 하실 게, 현장에 가셔서 사고 통제를 하셨을 때.." "그 전봇대 앞에, 거기 맞아요. 위치 맞아요. 전봇대요." "그 전봇대가 떨어진 지점에서 탱크가 떨어졌었나요?" "네 제가 갔을 때 전봇대 한 대였거든요 부러진 게. 제가 전봇대 근처에서 여기서 통제하고 있었어요. 전봇대하고 그 아까 물, 수포가 올라오는 그 거리 정도 있잖아요. 그게 맞아요. 제 기억에 거기. 아주 거의 정확하네요, 기억이."

    '탱크가 팔당호 물속에 빠졌다' 그리고 ‘행사가 다 끝나도록 아무도 구하지 않았다'는 제보자의 믿기 어려웠던 기억이, 30여 년 전 촬영 영상과 함께 조금씩 사실로 복원되는 상황. 그 오래된 기억을 지금 다시 꺼내든 건, 생명을 가벼이 대했던 정권에 대한 가슴 속 여전히 묵직한 분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장원규 당시 특전사 소위▶
    "보여주기 위한 훈련 상황인데 거기에서 이제 탱크가 물에 빠졌고 거기에 살아있는 생명이 4명이 그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 저는 그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 자체가 가장 우선적이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굉장히 안타까웠거든요. 아무리 군대라고 하더라도 전쟁 상황도 아닌데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게 아닌가"




    [Studio]

    ◀김의성▶
    네, 저 18분짜리 영상이 33년 전 사고의 가장 확실한 목격자가 됐던 거네요. 그런데 영상을 찍었던 카메라 기자는 당시에 이 탱크 사고를 인지하고 있었던가요?

    ◀이정신▶
    네. 지금은 퇴직을 하셔서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탱크 사고를 봤거나 기포 현상을 의식하고 찍은 것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탱크 기동장면을 멀리서 당겨 찍었을 뿐인데, 우연찮게 이 문제에 기포현상이 포착 된 거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행사 취재가 다 끝난 뒤에, 탱크가 빠졌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이 제보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주진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됩니다. 탱크가 물에 빠져서 기포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생명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수천 명이 쳐다봤습니다. 몇 명은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됩니다. 세월호 참사하고도 똑같습니다. 국가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에도, 그리고 1985년에도 국민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국가는 없었습니다.

    ◀김의성▶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수 천 명이 지켜본 현장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제서야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을까요. 유가족들 역시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요.

    ◀이정신▶
    네, 이 사건은 단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이트에서 처음 취재에 들어간 사건입니다. 그래서 탱크 안에 몇 명이 있었는지, 또 죽은 대원들의 소속과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사실이면 분명 유족들이 있을 테고 이들로부터 진실을 들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가족을 어렵게 찾아 나섰습니다.



    [VCR 3]

    제보가 사실이라면 숨진 병사들은 순직 처리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취재진은 현충원 안장자 가운데, 85필승특전훈련이 있었던 1985년 9월27일 당일 탱크 기동이 행해진 경기도 광주에서 숨진 순직 병사들을 모두 찾아봤습니다.

    고은신 중사, 윤건표 중사, 안승국 병장 3명이 검색됐습니다. 20사단 31전차대대, 모두 같은 부대원들이었습니다. 며칠 뒤, 군 관계자로부터 고은신 중사의 33년 전 당시 병적부상 본적지를 어렵게 알게 됐습니다.

    ◀이정신 기자▶
    "30년 전 주소인 거 같아요 .충남 금산군. 찍힙니까? 나와요 집 주소?" "네" "그럼 그리로 가시죠. 이게 옛날 주소여서 지금도 살고 계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가서 주변 이웃분들한테도 물어보고 찾아야지. 가시죠."

    충남 금산의 한 마을. 30여 년 전 주소. 그 곳에 실제 초록 대문의 낡은 집이 있었고, 문패엔 국가 유공자의 집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정신 기자 - 이웃주민▶
    "계신가요? 어디 나가셨나?"
    "저기 할머니 지나가시는데"
    “사람 좀 찾으려고 하는데 여기 사시죠 여기에?”
    “네?“
    “여기 사시죠? 고찬기 선생님?”
    “예. 거기 살아요.”
    “아버님 어머님 다 사시나요?”
    “예. 다 살아요.”
    “예. 알겠습니다.”
    “식당 하잖아요. 거기.”
    “식당해요? 유공자 셔 가지고 뭐 좀 여쭤 볼 것 도 있고 해가지고”
    “네 유공자예요. 막내 군에 가서 죽었어요.”
    “아세요?”
    “막내가 죽었어요.”

    동네 어귀에서 운영한다는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이정신 기자▶
    "아버님 안녕하세요. MBC 이정신이라고 합니다."

    탱크 사고가 실제 있었던 건지, 이 분이 그때 숨진 병사의 유가족인지 정식 인터뷰 전 확인부터 해야했습니다.

    ◀이정신 기자 - 고찬기 (故 고은신 중사 아버지)▶
    “제가 좀 말씀 꺼내기가 좀 그렇긴 한데 1985년에 이제.”
    "1985년 9월27일 날 국군의 날 행사 시작하다가 저기 경기도 팔당댐에서.. 세 번째 탱크가 가다가 그 팔당댐에 전복돼서 그냥 들어갔대요. 그 사람들 얘기가 그래요."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숨진 고 고은신 중사의 아버지 고찬기씨는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습니다. 33년전 사고 당일, 고 씨는 수업 중 고 중사 소속 부대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고찬기 (故고은신 중사 아버지)▶
    “도장하고 증명하고 이렇게만 갖고 빨리 가평 시내 다방. 다방 소리도 안 하고 지하실로 오라고 지하실로 오라는데 기분이 아주 안 좋더라고요. 가기 전까지는 굉장히 두려웠어요. 가보니까 지하다방이야 가보니까. 소령하고 대위던가 하고 병장인가 셋이 앉았어요.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에게 불려가는 일이 일상이던 시절, 두려움 속에 청천벽력 같은 아들의 사망 통보를 받았습니다.

    ◀고찬기 (故고은신 중사 아버지)▶
    "그 양반이 얘기를 그렇게 '오늘 행사 중에 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12시경에 집결해서 보니까 그때는 고 하사가 없더라'고 훈련하다가 (사고) 났다고 하니까 울컥하는 심정 그것뿐이었지 (훈련 끝나고) 나중에서 이제 12시경에 집결하고 보니까는 탱크 한 대가 없어서 그때 가서 알았다고 하는데 그때 알았다고 하는 건 벌써 이미 사람은 죽은 거죠 뭐."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군의 사고 설명이 영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찬기 (故고은신 중사 아버지)▶
    "굉장히 속으로 혼자 의심을 한 거예요. 군 장비가 얼마나 좋고 한데 도하 작전이라든지 이런 거 건너는 거라든지 사고 나면 바로 인양하고 그러는데 더군다나 그걸 몰랐을까 하는 그런 의심들은 있었어요."

    그리고 곧바로 구조를 했다면 아들이 살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평생 아버지 고찬기씨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고찬기 (故고은신 중사 아버지)▶
    "발견해서 바로 발견만 했으면 인양했으면 살았을지 모르는데 나중에 집결하고 보니까 탱크 한 대가 없더라고. 그 때서야 인양했다는 거야. 그게 침수가 물속에 들어가도 바로 물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 안으로 공기가 있지. 그러면 대비가 돼 있을 거 아니여 대비가. 그런 것까지. 끌어내려고. 그럼 와서 인양하면 살았을 건데."

    그 이상 자세한 사고 경위도 못 듣고 사과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는 고 씨는, 나중에 소속 부대에서 가져온 100여만 원 위로금도 돌려준 채, 모든 걸 잊자고 체념했다고 합니다.

    ◀고찬기 (故고은신 중사 아버지)▶
    "보면 내가 울컥하면 생각나거나 그래서, 잊어버리려고. 뭐 앨범, 걔 소지품은 같이 다 넣어줬어요. 다. 사진도 가져가 갖고서는 일부는 팔당댐 현장 거기다가 버리고"

    또 다른 유가족과도 연락이 닿았습니다. 고 윤건표 중사의 어머니. 어머니는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힘들다며 정식 인터뷰는 사양했지만, 당시 군관계자가 '순직 처리돼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만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했다며, '사고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사과도 할 줄 모르고, 순직 병사와 유가족에게 무례했다'고 전했습니다.

    나머지 한 명, 안승국 병장의 유가족은 보훈처를 통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자식의 죽음에 대해 유가족들은 당시 언론사에든 관계 기관에든 호소할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Studio]


    ◀김의성▶
    순직처리 돼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군에 보낸 자식이 죽었는데 이게 그 부모에게 할 소립니까.

    ◀주진우▶
    국민보다는 국가가 먼저였습니다. 아니, 군사정권이 먼저였습니다. 아닙니다. 전두환의 심기가 가장 먼저였습니다. 진실보다는 은폐가 먼저였고요. 그리고 사과보다도 책임회피가 먼저였습니다.

    ◀이정신▶
    네, 33년 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리고 철저하게 은폐됐던 이 사건을 스트레이트가 다루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복무하던 군 장병들이 물에 빠졌는데 왜 구하지 않았는지. 또 그들의 죽음이 은폐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33년 전의 한 지휘관으로부터 이 사건의 충격적인 진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VCR 4]

    85 필승 특전훈련 당시 사망한 장병들의 탱크 부대는 20사단 31전차 대대. 해당 부대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사고 전차 기종인 M48 탱크는 1990년대부터 신형 탱크들로 모두 교체돼 남아 있는 게 없었습니다. 당시 훈련해 참여해 사고를 목격하거나 아는 장병도 현재는 없고, 관련 기록도 해당 부대엔 없다고 했습니다.

    ◀강희수 대위 (20사단 정훈장교)▶
    "당시 85년 사고와 관련해서 현재 관련 기록이나 근무자가 없어, 구체적인 사실 확인이 어렵습니다."

    거듭된 관련 자료 요청에 육군은 계룡대 육군본부 기록정보관리단 취재에 응했습니다. 30년이 넘은 과거 각종 군 자료 등을 지하 서고에 보관하는 곳. 군사기밀 문서 등이 많아 취재는 물론 출입조차 엄격히 통제되는 시설입니다.

    잠시 뒤, 33년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 원본들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타자체와 볼펜 손글씨가 섞여 있는 빛바랜 문서들은 사망 장병들의 사망 확인조서, 사망 진단서, 순직 확인증 등이었습니다.

    '전차 연막 차전 시범을 보이다, 고속 돌진 중 먼지와 짙은 연막으로 시야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커브길 을 파악하지 못하고 물속으로 전복됐다' 뒤이어, '20m 깊은 수심에 빠져 구조가 불가능했다'고도 특별히 강조해놨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보자의 증언과 많이 다릅니다.

    ◀장원규 당시 특전사 소위▶
    "무전기를 메고 이제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간 거죠. 그래서 가서 보니까 탱크가 뒤집혀서 빠져 있고 궤도가 일부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전차 바퀴가 이렇게 바깥으로 좀 나와 있었죠." "수심이 아주 깊지 않은?" "그렇죠, 아주 깊지 않았어요."

    사고 탱크 기종인 M48은 높이와 넓이가 3m 남짓 궤도 바퀴가 수면에 보일 정도면 사고 지점 호숫가의 수심은 4m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애당초 구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사실을 조작한 건 아닐까. 하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사고 경위나 방치에 관한 조사 자료는 없었습니다.

    문서로 확인되기 어려운 상황, 당시 지휘관들에게 직접 물어봐야했습니다. 당시 해당 탱크 부대 사단장은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 총무처 장관까지 지냈던 이문석 예비역 대장.

    ◀이문석 당시 20사단 사단장▶
    "나는 몰라요. 왜냐면 ..부대가 차출돼서 다른 하는 부대에 부대를 빌려줬을 뿐이지 직접 지휘하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행사 시범단에 부대를 꿔줬을 뿐이라서 사고경위도 사후처리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문석 당시 20사단 사단장▶
    "바로 구조 활동을 했다, 이런 말씀을 들으셨나요, 아니면 훈련 다 끝난 뒤에 구조 활동을 했다 그런?" "빠졌으면 뭐 구조 활동을 했겠지." "유족 분들한테 사과를 드리거나 이런 일도 없었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실제로 당시 시범행사는 특전사가 주도했고 시범단장도 특전사령관이었습니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육완식 중장. 예편한 뒤 안기부 3차장으로 자리를 옮겨 88올림픽 안전을 총괄했던 인물입니다. 먼저 통화를 해봤습니다.

    ◀육완식 당시 특전사령관▶
    "그때 저도 기억을 확실히 하고 있는데, 전차 먼지 때문에 뒷전차가 앞을 잘 못 봤어요. 그래 가지고 그것이 그대로 팔당 호수에 빠져버렸죠." "당시 총 단장님이셨기 때문에 보고는 받으셨을 거고요?" "그럼 보았는데 뻔히 눈앞에서 보았는데." "아 보셨어요, 직접?" "그럼요." "전두환 대통령도 보셨어요? VIP석에서?" "그럼요, 그럼요." 전두환 대통령도 보셨어요?" "당연히 그랬죠."

    직접 찾아갔습니다. 왜 즉각 구조에 나서지 않았을까.

    ◀육완식 당시 특전사령관▶
    "했어야 하는데, 훈련 규모가 적었으면 충분히 그랬을 겁니다. 근데 그건 전국에서 사람들이 왔거든요 참관인이. 전국에서 와 있고 원체 큰 훈련이니까 훈련을 중단하거나 사람 꺼내거나 그런 여유가 없어요. 대통령 모시고 훈련하면서 사고 좀 났다고 훈련을 중지할 수가 없죠. 계속 해야지."

    대통령이 직접 보고 있는 정권 차원의 시범행사 진행이 숨져가는 병사들에 대한 구조보다 먼저였다는 겁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도 탱크 전복 상황을 직접 목격했지만, 구조 지시는커녕 언짢아하기만 했다고도 했습니다.

    ◀육완식 당시 특전사령관▶
    “그게 전부예요” "그때 전두환 전 대통령도 그 상황을 보셨겠네요. 바로 정면이니까?"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죠. 잘 나가다가 전차가 물속으로 싹 들어 가버리니까. 기분이 안 좋았죠. 끝까지 기분이 안 좋아서 나갔어요." "사고가 벌어지면 빨리 가서 구해라라고 얘기했을 법 한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그런 얘기 없었나요?" "그게 없었어요. 내가 옆에 있었으니까 아는데..훈련 중지를 해야죠, 꺼내려면. 그래서 내버려 뒀어요." "안타까워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언짢아했다?" "예 기분 나빠했어요. 훈련을 망친 건데.."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씨가 탱크 사고를 직접 목격했는데도 아무런 구조 지시도 하지 않았고,오히려 언짢아했다는 증언과 관련해, 전 씨측의 반론과 해명을 듣고자 자택 방문도 시도하고, 취재 협조 공문도 보냈지만 지금까지 답이 없습니다.

    지난 33년 동안 대전 현충원에 나란히 안장돼 있었던 순직 탱크 장병 3명의 비석엔 그저 1985년 9월 27일 경기도 광주에서 순직했다는 비문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Studio]

    ◀김의성▶
    군 장병의 생명 구조보다 행사를 망친 것을 언짢아했다. 이게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입니까?

    ◀주진우▶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의성▶
    네. 고은신 중사, 윤건표 중사, 안승국 병장, 죄송합니다.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취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진우▶
    군은 그 어떤 조직보다 폐쇄적입니다.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납니다. 사망 사건이 있었을 경우 조작과 은폐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그때마다 군에서는 국가를 위해서 봉사했다.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이 한 마디로 유가족들을, 그리고 국민들을 협박하던 시대였습니다. 불과 30년 전이었습니다. 전두환 시대였습니다.

    ◀양윤경▶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쉽게 조작하고 은폐한 국가와 권력을 상대로 아들이, 그리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 이유만이라도 알아야겠다며 아무런 힘이 없는 유가족들은 수십 년을 싸워야 했습니다. 특전사를 포함해 군인 53명이 숨진 사고입니다. 전쟁도 아닌 평시에 이렇게 많은 군인이 숨진 사고는 아주 드물 겁니다. 그리고 이 사고에도 전두환 씨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VCR 5]

    ◀양윤경 기자▶
    “이 속에 저 엔진이랑 저런 거 다 있어요.”
    “여기다 다 모아뒀구나.”
    “계곡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계곡으로..저희가 지금 계곡에 서 있어요.”
    “저기다!”
    “나라를 위해서 군인이 되긴 됐는데..”

    1982년 2월 5일 오후 3시 15분. 제주공항으로 향하던 C123 수송기가 '착륙 5분 전'이라는 마지막 교신 직후 한라산 1100m 고지 바위에 충돌한 뒤 바로 옆 계곡으로 추락했습니다. 특전사 46명을 포함한 탑승자 총 53명 전원이 숨졌습니다. 이 수송기는 사고 2시간 전 성남 서울공항에서 제주를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특전사 중에서도 최정예인 특전사령관 직할 대테러부대 부대원 350여 명을 나눠 태운 수송기 8대 가운데 4번째 비행기였습니다. 바위에 부딪힌 수송기의 동체는 파괴됐고 안에 있던 53명 장병들의 목숨도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양송남 당시 한라산 국립공원 청원경찰▶
    “확 추락해서 콱 박아서 팍 폭발하니까 아마 거의 다 전사한 거고. 전사한 시신들이 폭발에 의해서 2차, 3차 다 훼손된 거야. 그러다 보니까 뭐 그냥 사실상 참, 나뭇가지라든지 이런 데 시신.. 사실상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돼. 그 시신만도 뭐 이리로 잘리고 이리로 잘려서”

    특전사와 공군 53명이 몰살된 초대형 사고. 이틀 뒤 신문엔 맨 뒷장 사회면에 단순한 사고 기사로만 소개됐습니다. '대침투작전 훈련 중 사고가 발생했다'는 국방부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한 기사였습니다. 대침투작전, 즉 간첩 잡는 훈련을 하러 가다 순직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끝으로 이 사건은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서재철 당시 제주신문 사진기자▶
    “기사는 한 번도 안 나왔어요. 이거에 따르는 기사는 한 번도 안 나왔어요. 사진도 한 장도 안 나오고 한 번도 안 나왔어요.”

    350명의 특전사 장병들은 그 날 정말 간첩 잡는 훈련을 위해 제주도로 수송됐을까. 폭발해버린 특전사 수송기가 착륙할 예정이었던 제주공항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인물, 바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입니다. 연두 순시 겸 제주공항 활주로 확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습니다.

    <대한뉴스 제1371호(1982년 2월 12일)>
    전두환 대통령은 새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해서 개통 테이프를 끊고 관계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새 활주로에는 계기 착륙 장치가 설치돼 있어 나쁜 기상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게 됐습니다.

    이 소식을 전한 신문입니다. 1면에 전두환 대통령의 제주공항 방문 소식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실렸습니다. "전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석해 격려했다, 개통테이프를 끊은 뒤 승용차로 활주로를 시험 주행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문은 바로 53명의 국군 몰살 사건을 이틀 뒤 맨 뒷장 사고 기사로 처리했던 바로 그 날짜의 신문입니다. <스트레이트>는 이 두 사건의 관계를 최근 확보한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순직 장병들과 함께 작전에 투입됐던 특전사 예비역 이장락 원사. 사고를 당한 비행기를 탔다 이륙 직전 다른 비행기로 옮겨 타 운명처럼 죽음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사는 처음 탔던 수송기에서 내리기 직전 자신들이 동원된 이유를 똑똑히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장락 특전사 예비역 원사▶
    “내리기 전에 그 비행기 안에서 이제 브리핑을 했었어요. 가는 목적을 제주공항에 보잉747기가 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를, 4km짜리 활주로를 준공식을 했었어요. 준공식 겸, 전두환 대통령이 연두 순시를 내려간다고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경호 작전을 내려간 겁니다. ‘봉황새 1호 작전’이라 해서. 경호 작전을 내려간 거죠.“

    봉황새 1호, 바로 대통령입니다. 전두환 씨 한 명을 경호하기 위해 '봉황새 1호 작전'이라는 미명 아래 특전사 수백 명이 제주도로 보내졌다는 것. 그러나 수송기 추락사고 직후 이 작전 명칭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특전사령관 박희도 씨가 기체가 발견되지도 않은 사고 다음 날 아침 8시 45분 대대장에게 하달한 첫 메시지입니다.

    제목 <훈련 명칭 변경>, 금번 훈련을 "동계 특별 훈련"으로 부르기로 했다며,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라고 돼 있습니다. 동계 특별 훈련, 즉 간첩을 잡기 위한 대 침투 훈련으로 바꿔친 겁니다.

    ◀이장락 특전사 예비역 원사▶
    “저희들이 이제 경호 작전으로 가서 이제 뭐. 2박 3일 정도 간다고 처음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가 이제 저희들 그러면 2박 3일 끝내고 올라와야 되지 않습니까. 올라와야 되는데, 그럼 대 침투 훈련으로 해서 2월 25일까지 20일간 훈련을 하고 올라와라. 그렇게 해서 (작전명이) 바뀐 걸로..참모장이 그렇게 대 침투 훈련으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 사고와 전두환과의 관련성을 차단하기 위해 대침투작전이란 일상적인 훈련으로 둔갑시킨 겁니다. 그리고 이 명칭이 현재 장병 사망보고서에 남아 있는 이 사고 관련 육군의 공식 작전명입니다. 그런데 봉황새에서 간첩으로 목적이 뒤바뀐 이 작전은, 애초부터 있어서는 안 될 명령이었습니다.

    그 날 한라산은 육안으로도 앞이 잘 안 보일 만큼 날씨가 험했던 상태. 항공기의 시야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장락 특전사 예비역 원사▶
    “착륙 5분 전이라고 그러는데 뭐.. 밖이 전혀 안 보였어요”


    ◀양송남 당시 한라산 국립공원 청원경찰▶
    “아주 악천후라고 보지. 이 비행기는 이 한라산에는 도저히 오면 안 될 날씨였지. 앞도 안 보이고 눈보라 계속 치고 하니까.”

    숨진 부조종사의 부인이 쓴 진술서에서 인용된 작전 참가 공군의 말에서도 그 날의 기상 상태는 확인됩니다.

    ◀유가족 고소장 대독▶
    "당시 (다른) 비행기를 조종하셨던 소령님께서도 '비행기를 탔어도 이번같이 어려운 조종은 처음이었다, 내리니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눈 때문에 앞이 안 보여 꼭 죽는 줄 알았다'고 제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특히 유가족들은 청와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병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며 사건 7년 뒤인 1989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희도 전 특전사령관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유가족 고소장 대독▶
    "이륙하기에는 너무나 악조건의 기후이고.. 2차에 걸쳐 이륙 불가능을 청와대에 건의하였으나 강력한 명령에 의하여.. 특전사령관은 위험한 사실을 알면서도 탑승시켜 한라산에서 추락함으로 고귀한 생명을 전두환 씨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죽인 것입니다."




    [Studio]

    ◀김의성▶
    전두환 이 사람 하나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겁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전히 잘 살고 있잖아요. 전 정말 화가 납니다. 근데 유가족이 이 고소한 사건은 어떻게 그 결과가 진행됐습니까.

    ◀양윤경▶
    어, 예상하시겠지만 결과를 들으면 더 화가 나실 것 같습니다. 검찰은 3년간 수사한 끝에 살인혐의에 대해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전두환 정권 바로 다음인 노태우 정권 때였습니다.

    ◀주진우▶
    노태우 씨는 전두환 씨의 육사 동기입니다. 그리고 1212 군사 쿠데타를 같이 감행했던 절친이자 후계자였죠.

    ◀이정신▶
    그리고 두 사람 집도 같은 연희동, 가깝게 살고 있습니다. 경찰은 아직도 이들 두 사람 경호도 하고 있고 경비도 하고 있습니다.

    ◀김의성▶
    그 당시 검찰은 정권에 충실한 개 역할을 하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혐의 없음’ 검찰의 이 결정을 이제 와서 누가 믿겠습니까.

    ◀양윤경▶
    사고 후 유가족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가족들은 군인의 가족이었기 때문에 군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군은 사건 현장을 통제한 뒤 훼손했고 시신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유가족들은 맨손으로 아들의 시신을 모아 담아야 했습니다.




    [VCR 6]

    53명의 젊은 장병들을 태운 수송기가 폭발한 한라산 해발 1,100미터 고지.

    ◀양윤경 기자▶
    "아, 어떻게 이 길을 이렇게 매번 다녔을까“
    "저기다!"

    비행기가 처음 충돌한 지점을 알리는 원점비. 그러나 이 비석은 유가족이 원한 것도 숨진 장병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고 수습에 나선 군이 맨 처음 한 일은 현장 완전 통제, 그리고 입막음이었습니다. 사고 현장에 유일하게 접근했던 이 지역 신문 기자는 촬영했던 필름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서재철 당시 제주신문 사진기자▶
    “그때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당시 이제 회사에서 사장이 그 필름 가져오라고 특전사에다가 그거는 중요한 자료니까 줘야 된다고 해서 이제 가져오라고 한 거죠.”

    사고 현장 길 안내를 맡았던 청원경찰에겐 영원히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습니다.

    ◀양송남 당시 한라산 국립공원 청원경찰▶
    “양 선생님 혼자밖에 민간인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절대 어디 가서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혼자만 알고 계십시오.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됩니다. 딱 얘기하더라고.”

    아들과 남편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지도 못 한 채 제주도로 내려온 유가족들조차 몇 달 동안 접근이 원천 봉쇄됐습니다.

    ◀이재수 (故 이재훈 준위 누나)▶
    “거기 올라간다 그러면 군인들이 어디서 그렇게 소식을 잘 듣는지 못 올라가게 쫓아와. 금방 쫓아와요 (막아요?) 접근도 못 하게 했어요.”

    왜 이렇게 철저히 막아섰을까. 외부의 발길을 통제한 채, 군이 추락한 수송기를 안에 있는 시신과 함께 수차례 폭파시켰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이장락 특전사 예비역 원사▶
    “공군 EOD(폭발물 처리반)에서 나와 가지고. 공군 폭파팀에서 나와서 그 폭파를 3회에 걸쳐서 폭파를 시켰어요. 비행기를”

    사고 난 지 이틀 뒤, 사고기 발견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장락 특전사 예비역 원사▶
    “7일 날 오후 늦게 아마 폭파가 된 거 같아요. 눈이 거의 한 1m 가까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폭파를 해버리니까. 이게 뭐 다 날아가지 않습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 작전 중 벌어진 대규모 인명 사고. 정확한 사고 조사를 하기도 전에
    현장부터 훼손한 겁니다. 사고 나흘 뒤엔 서울 국립묘지에서 합동 영결식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이재수 (故 이재훈 준위 누나)▶
    “어느새 화장해가지고 무슨 단지에다가 다 그 유골함 해가지고 앞에 좍 그 영결식 하는 그거 다 해놨더라고. 기가 막히더라니까 그 속에 모래 한 줌씩이나 넣었나? 거기 모래라도 갖다 놨으면 피 한 방울이라도 묻은 거 놨으니까 다행인데, 그냥 맨 항아리 묻지는 않았나?”

    유가족이 처음으로 현장에 접근한 건 제주에서 열린 사고 백일제 바로 다음날이었습니다. 감시하던 군인들을 따돌리고 몰래 산을 올라 마침내 현장에 도착한 유족들. 그곳에서 그들이 목격한 건 산산이 흩어져 있는 파괴된 기체, 그리고 훼손된 시신들이었습니다.

    ◀이재수 (故 이재훈 준위 누나)▶
    “이 밑에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이 위로. 그땐 추우니까 이게 다 안 상하고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묶은 거에서 이 무릎, 이 위에는 없고 여기까지...”

    어느새 뒤따라온 군인들은 시신 일부라도 거두려는 유가족의 절박한 손마저 끝까지 막아섰습니다.

    ◀이재수 (故 이재훈 준위 누나)▶
    “(땅을) 못 파게 하는 거예요. 그게 통해요? 안 통하지. 막 팠어요, 아버지들이. 파니까 그 해군. 최 대령이라는 것밖에 모르겠어, 나는 '명령이다, 파지 마!'하고 발로 거기(땅)를 탁 밟는 거예요. 그게 통해요? 안 통하지. 그래 파보니까 유골이 나왔어요.”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유가족들의 고단한 산행은 그 뒤 3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희도 전 특전사령관을 살인혐의로 고소한 고소장엔 그 기막힌 과정의 일부가 담겼습니다.

    ◀유가족 대독▶
    "수십 마리의 까마귀와 쉬파리가 앉아있는 상황을 유가족들에게 보게 하고, 시신을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폭파시켜 산산조각이 났고 뼈와 살을 흙으로 덮어놓은 것을 유가족들과 미망인이 파내고 모두어 부대에 연락을 하였으나 외면해 제주에서 3차 장례식을 거행했다."

    작전명 변경부터 사고 수습까지 전 과정의 총책임자는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박 씨는 유가족이 시신을 거두러 현장을 수십 번 오가는 사이 육군 대장으로 승진합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 퇴임 2년 전인 1985년 육군참모총장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순직한 장병들을 기린다는 충혼비엔 이런 박희도 씨가 손수 지었다는 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양윤경 기자▶
    "네가 죽음으로써, 네가 죽으면 우리가 살고 조국은 지켜지리니 검은 베레는 죽어서 영원히 산다."

    유가족에 따르면 더 황당한 건 충혼비와 원점비 제작비용이 장병들의 월급에서 공제됐다는 것. 이들은 "하사 7,000원, 중사 이상 15,000원, 장교 30,000원씩을 봉급에서 공제해 충혼비와 원점비를 제작하고 비문에 자신의 이름 박희도를 기재했다"며 유가족과 영령들을 우롱한다고 분노했습니다.

    ◀이재수 (故 이재훈 준위 누나)▶
    (추우시죠?) “추운 게 아니고 마음이 추워서 그래요. 이 생각만 하면 떨려.” ((동생분) 성함 있으시죠?) “예. 이재훈. 위에 맨 위에” (저기 있네, 준위셨구나) “죽으니까 1계급 특진해가지고 준위로 한 거죠. 죽은 다음에 특진 아니라 별것 해봤자 뭐 해, 다 소용없지.”

    ◀이재수 (故 이재훈 준위 누나)▶
    “동생이 군인(으로) 갈 때 그랬대요. 아버지가 ‘야 공수부대는 위험하다는데 왜 꼭 그 위험한 공수부대를 가냐’그러니까 그랬대. ‘아버지는 내가 책임져. 공수부대 가서 안 죽어도 내가 책임질 거고, 죽어도 책임질 거니까 걱정하지마’”
    (동생분께서는 29살에 돌아가셨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내일모레 구십을 바라보네요)
    “젊은 피 끓는 청춘들 목숨 다 앗아다가 지만 배 터지게 먹고살면 끝이지.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Studio]

    ◀김의성▶
    아, 정말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드네요. 5공화국은 광주 시민들의 피를 밟고 세워진 정권 아닙니까. 그런데 그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정말 많은 피를 흘렸군요. 그리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고요.

    ◀주진우▶
    아닙니다. 오히려 가해자들은 떵떵거리면서 더 잘 살고 있습니다.

    ◀양윤경▶
    네, 그중 한 명이 박희도 전 특전사령관입니다. 박희도 씨는 현재 한 보수단체의 대표로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 때 나라가 폭동 세력에 넘어가고 있다면서 탄핵 반대 집회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정신▶
    네, 박희도 씨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반론도, 해명도 필요 없다며 취재를 거부했습니다.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이 접촉 자체를 차단했고요.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자신은 사고 당일 일본에 있다가 부랴부랴 귀국한 기억밖에 없다. 이러면서 모든 질문엔 오래된 일이어서 기억이 안 난다. 이런 말만 반복하다가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습니다.

    ◀주진우▶
    그들은 말합니다. 모두 조국을 위한 죽음이었다고. 그 조국이 전두환입니까? 전두환 한 사람을 위해서 무수한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왜 죽었는지 그 이유조차 밝혀지면 안 됐습니다.

    ◀양윤경▶
    저희가 만난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가 남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30년 전이나 다름없이 국가는 개인과 정권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고 진실을 감추는 데에 급급했다는 겁니다.

    ◀이정신▶
    네. 보수 정권이 가장 큰 가치로 내세우는 게 국가와 안보 아닙니까. 그런데 국가와 안보를 책임지는 군인이 죽었는데 시신을 수습하기는커녕, 사건 현장을 폭파해 시신을 참혹하게 훼손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 안보, 그건 사실 정권의 이익이었습니다.

    ◀주진우▶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6.25 때 전사한 유해를 찾으려고 한 구라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한 구를 찾으면 성대한 의식도 열어주고 뉴스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53명의 이 피 같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거기에 그 시신을 수습해줘야 되는데 폭탄을 터뜨렸어요. 이게 진실을 은폐하려고.

    ◀김의성▶
    네, 진실이 조각조각 나기를 바랐겠죠. 그래서 이 사건이 영원히 묻히기를 바랐을 겁니다.

    ◀주진우▶
    하지만 영원히 묻힐, 그런 진실은 없습니다. 그 진실을 향해 스트레이트는 끝까지 가겠습니다.

    ◀김의성▶
    끈질긴 추적 저널리즘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저희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취재기자]
    양윤경 imagine0402@gmail.com
    이정신 geist1@im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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