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열흘 앞둔 임진각.
북녘 고향을 그리는 망배단에 80대 노인이 국화꽃을 올려 둡니다.
이어지는 발길은 늘 그곳을 향합니다.
철조망 너머 먼 산.
올해도 마음으로만, 눈으로만 산을 넘었습니다.
주름이 깊게 패일 만큼의 세월이건만, 기억 속 누이들은 앳된 모습 그대로입니다.
[김주삼/북한 이탈 주민]
"얼굴 못 보고 편지만 해도‥ 걔네(동생)들은 어떻게 사는지 편지로만 해도 소식이라도 전했으면 그런 마음이지."
할아버지의 이름은 '김주삼'
올해 여든 다섯이고, 66년 전 황해도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김 씨는 전쟁통에 떠나온 피란민도 아니고, 원해서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김 씨를 '비자발적 탈북민', '강제 귀화자'라고 부릅니다.
66년 전 그는 왜 고향을 떠나야 했던 걸까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1956년 10월 10일, 그 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황해도 용연군 용전리의 작은 마을.
당시 19살이던 김주삼씨는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홀로 자식들을 키우던 어머니가 병원 야간근무를 나가고, 여동생 3명과 함께 자고 있는데 자정 무렵 갑자기 집에 총을 든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남한에서 보낸 북파공작원들이었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나하고 내 동생들하고 집에서 자고 있었어,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군인들이 들어와서 총 들고 들어와서"
(총? 총을 들고 왔어요?)
"총 들었지 그럼, 총 들고 들어와서 싹 보더니 내가 제일 크거든, 나만 데리고 끌고 나간 거야."
이들은 다짜고짜 김씨를 끌고가 목선에 태웠습니다.
바다 건너 백령도를 거쳐 도착한 곳은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공군 제25첩보부대.
[김주삼/납치 피해자]
"우리 집이 바닷가에서 얼마 안 떨어졌거든, 바다로 나와서 배 타고 정신 없지, 뭐 한참 있으니까 백령도에 왔더라고 밤이야 그것도 밤. 백령도에 왔다가 (서울) 오류동으로 온 거지."
당시 이 부대에서 수송대원으로 일했던 임중철 씨도, 김 씨를 처음 본 그날을 기억합니다.
[임중철/당시 공군 수송대 근무]
"낯선 총각이, 학생 같은 게 하나 와 있어. 전부 이 사람 쳐다보니까 누구냐고 물어봐도 다들 쉬쉬하면서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입에서 나온 거야, 납치해서 온 애라고 걔가 그때 (나이가) 열아홉인가‥ 잠자는 걸 잡아 왔어."
부대에서는 군사 기밀 정보를 털어놓으라며 김 씨를 심문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던 김 씨가 그런 정보를 알고 있을리 없었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심문받을 적에? 물어봤죠, 다 물어봤지, 뭐 ‘군부대가 어디 있느냐, 다리가 어디 있느냐’ 그런 것들 다 물어봐서…아무것도 모르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국군 첩보대 조사가 끝나자 미군 첩보대로 넘겨졌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미군 부대에서 또 그런 심문이야."
(똑같은?)
"네, 그런 것만 또 다 얘기하고."
이렇게 두 달.
아무 것도 모르는 민간인을 납치했다는 게 확실해졌는데도 군은 김씨를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막사 한 칸을 배정하고 수송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습니다.
[김주삼]
"수송부라고 있잖아 차 정비하는데, 거기에서도 잔심부름, 연장 가져오라하면 가져오고 이거 다 갖다 닦으라 하면 다 닦고‥"
돈 한푼 받지 못하고, 기약 없는 억류 생활이 시작된 건데요,
김 씨는 매일같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임중철]
"그 부대 옆에 철조망이 있는데 철조망을 붙잡고 쪼그리고 앉아서 우는 거를 내가 여러번 봤어 내가 가서 달래주고, 너 지금 혼자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참아야지 어떡하냐..."
그렇게 꼬박 3년.
김 씨는 1959년 6월에서야 부대에서 풀려났습니다.
그 사이 김 씨의 본적은 황해도에서 서울 구로구 오류동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문관, 부대 문관 그 사람네 집이 오류동에서 얼마 안 떨어졌거든, 근데 그 사람네 집으로 내가 주소를 만든 거지, 그것도 이제 부대에서 다 ‘이렇게 해라’ 해서 한 거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군이 그를 귀화자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강혁/변호사 (김주삼 씨 법률대리인)]
"상식적으로 그 누가 본다고 하더라도 불법행위, 어떤 범죄 행위임이 명백하겠죠. 납치, 감금죄 이런 거에 해당한다는 거, 교전 상황도 아닌데 군인도 아니고, 어린 민간인을 이렇게 납치해 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헌법에 반하고 국제법과 어떤 인륜에 반하는…"
비자발적 탈북자, 강제 귀화자.
김주삼 씨를 부르는 용어들입니다.
낯설게 들리시죠? 당연합니다.
북파 공작원에게 납치돼 강제로 남한에 정착해야했던 이들은 소문만 있을 뿐 실존 인물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 씨의 지난 66년을 되짚어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주삼/임승자]
"내가 배운게 있어? 말재주가 있어? 그러니까 막노동하기 시작한거지.."
(그냥 일거리 있으면 나무 심고 캐고 하는거... 고생바가지로 하고)
"목도가 뭔지 알아요?모르죠?"
(이렇게 드는거?)
"둘이서 (나무를)이렇게 매는거야 아휴 말도 못했지 그때는 이렇게 부었었어. 여기(어깨)가"
부대에서 풀려났지만 돈도 없고,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같은 황해도 출신의 부인을 만나 쉬는 날 없이 함께 일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찾아 떠돌다 보니 20년 세월에 이사만 15번.
경기 고양 원당과 벽제, 내유동, 법곳동, 덕이동...
모두 남의 땅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살았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말도 못하게 다녔어 이사"
[김윤성/김주삼 씨 아들]
"그게 우리 땅이 아니기 때문에 남의 땅에다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살다 보면 조금 더 괜찮은 데로 옮기고, 근데 멀리는 못 가고 거기서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사는 곳을 옮길 때마다 담당 형사도 바뀌었습니다.
국가에게 김주삼 씨는 북한 출신의 감시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김주삼/임승자]
:"(비닐하우스에 살때) 경찰, 형사들이 와서 신발 신고 들어와서 이거 다 이렇게 쳐다보고, 무슨 (북한쪽과) 연락하는거 없나 뭐 그런거 보는거 같아 이렇게"
(담당 형사들이 꼭 바뀌더라고 한 번씩)
20년 전 간신히 임대아파트에 들어와 한 달에 40만원씩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로 버티고 있지만, 여전히 김 씨의 삶은 고됩니다.
[김윤성/김주삼 씨 아들]
"(아버지) 재작년까지 고물 주웠어요."
[김주삼/납치 피해자]
"병 100원짜리 병, 그거 주워서 다니고 그랬어요."
[임승자/김주삼 씨 부인]
"시커먼 구르마(끌차) 끌고 마냥 돌아다니면 밤에도 이사 가는 집 같은 거 만나면 또 뭐 내놓으면 가져오고 냄비도 가져오면 갖다 팔고,"
[김주삼/납치 피해자]
(병 줍고 그러면 한 달에 얼마 버는 거예요?)
"하루에 한 20개 주울 때가 제일 많아."
(그럼 얼마예요?)
"2천 원이지."
하루 세끼 챙기기도 버거운 형편.
무료 점심을 주는 복지관이 고마워 음식은 절대 남기지 않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다 이렇게 말아 드세요? 왜 이렇게 드시는 거예요. 아버님?)
"먹기 좋잖아."
[임승자/김주삼 씨 부인]
"음식을 남기면 안 된대, 나는 반찬이 남는데 이 양반은 하나도 없어"
(아까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까워서. 그러니까 영양실조는 안 걸려. 하루에 한 끼를 이렇게 먹으니까."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건 평생 사치라 여겼습니다.
처음으로 비싼 돈 주고 사먹어 잊히지 않는 음식.
짜장면입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제일 비싼 거 드셔보신 게 뭐예요. 아버님?)
"짜장면이 제일 비싼 거죠."
오죽하면 부부를 감시하던 정보과 형사마저 안타까워할 정도였습니다.
[☎ ○○경찰서 전 정보관]
"98년부터 아마 제가 그때 담당할 때예요. 탈북자들이 그 양반만 있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양반도 있는데 보니까 그 양반이 제일 눈에 띄어서 자의로 넘어온 게 아니기 때문에 아는 사람만 알았고요. 너무 노출되면 또 안 되니까요. 엄청 고생하셨죠, 고생했습니다. 너무."
김 씨 부부에겐 몇 안되는 따뜻한 손길이 돼주기도 했습니다.
[☎ ○○경찰서 전 정보관]
(퇴직하셨는데도 와서 고기도 사주고 가시고 그러신다고)
"아이고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한 번 (했는데) 제가 조금 그 양반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했기 때문에 아마…"
네, 이렇게 국가는 감시만 했을 뿐 관심을 주진 않았습니다.
그럼 이 기구한 운명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나게 된 걸까요?
지난 2004년 제정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
북파 공작원들의 첩보 활동과 희생을 국가가 처음 인정한 법입니다.
[김낙순/당시 국회의원 (2006년 8월, 국회 법사위)]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특수임무를 수행했던 사람들과 그 유족에 대하여 실질적인 보상을 함으로써 그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담당 기관은 국방부장관 소속의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
위원회가 문을 연 2005년, 북파공작원 출신 오 모씨가 심의위원회에 보상금을 신청합니다.
〈스트레이트〉는 그 때 오 씨가 쓴 공적 내용을 확인해봤습니다.
"1954년 공군 첩보부대 백령도 파견대 공작원으로 입대했고, "1956년 9월경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에 침투해 남학생을 납치해 복귀했다"
"1958년 8월 새우젓 배 1척과 선원 9명을 납치했다"고 적었습니다.
바로 이 오 모씨가 황해도에 잠입해 중학생이었던 김주삼 씨를 납치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씨는 첩보 수집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보상금 1억 1천5백만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위원회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오씨의 납치 행위를 확인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남학생 납치 사건은 아예 조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오 씨가 납치한 남학생이 김주삼 씨였다는 것은 그로부터 7년 뒤, 아주 엉뚱한 곳에서 드러납니다.
지난 2012년.
또다른 북파공작원 출신 2명이 "1956년 가을, 황해도에서 남학생을 납치했다"며 보상금을 신청합니다.
이 때는 의심이 들었는지, 보상심의위원회가 사실 확인에 나섰는데요.
앞서 보상 신청을 했던 오 씨에게 추가 진술을 받으면서 납치당한 학생 이름이 '김주삼'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심지어 조사단은 직접 김주삼 씨 집도 찾아가 납치 과정에 대해 묻기까지 했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느닷없이 와서 국무총리실에서 왔다고. 그러니까 나야 뭐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 (잡혀 온) 얘기 다 했지 뭐"
(그때 잡혀 온 얘기를 다 하신 거예요?)
"그렇죠, 다 물어보고 가더라고"
[임승자/김주삼 씨 부인]
"컴퓨터인지 뭔지 그거 하나 갖고 나도 있고 이 양반 있는 데서 한번 왔다 갔어"
(그 사람은 아버님이 납치됐다는 걸 알고 있었겠네요. 그때?)
[김주삼/납치 피해자]
"그런가 봐."
김 씨와 같은 부대에 있었던 임중철씨도 증언했습니다.
[임중철/납치 당시 공군 수송대 근무]
(국무총리실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찾아온 거예요?)
"그렇지, 이 사람들이 찾아와서 주삼이 집에 갔는데 주삼이한테 ‘다른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니까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거든, 와서 주삼이한테 ‘어떻게 해서 왔느냐, 누가 잡아왔느냐’ 그런 걸 물어봐."
보상심의위원회는 1956년 김주삼 씨를 납치해 온 건 오 씨라고 결론냈습니다.
당연히 다른 북파공작원 2명은 거짓 공적으로 보상금을 받으려 했던 거란게 탄로났죠.
하지만 위원회가 한 일,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북파공작원 공적만 확인하고, 납치 피해자 김 씨는 그냥 방치한 겁니다.
[이강혁/변호사 (김주삼 씨 법률대리인)]
"김주삼 씨라는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국가가 먼저 해야 할 것은 피해자에 대한 아픔을 치유하는 문제, 보상 이런 것들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마 이의를 달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겁니다."
왜 그랬는지 보상심의위원회에 물어보니 담당 업무가 아니었다는 기계적인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국방부 보상심의위원회 관계자]
"(북파공작원 오모 씨가) 김주삼 씨를 납치한 대가로 (보상금을) 받은 게 아니고, 따로 새우젓 (배 납치) 그거, 이거는 이제 어떤 공작 임무겠죠?"
(그럼 민간인 납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면?)
"그건 저희의 어떤 소관 업무가 아니죠, 그거에 대해서는 저희가 다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12년간 특수임무수행자와 유가족들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2천200억원 가까이 되는데요.
2천448명이 받아갔으니 보통 1억원 안팎으로 지급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돈, 제대로 지급되고 있을까요?
김주삼 씨를 납치했다고 한 북파공작원 2명의 경우를 보면요.
이미 보상금을 받은 오 모씨나 김주삼 씨 본인의 진술이 없었다면 그대로 공적을 인정받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위원회는 누구에게, 무슨 공적을 근거로, 보상금을 얼마씩 지급했는지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 국방부 보상심의위원회 관계자]
(세금으로 지급하시는 거 아니에요?)
"네, 저희가 국가로부터 이제, 네, 세금…"
(그럼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국민이 알 수 없는 거예요?)
"네, 저희 쪽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지가 불가능합니다."
특히 남북간 납치가 빈번했던 당시 상황으로 미뤄볼 때 김주삼 씨처럼 북파공작원들의 공적서엔 피해자에 대한 정보도 담겨있을 가능성이 높은데요 .
이 역시 공개 불가입니다.
[홍익표/더불어민주당 의원]
"실제로 이미 2008년도에 관련 북파공작원에 대한 보상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했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자기(국방부)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외면하고 있는 것은 정직하지도 않고 과거의 잘못된 인권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의지도 없다 이렇게 보입니다."
김주삼 씨는 납치된지 60년이 지난 2020년 2월에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그때 왔을 적에는 ‘3년만 있으면 갈 거다’ 생각하고, ‘통일될 거다’ 생각하고 있었지 이렇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어?"
그러나 소송 비용 마련부터 정부의 자료 비협조, 지지부진한 재판까지 산 넘어 산입니다.
[이강혁/변호사 (김주삼 씨 법률대리인)]
"비밀공작들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또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부분도 있고 했습니다만,'사실조회 신청' 이런 거를 보내서 (북한 주민 납치) 관련된 공적으로 상을 받은 것, 인정을 받은 사람은 혹시 없는가라든가 이런 걸 계속 질의를 했거든요. 근데 '못 찾겠다', '없다', '알려줄 수가 없다'… 조직 차원에서 의지가 없는 문제 때문이겠죠."
재판이 멈춰 있는 사이, 최근 진실화해위원회가 먼저 판단을 내렸는데요.
김주삼씨 사건을 명백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침해'로 규정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김주삼씨를 북한에서 납치된 민간인 첫 사례로 공식 인정한 겁니다.
그러면서 '신청인에 대한 사과와 피해회복 조치', '북한 가족과의 상봉 기회 제공이 필요하다'는 권고도 남겼습니다.
[정영훈/진실화해위 조사2국장]
"국가적인 입장에서 이산가족의 상봉의 기회를 애초에 봉쇄했겠죠. 이게 드러나면 국가의 치부가 드러나는 거잖아요. 지금이라도 기본적인, 인간적인, 인도적인 그런 어떤 기회는 제공돼야 하는 거 아닌가."
저희는 김주삼 씨에게 고향 땅의 위성 지도를 찾아 보여드렸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움푹 패여 있는 골짜기.
촘촘하게 들어선 주택과 논, 밭, 텅빈 공터.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세히 보게 된 고향 풍경에 눈가가 금세 젖어듭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지도는) 보실 생각을 못 하셨던 거예요?)
"그렇죠, 몰랐죠. 아휴 큰 거도 가져왔네, 척 보니까 알잖아, 여기야 우리 집이 여기, 조그맣게 이제 움막식으로 지어놓고 살았지. 가까워 여기서"
하지만 이미 절망에 익숙해진 노인에게 희망은 품기조차 두려운 듯 했습니다.
[김주삼/납치 피해자]
(가족들도 한번 뵙고, (고향) 가보면 너무 좋으실 것 같죠.)
"아유 얼마나 좋아, 한 번 보고 죽었으면 되는데 그게, 그게 안 되잖아."
(왜 안된다고 생각하세요, 될 수 있어요. 아버님)
"만나볼 수가 없지, 어떻게 해서 만나, (이산가족 상봉) 그 신청도 못 했어 우리는, 나 이렇게 된 사람인데 어떻게 신청해."
어디엔가 제2, 제3의 또다른 김주삼이 있을겁니다.
이들에게도 국가는 '대한민국'입니다.
5시 뉴스
서유정
[스트레이트] 북파공작원에 납치된 북한 소년‥ 남한 정부에 버림 받은 통한의 66년
[스트레이트] 북파공작원에 납치된 북한 소년‥ 남한 정부에 버림 받은 통한의 66년
입력 2022-09-04 20:53 |
수정 2022-09-04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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