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필국 앵커 ▶
북한 청년들이 요즘 힘든 곳에서 일하는 걸 자원하고 있다는 소식, 앞에서 잠깐 살펴봤는데요. 저는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게 염전으로 간다는 겁니다.
◀ 차미연 앵커 ▶
그렇죠. 북한 청년들은 도대체 왜 그 힘들다는 염전으로 가고 있을까요? 궁금증을 풀어줄 두 분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조충희/김영희 ▶
안녕하세요?
◀ 김필국 앵커 ▶
이 무더위에 대규모 인력이 하고 많은 곳 중에 염전으로 가고 있다. 다소 의외입니다.
◀ 차미연 앵커 ▶
그렇습니다.
[조선중앙TV]
"남포시의 많은 근로 청년들과 고급중학교 졸업생들이 제염부문으로 진출했습니다."
◀ 차미연 앵커 ▶
고급중학교 졸업생이면 어느 정도 되는 건가요?
◀ 조충희 ▶
남한으로 치면 고등학교 한 2학년 정도. 16, 17살인데 북쪽에서는 이제 법적으로 만 17살이 성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젊고 그런 동무들을 맡고 보니 정말 반갑고 대견합니다."
◀ 차미연 앵커 ▶
농촌이나 광산으로 탄원을 했다는 건 좀 이해가 됩니다. 산업적인 측면이나 식량적인 측면에서 중요할 테니까요. 그런데 염전은 좀 의외거든요. 왜 하필 염전인가요?
◀ 김영희 ▶
특히 소금이라는 게 너무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걸 확보하기 위해서는 청년들밖에 할 수 있는 인력이 없거든요. 나는 어려운 쪽으로 가겠다 하면 많은 청년들이 손 들고 나옵니다. 그게 또 대중 운동이 되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러면 전국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당국이 취하고 있는 대중 운동의 일환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조충희 ▶
북한에서는 원래 소금이라는 말의 의미를 작은 금처럼 그렇게 풀이를 하고 있거든요. 주민들의 식생활에서는 필수적인 물품이기도 하지만 화학 공업의 원료로써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염전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죠.
◀ 김필국 앵커 ▶
해방 직후만 해도 염전이 대부분 북한 쪽에 많이 있어서 오히려 남한이 소금이 부족했다 이렇게 들었는데요. 북한은 그런데 지금 왜 소금이 부족한 건가요?
◀ 조충희 ▶
북한이 소금을 정제하는 시절에 이제 일제 시기 때 만들어지고 60년대에 한 번 60년대 중후반에 현대화도 하고 좀 괜찮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는데 이게 세월도 지나가고 보니까 노후화가 됐고, 그다음에 특히 이제 90년대 이후에 자연 재해로 해서 많은 염전들이 다 파괴가 됐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전기 부족 이런 것들로 해서 사실 소금 생산량이 실제 수요에 비해서 그렇게 많이 오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소금 부족 현상이 일어나지 않겠나
◀ 김영희 ▶
생산 능력이 지금 북한이 70여 만 톤 정도 되거든요. 그런데 수요는 한 140여 만 톤 정도가 돼요. 그러니까 결국은 절반밖에 생산을 못 한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항상 소금이 역대적으로 소금이 부족해 왔어요.
◀ 차미연 앵커 ▶
우리를 생각해 보면 소금이 흔하기도 하지만 요새는 이 나트륨이 몸에 안 좋다고 해서.
◀ 김필국 앵커 ▶
저염식을 많이 하죠.
◀ 차미연 앵커 ▶
예, 그렇잖아요. 그렇게 많이 안 먹거든요. 그래서 소금이 귀하다, 그렇게 귀하다고 이야기하니까 좀 놀랍기도 하거든요. 남한에 오셔 가지고 어떠셨어요?
◀ 조충희 ▶
사실 저는 와서 짜게 먹지 말라고 해도 저는 아직도 짜게 먹거든요. 소금의 가짓수가 이렇게 많다는 것에 대해서 저도 많이 되게 놀랐고 그러니까 선택을 하기가 힘들어요. 어느 게 좋은지 몰라 가지고.
◀ 김영희 ▶
저는 일단 한국에 오니까 슈퍼에 가서 소금을 이렇게 사지 않습니까? 그런데 봉투에 500g짜리, 300g짜리 일단 규격 포장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국가가 공급할 때는 이만한 그릇을 들고 가면 푹푹 퍼서 줬지 그런 포장을 본 적이 없고요. 그런 데다가 이제처럼 짠 거 먹지 마라, 짠 거 먹지 마라 하는 게 그게 되게 신기했어요. 북한은 짠 걸 얻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하는데 여기는 짠 걸 먹지 말라고 하니까
◀ 김필국 앵커 ▶
지금이야 손쉽게 소금을 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도 소금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죠? 예전에는 소금 장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금 사세요"
"안 사요"
"싸게 드릴게요"
◀ 김필국 앵커 ▶
1988년에 방송된 전원일기인데요. 불과 33년 전이네요.
"비나 좀 피했다 가슈"
"아니 비오는 날에 소금 장사를 나와?"
◀ 차미연 앵커 ▶
비 오는 날에 소금 장사 나왔다고 일용 엄마한테 면박을 받습니다.
◀ 조충희 ▶
초짜네요. 저 뭐야. 비 올 때 소금 장사 나오면 소금 다 녹지 않습니까? 저거. 녹고 너무 더워도 안 되고
◀ 김필국 앵커 ▶
소금 때문에 전쟁을 한 나라도 있었고요. 고구려 건국했던 주몽을 다룬 드라마도 생각나는데요.
"이것이.. 이것이 소금 바위요."
"아씨! 소금이 맞습니다."
◀ 김필국 앵커 ▶
주몽이 소금을 구해오면서 백성들의 신임을 받고 왕이 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 차미연 앵커 ▶
갑자기 소금 이야기하다가 고구려 주몽까지 갔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아까 수요의 절반 정도만 공급된다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얼마나 구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 조충희 ▶
양덕고개를 넘는가, 안 넘는가에 따라서 소금이 값이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동해안 지역에는 기본적으로 소금이 잘 생산되지 않아서 양덕 고개를 넘어가면 함경도, 양강도 그다음에 함경북도 이런 쪽은 소금이 많이 부족하죠.
◀ 김필국 앵커 ▶
말씀 듣고 보니까 양덕 고개가 상당히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은데요. 왜 이렇게 지역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는 건가요?
◀ 김영희 ▶
동해에서는 일단 소금 생산이 안 되니까 그래서 서해에서 생산된 소금을 제염소에서 그쪽으로 공급을 해 줘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가려면 육로로 가든 아니면 뭐 철도로 가든 뭔가 운송을 통해서 가야겠죠. 90년대 이전에는 한 24시간 정도 갔어요. 그다음에 90년대 이후에는 2, 3일 어떤 때는 전기가 중간, 중간에 끊어지면서 보름, 한 달 이렇게도 가고 그러면 가다가 다 녹을 거예요, 아마. 운송 수단이 이게 되게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귀한 것이고요. 또 아까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생산량 자체가 적어요. 그 적은 것을 전국적으로 배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 차미연 앵커 ▶
그렇다면 북한이 소금 부족으로 인해서 겪는 어떤 문제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주민 생활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있나요?
◀ 김영희 ▶
북한의 주민들이 소금이 중요한 게 냉장, 냉동 이 시설이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 이런 데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 모든 여름에 나오는 야채는 다 절여야 하고 수산물도 다 절여야 하고 절인 명태, 절인 정어리, 절인 고등어 몽땅 절인 거였어요. 평생 살면서 절인 거 제일 많이 먹어봤던 것 같아요, 한국 오기 전까지. 먹고 사는 모든 반찬이라든가 이런 데 다 소금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소금이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가 없어요.
◀ 김필국 앵커 ▶
된장, 간장 같은 식품도 그렇고요. 우리 민족 전부 다 즐겨 먹는 김치도 그렇고요. 소금이 꼭 필요하잖아요.
◀ 조충희 ▶
제가 지방 관리국에서 일하면서 기초 식품의 제일 첫 번째 품목이 소금이거든요. 그때 온천 제염, 온천에 있는 광양만 제염소라든가 이런 데 나가서 술이라도 몇 병 가져다 주고 이렇게 해야 그래야 실어 가지고 와서 공급하던 그런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 차미연 앵커 ▶
북한 하면 자력갱생 아닙니까? 장 공장에서 장만 만든 게 아니에요. 직접 염장까지 만들었다는 북한 방송이 있습니다. 함께 보시죠. 이원 장 공장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소금이 부족하다 보니까 직접 이 공장 근처에 염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난 시기에 수백리 먼 곳에 가서 많은 소금을 실어가지고 와서 기초 식품을 생산하였는데 정말 에러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최근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도 생산하고 염도가 높은 짠물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 김필국 앵커 ▶
오죽 급했으면 직접 소금까지 만들어 쓸까 싶네요. 김정일 위원장이 동해 쪽에 염전을 만들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잖아요.
◀ 김영희 ▶
북한이 도로를 지금 금방 고속도 도로로 깔 수 없는 거고요. 그러다 보니 동해에서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동해에다가 제염소를 만드는 것이었죠.
◀ 김필국 앵커 ▶
이곳이 북한이 자랑하는 동해 원산 제염소입니다.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딘지 볼수록 희한합니다."
◀ 차미연 앵커 ▶
동해는 특성상 대규모 염전을 만들기가 쉽지가 않잖아요.
◀ 조충희 ▶
예, 동해는 갯벌이 없습니다. 이제 북쪽에서는 그거 보고 간석지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지금 원산 그 다음에 함경북도 어랑 이제 어대진 제염소 이런 것들. 그다음에 광명성 제염소 이런 것들을 만들어놨는데 실질적으로 이게 모래밭이에요. 소금이 남아야 하는데 증발되는 양보다 밑으로 스며드는 양이 많아 가지고 염전을 만드는 것 자체도 힘들고 그것을 그냥 계속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보존하는 것도 힘들고 사실 운영 자체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 차미연 앵커 ▶
사실 이 소금은 짠맛을 위해서도 쓰이지만 공업 원료로도 많이 쓰이잖아요. 나트륨이잖아요.
◀ 조충희 ▶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게 이제 베이킹소다죠. 빵이나 이제 과자 이런 데 부풀게 하는 데 쓰는. 그다음에 가성소다, 북한에서 기본적으로 재지 공업, 종이 하는데 펄프 만드는 데 가성소다 들어가야 하고요. 공업 원료로 소비하는 소금이 사실은 수요의 거의 한 70% 이상 차지하지 않을까 이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 김필국 앵커 ▶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산업 원료로도 중요하니까.
◀ 차미연 앵커 ▶
그렇죠.
◀ 김필국 앵커 ▶
북한이 특히 이렇게 소금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해결 방법은 여전히 주민들 노동력밖에 없다는 거죠.
[염전에 자원한 청년]
"저희 아버지도 제염공(염전 노동자)입니다. 정말 1960년대에 당의 부름을 받들고 산으로 바다로 개발지로 달려나가 위훈을 세우던 아버지 어머니들의 그 정신을 이제는 저를 비롯한 우리 차세대들이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차미연 앵커 ▶
여학생이 아버지 대를 잇겠다고 인터뷰를 했는데요.
◀ 조충희 ▶
북한이 소금의 필요성을 느끼고 소금을 대규모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게 60년대 말 70년대 초인데요. 이때 군대에서 제대 군인들을 집단 배치해서 제염소들을 다 꾸렸습니다. 그런데 60년대, 70년대 배치 받은 분들이 지금은 다 나이가 이제 나보다 형뻘이니까 이제 60대, 70대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세대 교체의 필요성이 나오는 겁니다. 워낙 저기 일하는 데가 힘들어 가지고
◀ 김필국 앵커 ▶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제 알 것 같기도 한데요. 그래도 그 힘든 일을 이렇게 청년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켜야 할까, 좀 안타까운데요.
◀ 조충희 ▶
세계적으로 지금 청년들이 정말 누릴 거 누리고 공부하면서 좋은 거 보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거 보면 사실 북한 청년들이 저렇게 힘든 데만 계속 나가는 거 보면 좀 마음이 아프거든요.
◀ 김영희 ▶
제가 한국에 와 있는 동안에 염전으로 갔다는 보도를 본 적이 없어요. 대북 제재가 지속되고 있고 코로나 19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은 경제에 올인하고 있는데 성과는 안 나지 하고 있으니 청년들을 그쪽으로 보내고 있고 북한은 그걸 보고 개미 작전이라고 하거든요. 노동력을 쫙 풀어서 해결하는 것. 그런데 한국은 기계 한 대가 가면 척척척척 다 해결을 해요. 저런 청년들도 비록 지금은 저렇게 가지만 우아하게 작업복 입고 단추 하나씩 누르면서 일하는 그런 날이 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 봅니다.
◀ 차미연 앵커 ▶
잠재력 무궁무진한 청년들을 노동력으로만 보는 현실이 좀 안타까운데요. 북한 주민들이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 김필국 앵커 ▶
소금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꼭 필요하지만 부족한 게 또 있다는데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도움 말씀 고맙습니다.
◀ 조충희/김영희 ▶
감사합니다.
통일전망대
북한 청년들이 염전으로 가는 이유
북한 청년들이 염전으로 가는 이유
입력 2021-08-14 07:48 |
수정 2021-08-1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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