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통일전망대
기자이미지 이상현

70돌 맞은 '용초도 포로수용소'

70돌 맞은 '용초도 포로수용소'
입력 2022-06-25 07:53 | 수정 2022-07-02 07:58
재생목록
    ◀ 김필국 앵커 ▶

    6.25 전쟁 72주년을 맞아 생생 통일현장은 특별한 곳을 찾아가봤습니다.

    바로 거제도 옆에 있는 용호도란 이름의 조그마한 섬인데요.

    ◀ 차미연 앵커 ▶

    송환대상 북한군 포로들이 수용됐다가 나중엔 북에서 귀환한 국군포로들이 수용됐던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인데요, 이상현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19일.

    17만명으로 포화상태던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곳저곳에 최루탄이 투척됩니다.

    친공-반공 포로간에 갈등과 폭동이 끊이질않자 포로들을 분리수용하기 위한 작전이 펼쳐졌고, 분리된 북한 인민군 출신의 친공포로 8천여명은 미 군함에 태워져 물이 풍부했던 거제 인근 조그마한 섬, 용초도로 옮겨집니다.

    [전갑생/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탈출하기도 어려운 곳이고 그리고 관리하기 좀 쉬웠던 곳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용초도같은 작은 섬을 선택해서 활용하게 됐던거죠."

    미군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용초도에 분리수용된 친공포로들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 북한으로 송환됐고, 이들과 판문점에서 교환돼 귀환한 국군포로들이 대신 8개월간 용초도에 수용돼 사상검증과 재교육을 받게 됩니다.

    [전갑생/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적군수용소였던게 아군수용소로 바뀐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런 수용소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가 좀 더한다라고 볼 수 있고요."

    2018년 용호도로 이름이 바뀐 그 용초도의 포로수용소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는 경남 통영 앞바다.

    그 섬들 사이로 갈매기를 벗 삼아 남쪽으로 한시간 가까이 배를 타고 가면 한산도를 지나 용호도 선착장에 도착합니다.

    "제가 이곳 용호도에 도착한 날짜가 6월 19일, 그러니까 이 섬에 포로수용소가 문을 연지 꼭 70년이 된 날입니다. 70주년을 맞은 포로수용소의 모습은 어떨지 한번 찾아가보겠습니다."

    70년전 포로수용소가 들어섰던 용호도의 용초마을.

    포로수용소 70주년인 날이었지만 조촐한 행사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한 분위기였는데요, 지금은 70여명, 대부분이 70대 이상의 노인들만 남았다는 마을 주민들에게 당시의 기억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김두진/용초마을 주민]
    "이야, 막 섬만한 배가 하나 와 이리 쭉 오더만은..그래가지고 조금 있으니까 "강제철거다 나가라"..우리집 저기 있으니까 나가라 나가라 했는데 안 나가니까 불을 놓더라고 (집) 밑에"

    그렇게 2년 가까이 쫓겨나 있던 주민들은 1954년 4월 수용소 폐쇄 이후 다시 돌아와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며 지금의 마을 모습을 만들게 됐는데요.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그 농경지 한켠에서 과거 수용소 건설 당시에 세워졌던 큼지막한 머릿돌이 우연히 발견됩니다.

    [정광문/용초마을 이장]
    "염소에게 (먹이를) 먹이다가 보니까 이런게 있으니까 글자가 있고 하니까 이게 뭐지 하면서 (당시) 이장님에게 알려가지고 그렇게 발견된거죠."

    풀속에 파묻힌채 '1952년 신설'이라는 여전히 선명한 글자와 함께 꿋꿋이 버티고 있던 용초 전쟁포로 수용소의 머릿돌.

    [정광문/용초마을 이장]
    "묻혀져 있는 것도 많고 발견된 것도 있고..지금 우리 마을에 보면 (유적들이) 요소요소 엄청 깔려 있으니까 구석구석에 많아요 지금"

    그 머릿돌을 뒤로 하고 수용소 건물 일부가 아직 남아있다는 곳을 찾아 깊은 산속으로 향해봤습니다.

    풀을 헤치며 인적이 끊긴 산길을 따라 들어가니 마치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지같은 풍경 속에 커다란 돌담 두개가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포로들이 먹고 자고 했던 수용동 건물의 입구였다고 합니다.

    [최재형/용초 포로수용소 복원추진위원장]
    "건물이 여기 한동 이 밑에 한동 똑같이 한동..그렇게 쭈르륵 내려갔어요."

    수용동 입구 돌담 안쪽으로 100명 정도의 침상이 놓여졌다는 자리는 이젠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70년 된 고목들의 차지가 돼 있었고요.

    당시 포로들이 곡식을 빻을때 사용했다던 시멘트 절구는 육중한 무게답게 땅속에 단단히 파묻힌채 7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박태공/용호도 주민]
    "이 밑에 막사를 굉장히 많이 지었어요..여기도 수십개 있었는데 우리 부모들 전답이거든 논이거든 논에다가 막 그 사람들이 지어가지고.."

    수용동 옆쪽엔 배수로가 파져 있었고, 그 배수로를 따라가면 포로들의 식수공급원으로 활용됐다는 저수지가 하나 나타납니다.

    지금은 주민들에 의해 민물새우 양식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는데요.

    미군과 한국군의 식수공급을 위해 별도로 만들어졌던 급수시설은 1960~70년대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고 합니다.

    [최재형/용초 포로수용소 복원추진위원장]
    "어릴때 형님들이 여기 와서 썰매를 타더라고요. (아, 놀이터였군요!) (그때는) 물이 자연적으로 찼다가 겨울에 얼어붙어서.."

    급수장 맞은편, 과거 포로수용소 사령부가 있던 곳 뒤쪽에선 다소 음습한 분위기의 건물 하나가 발견됩니다.

    농지로의 복구를 포기시킬만큼 견고하게 만들어져 오히려 파괴를 모면했다는 이 건물은 포로들의 감옥, 영창이었다는데요.

    이후 소를 키우는 축사로 활용되기도 했던 건물 곳곳엔 시설 완공일같은게 새겨져 있었고요.

    인근의 또다른 건물터에선 '인민군 만세' 등의 글자가 새겨진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최재형/용초 포로수용소 복원추진위원장]
    "시간이 갈수록 많이 방치되어지고 또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전쟁의 역사와 앞으로의 통일을 위해서 좀더 가치있는 섬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늦긴 했지만 최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며 둘레길 조성같은 정비계획이 추진중이라는 용초 포로수용소.

    6.25전쟁이 낳은, 그동안 묻혀지고 잊혀졌던 그 아픈 역사는 이제 평화의 중요성과 통일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공간으로 조금씩 깨어나고 있습니다.

    통일전망대 이상현입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