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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4·3'과 빼앗긴 '이름'

[스트레이트] '4·3'과 빼앗긴 '이름'
입력 2026-03-22 20:56 | 수정 2026-03-22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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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그리고 '내 이름은'

    촌스러운 이름을 바꾸고 싶은 고등학생 아들 '영옥'과, 절대 그 이름을 버릴 수 없는 엄마 '정순'.

    "왜 남자아이 이름을 영옥이라고 지으셨어요?"

    영화는 어린 시절의 충격에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엄마가 이름에 얽힌 비극적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제주 4·3.

    오랜 시간, 입 밖에 꺼낼 수조차 없었던 이 비극을 소재로 한 영화 [내 이름은].

    지난달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자, "비극적 역사가 남긴 트라우마를 세대를 넘어 섬세하게 비추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울림을 줬다"는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다리우스 샤히디파어/관객]
    "한국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과거죠. 이 영화도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매우 좋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의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상처의 치유를 모색합니다.

    [정지영/감독]
    "저는 이 영화를 4.3을 찾아가는 영화라고 생각을 해요. '4.3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이 영화에서 규명하는 것이 아니고, '4.3이 어떤 거지?'하고 찾아가서 '아, 이런 거야? 그럼 더 알아야겠다' 이것이 이 영화의 목적입니다."

    ◀ 김정인 기자 ▶

    해방 직후 수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학살된 제주 4·3.

    이 비극적인 국가폭력은 살아남은 이들의 삶마저도 송두리째 흔들어 놨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뿌리를 지키지 못한 채 살아야 했는데요.

    가족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고도 그 사실조차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름까지 잃어버려야 했던 사연을 직접 들어봤습니다.

    ■ 빼앗긴 '이름'들

    4·3 당시, 열다섯 소년이었던 김명원 할아버지.

    아흔세 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날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명원/제주 4·3 유족]
    "창고가, 관사 되어 있는 여기, 이제 창고였어요. 창고였고 이 안에 이제 한 5, 60명 되는 인원이 이 안에 감금이 돼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진압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머지 가족들도 동네 초등학교에 감금됐고, 이튿날 진압군은 어머니마저 끌고 나갔습니다.

    어머니 품에 있던 갓난아기를 억지로 떼어냈습니다.

    [김명원/제주 4·3 유족]
    "군인들이 그 애를 어머니 품에서 빼가지고, 발 두 개를 이렇게 들고 나한테 던져주더라고 애를. 그 핏덩이를. 어머니가 하는 얘기가, 계속 아기를 보고 날 보고 울면서 '아기는 살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살 때까지는 데리고 있어라' 이래 놓고 이제 어머니는 나가 가지고 한 15분쯤 되니까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요."

    태어난 지 보름 남짓했던 막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명원/제주 4·3 유족]
    "어머님(유해)을 찾았으면 모르겠는데 찾지를 못했어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합장묘에…"

    한 순간에 부모와 막내 동생까지 잃은 그는 남겨진 세 동생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끼니라도 챙겨 먹길 바라며 어린 여동생을 다른 집에 맡겼는데, 그 집의 호적에 올라가면서 동생의 성도 바뀌게 됐습니다.

    남매는 남이 돼 버렸고, 되돌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김명원/제주 4·3 유족]
    "내가 참 그 호적을 미리미리 못 본 게 내가 잘못이 있죠. '김씨 성을 가진 나를 정씨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나를 원망하는 거죠."

    본인도 4·3 당시 총상을 입었지만, 총에 맞은 그 상처보다 동생을 동생으로 지켜주지 못했던 죄책감이 더 큰 고통으로 남았습니다.

    "어머니 나 누군지 알겠어요? 나 누구예요? 나 정희예요. 나 딸…"

    4·3 당시 진압군에 의해 남편을 잃은 엄마.

    엄마는 정희 씨를 뱃속에 품은 채로 총까지 맞았지만, 다행히 모녀는 살아남았습니다.

    아버지 사망 신고를 한 이후에 정희 씨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가상의 인물인 다른 아들 호적을 만들어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했고, 손녀인 정희 씨를 호적에 올렸습니다.

    그렇게 정희 씨는 친아버지 '김 순'이 아닌 존재하지도 않았던 '김 홍'이라는 사람의 딸로 살았습니다.

    어머니 역시 누군지 모를 이름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김정희/제주 4·3 유족]
    "(사람들이) '허천베세기' 하고 산다고. 헛사람하고 산다고. 그 가짜 이름을 만드니까 얼마나 진짜 고통이 심했겠어요."

    가족관계를 바로잡아 진짜 남편의 이름을, 딸의 진짜 아버지 이름을 되찾아주는 게 어머니의 평생소원이었습니다.

    [김정희/제주 4·3 유족]
    "(가족관계가 정정된다면) 어머니가 진짜 마음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어머니가 젊을 때부터 그거 한이기 때문에…"

    혈육이 학살당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이름과 가족의 뿌리까지 잃어버린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바로잡을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빨갱이'란 무서운 낙인 속에 피해자들은 4·3을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1978년, 4·3의 실상을 다룬 최초의 대중적 소설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 작가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강요된 침묵 속에서 가족관계를 바로잡는 일은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김창범/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4·3으로 인해 가지고 제주 공동체가 송두리째 파괴됐잖아요. 어떤 물질적인 것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더욱더 중요한 것은 제주에 살고 있는 분들의 영혼 자체도 파괴된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지난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폭력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한 이후,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가족의 이름을 되찾을 기회가 열렸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소송을 통해 가족임을 확인받으려면 유전자 검사 등 증빙 자료를 제출해야 했는데,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문성윤/제주4·3유족회 고문 변호사]
    "무덤을 파서 이제 입증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현실적으로 이제 많이 생길 수는 없었습니다. (희생자분들)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정부는 지난 2023년 특별법을 개정해 소송 없이 정부 조사를 통해서도 가족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했지만, 진척 속도가 느린 탓에 지금까지 정정된 건 단 4건에 불과합니다.

    4·3으로 아버지가 숨진 뒤 작은아버지의 호적에 올라 있던 고계순 씨.

    오랜 기다림 끝에 아버지를 되찾았습니다.

    [고계순/제주 4·3 유족]
    "아빠… 할 도리 다 했으니까 훌륭한 딸이지요? 내가 이렇게 귀먹어 말 못 알아먹어 이렇게 해도 할 도리 다 했으니까… 사랑해요."

    내 이름을, 내 가족을 되찾는 일.

    끔찍했던 국가폭력의 부당함을 알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애순/제주 4·3 유족]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밝혀지지만 우리 아버지도 그래도 이 세상에 왔다 간, 그 젊은 청춘에 억울하게 가셨는데 호적이 만들어짐으로 해서 그래도 이런 사람이 여기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그게 있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접수된 가족관계 정정 신청은 5백여 건.

    신청자 대부분은 여든을 훌쩍 넘은 고령입니다.

    [문성윤/제주4·3유족회 고문 변호사]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 관계를 정리를 해야 그분들도 그동안 가슴에 쌓인 한을 조금이라도 풀고 돌아가실 거 아니겠습니까?"

    ***

    학살 트라우마를 겪는 엄마를 지키며, 그 역시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영옥'을 연기한 유준상 배우.

    [ 유준상/배우]
    "배우로서 항상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연기할 때 '내가 진짜 이런 상황이 된다면 어떤 마음일까?' 그렇게 됐을 때 느껴지는 그 감정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고…"

    4.3 피해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그들의 가족과 이름을 되찾는 일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길 희망하게 됐습니다.

    [유준상/배우]
    "며칠 동안 계속 그 4·3 관련된 장소를 다 찾아다녔고, 그냥 그런 곳에서 추모를 좀 하고 싶었어요. 끊임없이 결국 기억해 준다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엄마, 이제 엄마 이름으로 살아갑서."

    ◀ 김정인 기자 ▶

    4·3은 명백한 국가폭력이었지만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한 진압 책임자들은 과거 정부에서 각종 훈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특히 지난해, 4·3 강경 진압을 주도했던 박진경 대령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족들이 거세게 반발했는데요.

    4·3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지 12년이 흘렀지만 진상규명을 위해선 아직도 갈 길이 먼 상황입니다.

    ■ 갈 길 먼 '책임' 규명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 붉은 섬으로 규정한 미군정이 진압 책임자로 내려보낸 인물.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9연대장에 임명된 박진경 중령은, 남로당을 색출하겠다며 무차별 토벌 작전을 주도했습니다.

    부임 한 달여 만에 대령으로 초고속 승진했지만, 그의 강경 진압에 반대했던 부하 군인들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당시 박진경 대령을 살해한 부하들에 대한 재판에선, "박 대령이 조선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또 박 대령이 '양민 여부를 막론하고 도피하는 자는 3회 정지 명령에 불응하면 총살하라고 명령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과거 정부에서 박 대령에 대한 예우는 극진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무공훈장을 수여했고, 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제주도엔 추도비가 남아 있고, 경남 남해엔 그의 동상까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2.3 내란을 극복하고 출범한 이재명 정부에서 보훈부가 박진경 대령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현행법상 과거 무공훈장을 받았을 경우, 후손이 신청하면 국가유공자로 지정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4·3 유족들은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백경진/제주 4·3 범국민위원회 이사장 (2025년 12월 12일)]
    "어떻게 국민 주권 정부 이름으로 박진경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할 수 있습니까?"

    논란이 커지자 대통령이 나서서 재검토를 지시했고, 보훈부는 절차상 하자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 등록의 근거가 됐다는 무공훈장 자체도 잘못됐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이재명 대통령 (2025년 12월 18일)]
    "이분이 48년에 사망했는데 6·25 참전 유공자로 훈장을 받았다는 게 팩트예요?"

    [이두희/국방부 차관 (2025년 12월 18일)]
    "6·25라는 것은 아니고, 국가안전보장과 전몰장병에 대한 훈장으로…"

    [이재명 대통령 (2025년 12월 18일)]
    "6·25로 특정된 건 아니다?"

    [이두희/국방부 차관 (2025년 12월 18일)]
    "그렇습니다. 특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런지 국가기록원을 찾아가 봤습니다.

    1950년 생산된 '6·25 을지무공훈장' 기록.

    '박진경'이란 이름이 적시돼 있습니다.

    또 다른 문건에서도 박 대령의 공적 요지에 '6·25 참전 유공'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1948년에 사망했는데도 2년 뒤 발발한 6·25 참천 무공훈장을 받은 겁니다.

    주무부처인 국방부는 참전유공자법상 6·25의 범주를 1948년 8월 15일 이후부터로 간주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박진경 대령의 사망 시점은 이보다 두 달 빠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훈부 장관은 무공훈장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사실상 어렵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권오을/국가보훈부 장관 (3월 13일)]
    "고민을 했습니다. 그 문제는 일단 덮자. 덮고. 그게 취소 다 돼버리면 국립묘지 묻힌 것을 다 파묘를 해야 합니다."

    [양성주/제주4·3희생자유족회 부회장 (3월 13일)]
    "그것을 덮자 말자, 화해하자는 것은 저희들이 판단하겠습니다. 그걸 왜 국가에서 덮자고 말씀하십니까."

    1948년 계엄령 선포 이후 제주에 투입돼 민간인을 대량 살상한 조선경비대 2연대.

    그 책임자는 연대장이었던 함병선 대령이었습니다.

    김명원 할아버지의 어머니 등 동네 주민 80여 명을 초등학교에 몰아넣고 학살한 것도, 함병선이 이끈 2연대였습니다.

    [김명원/제주 4·3 유족]
    "어린아이고 할머니, 할아버지고 할 거 없이 그대로 데리고 가가지고 한 구덩이에서 매장시켜버렸어요. 총살시켜 가지고…"

    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너븐숭이' 학살 역시, 2연대의 소행이었습니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본격적인 학살은 함병선이가 내려와서 훨씬 더 이제 잔인한 학살이 시작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학살이 제주도 북촌에 가면 '너븐숭이 학살'이라고 있죠. 우리 현기영 선생, <순이 삼촌>의 모델이 됐었던 그 학살도 바로 이제 함병선 부대가 들어온 다음에 일어난 거죠."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제주도에 세워진 공적비에 새겨져 있고, 그는 국립현충원에 묻혔습니다.

    공적비의 문구 하나하나에 유족들의 가슴은 미어집니다.

    [김종민/전 4·3 평화재단 이사장]
    "'한라산이 비록 높으나 장군의 공적보단 낮고 남해가 비록 깊으나 장군의 혜택보다는 낮도다. 옅도다' '한라산이 무너지고 남해가 마르도록 장군을 기념하리로다' 기가 막히죠. 이러한 공적비를 세워서 찬양을 한다는 거? 아직도?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군과 경찰은 물론 우익단체 서북청년단까지 가세하면서 최소 3만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됐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해 그 누구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죽은 사람은 수두룩한데 죽인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들(민간인 학살 책임자)의 이름을 불러줘야 합니다."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우리는 희생자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아직도 적지 않은 이들이 4·3을 공산폭동으로 매도하며 유족들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정지영/감독]
    "4·3 기록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했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국민의 많은 수가 4·3을 '이름만 들었어', 혹은 '4·3 이런 사건이 있었대' 이렇게만 알고 있어요. 조금 더 깊이 넓게 공유하고 토론하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미래를 향한 어떤 발돋움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민간인 학살 책임소재를 밝혀내고 명명백백하게 역사에 기록해야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지적에 우리 사회가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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