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 전, 지방의 소도시에서 갓난 아이를 넘기겠다는 미혼모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기를 자신이 없다며 50여일된 딸을 넘겼습니다. 아이 아빠는 임신사실을 알리자 연락이 두절됐다고 했습니다. 수치심에 가족과 친구들한테도 출산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모아둔 돈만 챙겨 연고가 없는 곳으로 몸을 풀러 왔다고 사정을 털어놨습니다.
뱃속 아기를 팔겠다며 나온 만삭의 엄마도 있었습니다. 판매 액수는 고작 50만원. 그녀는 산후조리원 비용까지 요구하는 다른 엄마들보다 조건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애를 낳는 즉시 데려가 직접 출생신고를 하면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조언도 덧붙였습니다. 역시 주위에 도움 받을 곳은 없다고 했습니다.
고립된 엄마들은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그해 서울의 한 교회가 운영하는 베이비박스에만 한해 2백50명이 넘는 신생아가 버려졌습니다. 취재진이 접촉한 신생아 매매 브로커는 뱃속에서부터 입도선매한 미신고 신생아들의 리스트를 성별, 혈액형에 따라 상품처럼 내놓았습니다. 여자 아이가 인기가 많다며 더 높은 가격을 불렀습니다. ▶ [단돈 100만원에 신생아 매매…태아까지 사고판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13/nwdesk/article/3390174_30357.html
10년 흘러 실태 밝혀진 미등록 아이… 2천명 넘게 사라졌다
이렇게 당국의 눈길을 피해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채 거래된 아이들은 쉽게 범죄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에도 음지에서 불법적으로 건네진 돌배기 아이가 방치되다 숨지는 일이 있는가 하면, 돈주고 데려온 신생아를 입원시켜 보험금 수천만 원을 타낸 매정한 양어머니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임신 도중 찾은 병원이나 보건소 단계에서 추적해 자동으로 출생 신고가 되도록 만들자는 대안이 나왔지만 반짝 관심이 사라지자 흐지부지 됐습니다.
그 뒤 10년이 지난 지난달 30일 아이 분만에 관여한 의료기관이 출생 사실을 국가에 통보하는 출생통보제가 드디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의료인에 부당한 행정 의무를 부과한다는 의료계 반대가 있었지만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보호받지 못하는, '그림자 아이'의 양산을 막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더 힘을 얻었습니다. 지난 8년간 2천2백명이 넘는 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후 경찰 수사로, 야산과 텃밭, 심지어 냉장고에서 숨진 아이들이 발견되는 참혹한 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왜 엄마들은 아이를 버렸나? "부모에게도 말 못한 수치심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어떤 이유로, 버려지고 죽임을 당하는 걸까. 원가정에서 보호받으며 자랄 수는 없는 걸까. 더 자세히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MBC 법조팀은 판결문을 활용해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최근 5년치 24개 영아살해 사건과 관련된 판결문 47건을 확보해 분석했습니다. 판결문에 등장한 24개 영아살해 사건 주범은 전원이 여성이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흔적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남성이 영아 살해의 공범이나 방조범으로 같이 처벌받은 경우는 4건 뿐이었습니다.판결문에서 확인되는 범행 동기는 '수치심, 부모에게 알릴 수 없다'는 심리적 이유가 16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또 '경제적 이유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다'는 것이 13건, 자신이 놓인 '환경적 여건상 정상적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이유가 11건으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종합해보면 예상치 못한 임신에 맞닥뜨린 여성이 사회적, 심리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위기 상태에서 제 아이를 죽이는 잘못된 선택에 빠져든 것으로 보입니다. 예기치 않은 임신, 준비되지 않은 출산을 겪는 이른바 '위기 임신부'들의 현실이 나타나는 부분입니다.살해 장소에서도 이들의 위기 상황이 잘 드러납니다. 범행 장소는 24건 중 집이 17건으로, 이 중 15건은 화장실 변기에서 아이를 숨지게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공공 화장실이 5건, 심지어 자동차나 길 위에서 아이를 낳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이는 영아 살해까지 이르는 경우, 병원에서 안전한 출산을 하는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뱃속 아이를 지울 수 있게 돕겠다던 낙태약 판매자는 출산 후 방법을 묻는 엄마들에게 "산에 묻으면 걸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변기에 다시 넣어야한다"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건넬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법대에서 마주한 재판관 역시 위기 임신 출산의 현실을 고려해 선처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미수범 공범을 포함한 27명 가운데, 절반 넘는 15명을 집행유예로 풀어줬습니다. 보호해야할 어린 생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로, 엄벌해야할 죄이지만 "예상 못한 출산에 따른 정신적 혼란"(15건), "수치심· 두려움을 느낀 상태"(3건)을 감안해야한다는 겁니다.
검사 출신의 오선희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부모가 아이를 죽이게 방관하고 대신 형량을 깎아주는 형태로 내버려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영아 살해를 선처하는 판결 속에서 역으로 위기 임신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를 짚어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 변호사는 "이제 부모 관점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법 체계와 지원 제도를 바꿀 때가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놓고 간 아이…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일각에서는 위기 임신 출산을 겪은 엄마들이 영아 살해와 매매, 유기의 유혹에서 벗어나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대안으로 '베이비박스'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실제 ‘그림자 아이’의 행방을 쫓고 있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상당수가 베이비박스에 유기됐던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베이비박스는 서울의 한 교회가 아이를 길거리에 버리려거든 이곳에 두고 가라며 10여년 전 설치했습니다. 베이비박스측은 아이들을 살리고 '보호'했다고 주장하나 법적으로는 영아 유기에 해당합니다. 설치 허가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베이비박스의 존재가 언론에 소개되면서 2010년 이후 많게는 한해 250여명의 신생아들이 이곳에 버려졌습니다.
이곳을 찾는 위기 임신 출산 가정을 마냥 처벌할 수도,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 없던 수사기관은 나름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두고 나서 베이비박스측과 상담을 했으면 입건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조치조차 없었다면 재판에 넘기는 식입니다. 실제 베이비박스와 관련된 최근 5년간 판결 14건을 확보해 살펴봤더니, 법원의 고민도 수사기관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간 친부모 등 16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실형은 징역 6개월 단 한 건 뿐이었습니다. 14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2019년 1월 새벽 아이를 낳은 아이를 수건으로 싼 채 경기도 군포의 베이비박스에 버리듯 유기해, 끝내 아이가 숨진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법원은 베이비박스에 유기하는 행동이 갓난아이의 생명에 위험을 초래한 범죄라면서도, "아이를 보호하고 돌보는 사람이 상주하는 베이비박스에 두고 갔다"거나 "짧은 시간내에 아이가 구조됐다", 또는 "담당자 상담을 거쳐 아이를 맡겼다"며 선처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린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이 11건으로 가장 많았고 "입양 절차가 복잡하다"가 3건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아이 부모에게 보육 지원이나 충분한 상담 서비스 등이 충분하게 제공될 경우, 아이가 친생 부모를 떠나지 않고도 양육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버려진 아이, 버린 엄마…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수사기관과 법원의 선처는 어디까지나 정책의 공백을 메우는 한시적 역할일 뿐입니다. 베이비박스측과 상담만 거치면 유기죄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진 상황에서, 유기 부모의 상담 절차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기능하냐는 의문도 제기됩니다. 또한 아동의 의사에 반하여 아동을 부모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금지한 유엔아동권리협약 위반이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비슷한 갈등을 겪어던 독일은 2014년 비밀 출산제를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익명 출산제도 도입 논의와 함께, 주요국 사례 중 하나로 소개된 제도입니다. 아이 엄마가 자신의 신원을 숨긴 채 출산을 할 수 있다는 내용에만 방점이 찍혀 알려졌지만, 독일에서 이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맥락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 여성가족청소년부가 지난해 발간한 설명 자료를 보면, 비밀출산제의 기반은 전국 깔린 임신 상담소와 전문 상담사들입니다. 시작은 1995년 개정된 임신 여성과 가족 지원법으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임신 초기부터 정부가 임신 갈등을 겪는 이들에게 상담을 제공하도록 근거를 마련한 건데, 이후 여러 단계를 거쳐 임신 12주내 중절 수술(낙태)이나 성교육, 피임 및 가족계획까지 임신 상담센터를 통해 받을 수 있도록 확대됐습니다. 대상도 독일의 모든 임신부와 여성으로 대폭 늘었고, 상담 단계에서부터 원한다면 익명으로 상담원을 만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제도의 문턱을 낮추는 한편 여성 전반에 대한 지원 체계의 일환으로 자리잡도록 한 겁니다.2014년 도입된 비밀출산제도 역시 임신 갈등을 겪는 여성에 대한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기존 임신상담센터를 통해 안내되도록 했습니다. 상담 과정에서 익명으로 아이를 낳는 비밀 출산이 가능하다는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반드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아이 엄마에게 알려야 합니다.
▲ 비밀 출생 절차와 법적 결과에 대한 정보
▲ 아이의 권리에 대한 정보: 어머니와 아버지의 배경을 알고 있는 것이 아이의 발달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 아버지의 권리에 대한 정보
▲ 입양 절차의 일반적인 단계와 완료 방법 설명하기
▲ 비밀 출생을 완료한 후 익명성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아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정보
목표는 결코 친생 부모로부터 떨어져 자라는 아이를 늘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비밀출산제에 따라 익명으로 아이를 낳고 친권을 포기할 경우 아이와 엄마, 그리고 친부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이해를 시키고, 그럼에도 익명 출산을 선택을 한다면 국가가 안전한 출산을 지원하겠다는 겁니다. 독일 정부는 이 비밀출산 상담의 최우선 목표는 "1)임산부에게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2)그녀가 자신의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설명합니다.
독일 '비밀출산제' 핵심은 "함께 살도록 돕는다"
판결문 분석에서 나타나듯, 위태로운 출산과 영아 살해, 영아 유기로 내몰리는 여성은 주로 사회적 심리적으로 고립된 위기 임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심리적, 경제적 이유가 선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24시간 긴급 상담 전화를 운영하며, 의료 시설 연계된 상담사가 즉각 대응하는 독일과 큰 차이를 보이는 현실입니다.
전문가들은 또 독일과 달리 위기 임신 지원에 대한 논의 없이 익명 출산제 도입만 우선될 경우, 미혼모에게 "왜 익명출산을 선택하지 않고 직접 아이를 키우냐"는 사회적 압력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김예원 변호사는 자신의 SNS에 "지금 상황에선 제대로 지원받으면 충분히 스스로 아기 키울 수 있는 친생부모가 쉽게 아기를 버릴 수 있는 부작용이 커 보인다"며 "자칫 '양육 회피 출산'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입양인 지원 시설인 '뿌리의집'을 운영해온 김도현 목사도 지금의 익명출산제 도입 논의에 대해 "성급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독일은 1천3백여개 임신위기센터가 임신 갈등을 겪는 이들을 돕고 병원 밖 출산을 포함한 보편적 출생 등록 제도가 완벽히 자리잡았다"며 "최후 대책이어야 할 익명 출산이 간편한 해결책으로 여겨져선 안된다"고 밝했습니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