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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19회 하이라이트] 쌍용차 사태가 발생한 시대적 배경은?
[스트레이트 19회 하이라이트] 쌍용차 사태가 발생한 시대적 배경은?
입력
2018-09-03 10:50
|
수정 2018-09-0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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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봄.
광우병이 발생했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조건을 대폭 완화하겠다는 결정은
이명박 정권의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 이명박 대통령 / 2009년 6월 19일 특별 기자회견 ▶
"컴컴한 산 중턱에 홀로 앉아서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그러나 대국민 사과 닷새 뒤,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꿨습니다.
촛불집회와 관련돼 1천명의 시민들이 연행됐고,
수많은 시민들이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
용산 재개발로 갈 곳을 잃은 철거민들은
용산 남일당 건물의 망루에 올랐습니다.
“야! 물 대포 뿌리라고 (아, 어떻게 해)”
용산 재개발은
삼성물산을 비롯한 재벌의 대규모 이권 사업.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른지 불과 25시간 만에
이명박 정권은 강제 진압 작전으로 응수했습니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말하지 말라. 저항하지 말라. 가만히 있으라.'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이 낙향한
봉하마을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늘어날 때,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했습니다.
얼마 뒤인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광화문 일대를 뒤덮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노 전 대통령 분향소를 강제 철거했습니다.
시민들의 집단적 의견 표출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이렇게 더욱 예민해져갔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인 2009년 5월 21일.
정규직만 2천6백여 명을 사실상 해고하겠다는
사측의 구조조정 방침에
쌍용자동차 노조는
총파업과 공장 점거 농성에 돌입합니다.
노조는 동시에 대규모 해고를 막기 위해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대안도 내놨습니다.
노동자들이 퇴직금을 저당 잡혀
신차 개발비용 1천억 원을 대고,
비정규직 고용기금 12억 원도 내겠다는 것.
순환 휴직을 통해
임금이 줄어드는 고통도 감수할 테니
사망 선고와도 같은
대규모 해고만은 하지 말아달라는 호소였습니다.
노조의 구호는 “함께 살자”.
이명박 정권의 구호인 ‘일자리 나누기’에
딱 들어맞는 내용이었습니다.
◀ 김재환 쌍용자동차 해고자 / 당시 노조간부 ▶
“‘신차 개발 비용 퇴직금 담보로 대출받자. 그리고 근무시간 줄여 가지고 현재 인원으로 돌리자. 근무시간을 줄여서 같이 살자’ 라는 것까지 제안을 했었는데...”
공장 점거 이틀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며
언론의 관심이 노 전 대통령에게 쏠릴 때,
쌍용차 사측은 직장 폐쇄를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일자리 나누기라는 대안까지 제시하며
대규모 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은
평화로웠습니다.
파업 노동자들의 가족들은 아빠와 남편을 만나러
농성 중인 공장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습니다.
2009년 6월 2일 화요일,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아빠의 일터를 찾아 온 아이들이
공장 안을 뛰어다니며 놀거나,
싸온 간식을 나눠 먹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져 온
일터 곳곳에서, 파업 노동자와 가족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이즈음 조현오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쌍용차에 대한 인터넷 대응팀,
즉 50명 규모의 경찰 댓글부대 설립을
직접 지시했습니다.
여론 조작, 여론전에 착수한 것입니다.
동시에 회사의 협조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고,
단순 가담자도 형사처벌 하겠다는 등
강경대응 방침을 수립했습니다.
이른바 ‘쌍용차 진입계획’.
7월 15일엔 공장 지붕을 통해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기 위한
컨테이너 제작에 착수합니다.
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용산 참사 당시의
진압 방식을 그대로 쓰기로 한 것입니다.
경찰이 강제 진압 계획을 세우는 동안,
쌍용차 노조원들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일자리를 나누겠다는 제안까지 했으니
고통스러운 파업은 머지않아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광우병이 발생했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조건을 대폭 완화하겠다는 결정은
이명박 정권의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 이명박 대통령 / 2009년 6월 19일 특별 기자회견 ▶
"컴컴한 산 중턱에 홀로 앉아서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그러나 대국민 사과 닷새 뒤,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꿨습니다.
촛불집회와 관련돼 1천명의 시민들이 연행됐고,
수많은 시민들이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
용산 재개발로 갈 곳을 잃은 철거민들은
용산 남일당 건물의 망루에 올랐습니다.
“야! 물 대포 뿌리라고 (아, 어떻게 해)”
용산 재개발은
삼성물산을 비롯한 재벌의 대규모 이권 사업.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른지 불과 25시간 만에
이명박 정권은 강제 진압 작전으로 응수했습니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말하지 말라. 저항하지 말라. 가만히 있으라.'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이 낙향한
봉하마을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늘어날 때,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했습니다.
얼마 뒤인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광화문 일대를 뒤덮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노 전 대통령 분향소를 강제 철거했습니다.
시민들의 집단적 의견 표출에 대해
이명박 정부는 이렇게 더욱 예민해져갔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인 2009년 5월 21일.
정규직만 2천6백여 명을 사실상 해고하겠다는
사측의 구조조정 방침에
쌍용자동차 노조는
총파업과 공장 점거 농성에 돌입합니다.
노조는 동시에 대규모 해고를 막기 위해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대안도 내놨습니다.
노동자들이 퇴직금을 저당 잡혀
신차 개발비용 1천억 원을 대고,
비정규직 고용기금 12억 원도 내겠다는 것.
순환 휴직을 통해
임금이 줄어드는 고통도 감수할 테니
사망 선고와도 같은
대규모 해고만은 하지 말아달라는 호소였습니다.
노조의 구호는 “함께 살자”.
이명박 정권의 구호인 ‘일자리 나누기’에
딱 들어맞는 내용이었습니다.
◀ 김재환 쌍용자동차 해고자 / 당시 노조간부 ▶
“‘신차 개발 비용 퇴직금 담보로 대출받자. 그리고 근무시간 줄여 가지고 현재 인원으로 돌리자. 근무시간을 줄여서 같이 살자’ 라는 것까지 제안을 했었는데...”
공장 점거 이틀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며
언론의 관심이 노 전 대통령에게 쏠릴 때,
쌍용차 사측은 직장 폐쇄를 단행했습니다.
하지만, 일자리 나누기라는 대안까지 제시하며
대규모 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은
평화로웠습니다.
파업 노동자들의 가족들은 아빠와 남편을 만나러
농성 중인 공장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습니다.
2009년 6월 2일 화요일,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
아빠의 일터를 찾아 온 아이들이
공장 안을 뛰어다니며 놀거나,
싸온 간식을 나눠 먹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져 온
일터 곳곳에서, 파업 노동자와 가족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이즈음 조현오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쌍용차에 대한 인터넷 대응팀,
즉 50명 규모의 경찰 댓글부대 설립을
직접 지시했습니다.
여론 조작, 여론전에 착수한 것입니다.
동시에 회사의 협조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고,
단순 가담자도 형사처벌 하겠다는 등
강경대응 방침을 수립했습니다.
이른바 ‘쌍용차 진입계획’.
7월 15일엔 공장 지붕을 통해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기 위한
컨테이너 제작에 착수합니다.
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용산 참사 당시의
진압 방식을 그대로 쓰기로 한 것입니다.
경찰이 강제 진압 계획을 세우는 동안,
쌍용차 노조원들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일자리를 나누겠다는 제안까지 했으니
고통스러운 파업은 머지않아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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