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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전망대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현재 의미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현재 의미
입력 2021-10-30 07:34 | 수정 2021-10-30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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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필국 앵커 ▶

    노태우씨라고 하는게 맞냐,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고 하는게 맞냐?

    장례를 국가장으로 하는 게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

    전직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습니다.

    ◀ 차미연 앵커 ▶

    내란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을 만큼 역사적인 과오는 분명하지만 일각에선 재임 중 남북관계 개선에 디딤돌을 놨다는 등의 성과 또한 적지 않다고 평가합니다.

    ◀ 김필국 앵커 ▶

    냉전의 끝에서 추진했던 북방정책, 대결 일변도의 남북관계를 바꾸려는 시도는 어떻게 이어졌는지. 또 지금 시사하는 건 뭔지 오상연 기자가 살펴봤습니다.

    ◀ 리포트 ▶

    "이어서 소련팀입니다"

    160개국, 당시 역대 가장 많은 나라가 참가한 88 서울 올림픽은 전 세계에 탈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이 불참한 84년 LA 올림픽, 반대로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이 불참했던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서울올림픽이 12년만에 냉전으로 갈라진 동서 진영을 한자리에 모은 배경에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있었습니다.

    1988년 초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 씨는 공산권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고 남북 협력과 평화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대통령 취임사/1988년 2월]
    "이념과 체제가 다른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북방에의 이 외교적 통로는 또한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이후 발표된 7.7선언에서는 남북사이의 인적 경제적 교류, 국제사회에서의 남북협력을 넘어 북한이 한국의 우방인 미국 일본과 관계개선을 하는데 우리가 협조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대결 일변도였던 남북 관계는 상호 협력으로, 북한을 고립시키던 외교 역시 협력을 통한 개방 유도 전략으로 대전환 한겁니다.

    [박원곤/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7.7 선언 이후에 교차승인이 얘기되면서 핵심적으로 북한을 하나의 정통성있는 실체로 인정하게 되는 그런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 있죠."

    북방정책은 한반도 정세에 지각변동을 가져왔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던 소련, 한국전쟁에 참전해 우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던 중국과 잇따라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박원곤/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이제는 공산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됐었어요, 과거에 대한 아픈 상처와 적대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90년대 탈냉전이라는 큰 분위기가 한국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적대감보다는 호기심이 컸습니다."

    남북관계도 급물살을 탔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연형묵 북한 총리 접견/1991년]
    "반갑습니다, 1년 3개월 만인가요, 날씨가 좀 추워서 고생하시지 않으세요?"
    "아 좋습니다."

    남북 총리 사이의 고위급 회담이 이어지고, 현대 정주영, 대우 김우중 등 재벌 총수들이 북한을 방문해 경제협력을 논의하는가 하면 최초의 남북 교역이 시작됐습니다.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1989년)]
    "(북한과 논의할 문제는) 역시 금강산 개발 문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계의 많은 손님이 오셔도 불편이 없도록..."

    남북한이 스포츠 분야에서 코리아 단일팀을 구성한 것도 남북이 아리랑 주악에 맞춰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한 것도 이때 시작됐습니다.

    이 시기 남북관계에서의 가장 큰 성과로 꼽히는 것은 기본합의서입니다.

    3개 분야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는 남북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부분에서 관계 발전을 위한 구체적 조치들을 총망라했습니다.

    또 이 시기 불거지기 시작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핵사찰 등을 담당하는 핵통제공동위원회구성에 까지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임동원/고위급 회담 남측 대표(1991년)]
    "북측은 핵문제는 미국과 해결할 문제라고 해서 우리와의 협상을 거절해 왔습니다만 남북당사자가 해결원칙을 확립하는 대단히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남북)화해·협력 정책의 나름대로 기본 장전으로서 큰 역할, 토대가 됐다. 또 이것이 9.19 공동성명, 또 그리고 판문점 선언까지 그 정신이 이어왔다는 측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이끄는데서 토대가 아니겠냐..."

    이후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 국가가 되었고 남북관계는 이후 여러차례 정상회담도 하고 활발한 교류협력의 시대를 거쳤습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는 이루지 못했고, 북한의 핵능력은 고도화 되었으며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미국과 중국간에는 패권경쟁과 갈등이 격화돼 다시 세계가 냉전에 돌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30여년 전 북방정책이 꿈꾼 한반도의 미래는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제45주년 광복절 경축사/1990년]
    "나는 남북한간의 무력 사용의 포기 선언과 불가침 협정의 체결, 현재의 휴전(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와 또, 서울과 평양에 상호 상주대표부를 설치하는 문제 등 모든 문제에 관해 남북의 책임있는 당국자들이 논의할 때가 왔다고 확신합니다."

    '남북 무력 불사용'과 '불가침'은 여전히 불안하고,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은 커녕 그 입구인 '종전선언'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방정책이 해체하지 못한 한반도의 냉전구조는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해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통일전망대 오상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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