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강균]
"지난주에 이어서, 지난 1978년에 발생했던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납치 실화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 북한 체제의 숨은 이면들을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은영]
"신상옥, 최은희 아들의 부부이신 신정균 감독님 그리고 안찬일 박사님 두 분 함께 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신강균]
"안녕하십니까?"
[신정균]
"안녕하세요?"
[구은영]
"두 분이 1978년에 납치가 돼서 8년 만인 1985년에 탈출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두 분이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가 17편에 이른다고 하는데. 꽤 많은 영화를 제작하셨네요? 감독님?"
[신정균]
"아마, 더 만드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저희 아버님은 식사만 하시면 바로 영화.. 영화 만드는 것만 좋아하시니까. 이제 뭐.."
[신강균]
"8년 동안에, 17편이나 만들었으면 작은 양은 아닌데요?"
[신정균]
"아니요, 8년이 아니고. 2년. 2년 거의 7개월 동안에. 17편을 만들었습니다."
[신강균]
"그렇습니까?"
[신정균]
"직접 감독하신 게 7편이고. 연출, 제작, 지도를 하신 게 10여 편 되시고요."
[신정균]
"아버님 말씀은 딱 한 가지는 만족하셨죠. 돈 걱정 안 하고 영화 찍어서 그거는 좋았다고 그거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신강균]
"그래서 그런 제작비의 부담이 없이. 큰 대작을 만드신 영화가 있다면 특별히 뽑는 영화가 있으시던가요?"
[신정균]
"일단. 모스코바 영화제에서 저희 어머니께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소금이라든가."
[신강균]
"소금."
[신정균]
"네, 또 탈출기라는 작품. 그것도 어머니께서 출현하신 영화인데. 그런 부분들이 모프신이라고 그러죠? 엑스트라 많이 나오고.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강풍 기를 돌릴 때 산에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몇백 명 도망가는 거를 찍으려니까, 바람이 살지 않으니까. 김정일이하고 통화하면서 이거 애로사항을 이야기하니까 바로 그 다음 날 헬기가 와서 위에서 그냥,"
[신강균]
"바람을 일으킨 거예요?"
[신정균]
"바람을 일으켜주고."
[신강균]
"굉장히 실감 났겠어요?"
[신정균]
"그런 부분들이 이제,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만족해하신 거죠."
[신강균]
"오히려 김정일 위원장이 영화를 좋아하는 상태에서 신 감독 부부가 들어가서 영화를 부흥시킨. 그런 결과가 됐겠군요?"
[신정균]
"그렇죠. 북한에서는 영화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이 없었고요. 그다음에 멜로드라마 같은 게 없었죠. 다, 체제 홍보 형 영화니까. 그다음에 특이한 거는 뭐냐면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이외에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거를 원하지 않는 거죠. 우상화니까."
[신강균]
"네."
[신정균]
"그래서 영화에도 감독 누구. 출현 누구. 이런 자막이 없었답니다. 그거를 이제 아버지께서 이거는 그 영화에 출현한 사람, 만든 사람들의 책임을 지워주기 위해서 올리는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을 넣어야 된다. 해서 배우와 스텝들 이름을 올리게 됐고요. 영화, 북한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을 많이 하고 오셨죠."
[신강균]
"그러면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해서 만든 영화를 김정일 위원장이 보고. 상당히 만족을 했었던 모양이죠?"
[신정균]
"아버지입장에서는 김정일의 칭찬이 목적이 아니고. 자꾸 잘 만들어야지. 처음에 북한에서만 영화를 만들게 허락이 되어 있다가. 상도 받고 하니까. 동유럽 가서도 영화 찍고 모스크바라든가 헝가리라든가. 가서 찍고. 거기서도 영화를 잘 만드니. 중립국까지 가게 해줬고. 물론 이제 감시원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립국에 갔기 때문에, 탈출을."
[신강균]
"탈출을 할 수.."
[신정균]
"감행할 수게 있었던 거죠."
[구은영]
"지금의 북한영화를 보면 김 부자 찬양 일색. 그리고 대부분 체제 선전을 위한 내용들이 가득한데요. 그 당시, 고 신상옥 감독님은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우셨나요?"
[신정균]
"그러니까 김정일이는 무조건 다 만드시라고 했지만. 아버지께서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스스로 이제 울타리를 만들어 놓으신 거죠. 예를 들면 자유세계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여기는 북한이니까 이거까지는 안 되라고 이제 틀을 만들어 놓으시고. 한국에서 영화 찍을 때보다는 조금, 영혼이 없는 영화라는 말씀을 좀 많이 하셨죠. 나름대로 눈치를 보신 거니까."
[신강균]
"두 분이 납치됐을 때 북한 당국이 제일 먼저 했던 것은 이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씨에 대한 세뇌공작. 세뇌작업. 이었다, 라고 하는데. 그 실화가 이번에 다큐멘터리 영화에 녹여져 있죠?"
[신정균]
"네. 여러 가지 세뇌 교육하는 것들은. 이제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가 집중적으로 많이 받으셨고. 아버지는 이제 수용소에 가셔서 이제 엄청 많이 받으셨죠."
[신강균]
"세뇌 공작을 했다, 라는 증언도 나오는데요."
[신정균]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찬양의 편지를 쓰게 하셨고 또 추석 때나, 아 김일성 생일 때가 제일 힘드셨대요. 편지를 써야 되는데 이 세상에 있는 찬양할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다 써야 된다고 합니다. 김일성 **그래서 그런 식이었고 아버지는 이제 **에서 탈출을 하시다가 잡혀서 수용소를 가시다 보니까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처럼 그런 주입식이 아니라 고문과 이런 것들을 많이 해서 귀도 너무 많이 맞아서 귀 고막도 나가시고 그러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신강균]
"안 박사님 그 신 감독의 저런 증언이 공감이 갑니까?"
[안찬일]
"아 그렇죠. 뭐 아마 북한의 어떤 정치범수용소 직접 경험하셨겠지만 거의 뭐 아우슈비츠수용소를 능가하니까 일단 아우슈비츠수용소는 거의 다 죽어나오지만 북한의 수용소도 웬만한 사람은 다 죽어나오는데 아마 신 감독님은 이제 활용해야 될 분이니까 죽일 수는 없었겠지만 그분이 그렇게 거기를 끔찍한 장소로 기억한다는 것은 다른 북한 보통 주민들, 보통 정치범들이 어떤 고문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지를 아마 세상에 알린 최초의 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강균]
"네. 김정일위원장으로서는 그렇게 영화가 좋고 그래서 신 감독이 그렇게 존경스럽고 해서 북한으로 간 게 월북까지 시켜서 데려갔는데 저렇게 고문을 하거나 대우를 나쁘게 해주면 오히려 반감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을 했을 법한데."
[안찬일]
"아니 그러니까 탈북을 거기서 시도 안 했으면 그냥 영화를 순탄하게, 이분은 북한에 가보니까 너무 끔찍해서 그 지역을 벗어나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걷고 걸어서 이제 국경을 향해서 탈북하려고 뭐 휴전선으로 넘어오겠습니까? 바다로 가겠습니까? 그래서 걸어서 걸어서 북한을 탈출하려다가 그만 체포됐고 체포된 다음에도 이분이 그냥 고분고분했으면 모르는데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으니까 아 수용소에 잡아넣어서 생각을 바꾸게 한 다음에 영화를 찍게 해야 되겠다. 그래서 이제 수용소에 갖다 가두게 된 거죠."
[구은영]
"네. 그럼 5년 동안 신상옥 감독님은 수용소 생활을 계속 하신 건가요?"
[신정균]
"아니죠. 처음 이제 납북되셔서는 어머니하고 같은 케이스로 초대소로 가셨는데 거기서 탈출을 시도하시다가 잡히셔 가지고 한 번은 거기서 그냥 훈계로 끝난 모양이더라고요. 근데 두 번째는 거의 국경까지 가셨다가 잡히셨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제 수용소로 가서 거의, 그러니까 거의 5년이죠. 초대소에서 생활은 잠깐이셨고 이제 바로 탈출 시도하시다가 잡혀갔으니까 5년 동안 수용소에 계셨죠."
[안찬일]
"김정은의 영화 예술론의 핵심 소위 종자론이라는 겁니다. 종자론은 이 영화나 이 작품의 종자는 충성심, 개인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뭐 이런 신 감독님의 영화가 북한에서 상당히 그 인기를 누린 것은 그 사상 예술성으로부터 좀 떨어져서 휴머니즘과 가까웠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느슨해졌을 뿐이고 그 안에도 혁명적 종자론은 존재했다는 것이죠."
[신강균]
"네, 불가피하게 그걸 넣을 수밖에 없는."
[안찬일]
"그렇죠. 그래서 그분들은 그걸 묘하게 피해가면서 이제 영화를 만드셨지만 그런 영화를 계속 만들 수는 없다. 거길 벗어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결국 목숨을 걸고 탈출한 결과라고 봅니다."
[구은영]
"네, 북한에 납치된 지 8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는데요. 그 당시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의 탈출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신정균]
"북한에 계신 걸 알았을 때 심정은 돌아가시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영원히 못 만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탈출했다고 그러니까 이건 너무 꿈만 같은 얘기고, 신문 기자가 와서 탈출했다고 인터뷰를 하는데 저는 맨 처음에 놀리는 줄 알았어요."
[구은영]
"네, 당시 두 분의 긴박했던 탈출 과정이 영화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신강균]
"네, 두 분이 영화 제작차 오스트리아 빈에 갔다가 탈출한 것인데요. 그전에 미국 정보부하고 이미 탈출에 관한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죠?"
[신정균]
"네, 아버님 친구 분을 통해서 미국에다가 타진했죠. 탈출을 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탈출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냐, 그래서 미국에서는 아버지께서 어디로 탈출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유럽에 각 대사나 영사관에다가 지침은 내려놨죠. 누구든지 동양인이 들어왔을 때는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이제 그걸 해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구은영]
"네, 그렇게 두 분이 북한에서 탈출해서 선택한 곳이 바로 미국인데요. 미국에서 생활하실 때 혹시 북한으로부터 어떤 위협을 받거나 그러진 않았습니까?"
[신정균]
"일단 저희 어머님한테는 새로운 습관이나, 습관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생긴 게 일단 창문에 커튼은 꼭 닫으시는 버릇이 있었고요. 또 집에서 뜻하지 않게 쿵 소리가 났을 때는 아버님 같은 경우는 책을 보시다가도 후떡 놀라시는 그런 상황이 몇 년 가셨어요. 항상 불안하고 또 사람들 없는데 인적 없는데, 가시는 거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셨고요. 굉장히."
[신강균]
"심리적으로 계속 불안하셨겠어요."
[신정균]
"처음에는 굉장히 불안해하시고 그러셨어요."
[신강균]
"네, 신정균 감독님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많은 사람한테 보여 질 때 신상옥 감독님과 최은희 씨가 이 영화를 통해서 대한민국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정균]
"아, 그 메시지라고 뭐 거창하게 말씀드릴 것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저희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남한과 북한과 미국에서 다 영화를 만드신 유일하신 분이시고요. 그런 분이 이제 북한에 납북이 되고 탈출을 하시고 바로 한국으로 안 오시고 미국으로 가고 한 이런 그 당시의 그, 상황이 남북의 상황들이 녹록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북한이라는 곳은 남한보다는 훨씬 더 뒤떨어지고 더 심하고 낙후돼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자유라는 것이 자유라는 말조차도 쓸 수가 없으니까요."
[신강균]
"자유라는 단어가 어색할 것 같아요."
[신정균]
"예, 그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이 영화를 봄으로 인해서 김정일은 이제 죽었지만 김정일이나 김정은이나 북한에 대한 실상을 좀 아시고 또 소문에 의해서 자꾸 신상옥 감독이 납북됐다는 이야기는 좀 그만 하셨으면 좋겠고 여러 가지 그런 겁니다."
[신강균]
"네, 지난 시간에 이어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납북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에 관해서 얘기 나눠 봤습니다. 오늘 두 분 말씀 감사합니다."
통일전망대
북한은 왜? <신상옥 감독, 北 영화 개혁>
북한은 왜? <신상옥 감독, 北 영화 개혁>
입력 2016-10-17 17:00 |
수정 2016-10-1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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