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쯤, 뇌병변 장애인 친구에게 신촌역에서 '번개'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당장 신촌역에 타고 갈 차량이 없다는 겁니다. 지하철을 타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 친구는 신촌역 2호선이 너무 위험하다고 답했습니다. 예전에 신촌역에서 전동차를 타려다 승강장 사이 틈에 휠체어 바퀴가 빠져 큰 사고가 날 뻔 했다는 겁니다. 시민들의 발이라는 대중교통이 장애인들에겐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실감했습니다.
# 시끌벅적 장애인 이동권 문제‥그래서 무엇이 문제?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승하차 시위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시위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됐지만,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전장연을 직접 비판하며 장애인 혐오 논란을 만들면서 이슈가 커졌습니다.
지난달 29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전장연 측을 만나 지하철 승하차 시위 중단을 요청했고, 전장연은 이동권, 탈시설, 평생교육 등을 위한 장애인 권리예산에 대한 입장을 장애인의 날인 어제까지 달라며 시위를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인수위는 "장애인 권리예산에 대한 반영은 차기정부의 몫이고 인수위의 역할 밖"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동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정책을 발표했지만, 장애인 콜택시 및 저상버스 완료 시기나 시외-고속버스 도입 계획 등에서 미흡했다고 전장연은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시위 중단 20여일 만에 27번째 지하철 승하차 시위에 들어갔습니다.
비장애인들 중엔 장애인 이동권이 왜 문제인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침 장애인의 날이었던 어제 뇌병변 장애인 박지호 씨, 그리고 지호 씨의 활동보조인 김인호 씨와 함께 대중교통인 지하철, 버스, 택시를 이용해봤습니다.
#미로 같은 지하철‥10cm 틈에 매일 긴장
지호 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 안에 도착했습니다. 요금게이트를 찍고 통과하니 또 엘리베이터가 나옵니다. 이걸 타면 이제 승강장에 도착하나 싶었지만, 아니었습니다. 또 계단에 막혔습니다. 역사를 돌고 돌아 세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끝에 비로소 승강장에 도착했습니다.
활동보조인 김인호 씨는 "보통 만들어진 지 오래된 지하철 역에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지호 씨는 이게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종로3가역처럼 복잡한 환승역은 곳곳이 계단으로 막혀 있고 엘리베이터를 찾는 게 일입니다. 지호 씨와 함께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타려니 순간 긴장이 됐습니다.
저는 예전에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 오르는 과정은 끔찍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당시 승강장에 도착한 지하철에 오르려는 과정에서 앞에 달린 보조바퀴가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 틈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문을 닫는다'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오고, 언제 전동차가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력했고, 공포에 떨다가 주변 도움을 얻어 겨우 전동차에 올랐습니다. 그 이후로는 휠체어를 타지 않고 목발을 짚었습니다.
제겐 어쩌다 한번 생긴 경험이었다지만 지호 씨에겐 매일의 공포였습니다. 지호 씨는 1~4호선처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지하철은 유독 틈이 넓다고 말했습니다. 지호 씨의 지인 한 분도 틈 사이에 바퀴가 빠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근데 지인 분 덩치가 너무 크고, 휠체어 무게도 무거워서 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합니다.
지난 16일엔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이 지하철을 타려다 틈 사이로 다리가 빠지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한 달 전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지하철을 타려다 다리가 빠져 다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상인 공간이 장애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장애인 콜택시는 대기 시간 48분
어떤 분들은 장애인 전용 콜택시를 타면 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장애인을 위해 요금도 싸게 책정됐는데 굳이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지호 씨와 함께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대기 시간 48분'이라는 안내가 뜹니다. 택시호출앱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택시를 연결해도 기다리다 지치는데, 48분을 기다리려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결국 장애인 콜택시 이용을 포기했습니다.
2020년 기준 지자체가 운영하는 장애인 콜택시는 3,914대, 법정기준인 4,694대에 못 미쳤습니다. 올해 서울시에선 장애인 콜택시 662대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법정 기준을 넘긴 숫자라고 하지만, 지체 장애인 수요를 채우기엔 현저히 부족합니다.
게다가 서울시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서울 권역 밖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경기도 장애인 콜택시 역시 경기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권역 밖 이동을 할 수 없고, 만약 그러려면 지역 경계에서 내린 뒤 다시 또 48분을 기다려서 택시를 잡아야 합니다. 이렇다보니 지호 씨는 장애인 콜택시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늘어난 저상버스‥하지만 이용하려니 눈치
그렇다면 버스 이용은 어떨까요? 최근 서울시를 중심으로 시내버스에 휠체어 이용자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 보급이 부쩍 늘었습니다. 서울시는 오는 2026년까지 모든 버스를 저상버스로 바꾸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휠체어 이용자들의 대중교통 이용이 더 나아질까요?
지호 씨는 평소 버스를 거의 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상버스가 잘 오지 않고, 오더라도 탑승 과정에서 승객들이 눈치를 준다는 겁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광흥창역 방향으로 향하는 저상버스에 탔습니다. 버스에 오르니 휠체어 전용석이 보입니다. 휠체어 전용석은 평소 의자를 펼치고 있다가, 장애인이 오면 의자를 접어서 비켜줘야 하는 자립니다. 하지만 승객들은 자리를 비키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지호 씨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 곤란한 상황. 그때 다른 전용석에 앉아있던 승객이 일어나 의자를 접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승객은 가족이 장애인이어서 누구보다 저상버스 이용의 어려움을 잘 알았습니다. 이렇게 장애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이 없었다면 저상버스에서 자리를 잡기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휠체어 전용석에 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비켜달라는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번엔 반대로 국회의사당 방향으로 향하는 저상버스를 기다려봤습니다. 금방 오긴 했는데, 지호씨가 있는 인도에서 너무 떨어진 곳에 정차했습니다. 이러면 휠체어 램프를 꺼낼 수 없습니다. 결국 버스기사가 버스를 후진시켜 겨우 인도 가까이 차량을 댔습니다. 버스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시간이 지연됐습니다. 저까지 주변 승객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승차를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하려면 시간이 지연되고, 배차 시간이 늦어지니 기사들이 기계 고장 등을 핑계로 승차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호 씨도 최근 서울 남산에서 버스를 타려다가 승차를 거부당한 적이 있습니다. 전동휠체어는 자체 브레이크가 있어서 버스 안에서 안전벨트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데, 기사가 안전벨트가 없다는 핑계를 댄 것입니다. 결국 승차 거부로 신고하겠다고 한 뒤에야 기사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서울-경기 광역버스는 저상버스 없는 노선이 80%
그나마도 저상버스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지역 간 이동을 하는 광역버스는 저상버스도 거의 없습니다. 서울과 경기를 오가는 광역버스 노선 80%는 아예 저상버스가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광역버스 대부분 노선은 지체장애인 이용이 아예 불가능한 것입니다.지난 2014년, 김민정 씨 등 지체장애인 다섯 명은 광역버스를 탈 권리를 보장하라며 경기도청 등에 차별구제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버스회사의 광역버스 도입 의무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은 정부와 지자체에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2월, 8년 만에 나온 대법원 판결. "버스회사가 휠체어 승강설비를 설치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지만, 지자체가 설치 여부에 대한 지도 감독을 소홀히 한 것은 장애인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도 버스회사가 모든 버스에 저상버스를 설치하는 것은 지나치니, 원고들이 거주하는 지역 위주로만 마련하면 된다며 원고 패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8년 사이 지체장애인이 광역버스를 탈 권리가 보장된 것도 아니지만, 이제 김 씨 등 다섯 명은 경기도청이 청구한 소송비용 1,129만원을 내야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장애인만의 현실? X 우리 모두의 미래 O
한때 우린 모두 장애인이었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어린 시절, 우리는 보행기와 유아차라는 보조기구에 의존해 살아야했습니다. 부모 같은 보조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 사회의 관점에서 어린 아이들은 모두 지체, 발달 장애인입니다.
그리고 우린 모두 언젠가 장애인이 됩니다. 굳이 '불의의 사고'를 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근육이 줄어들어 걷기 힘들어지고, 눈이 침침해지거나 귀도 안 들리게 됩니다. '노화'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은 우리 모두를 다시 장애인으로 회귀시킵니다. 이미 지금도 일반버스보다 저상버스가 더 편하고, 지하철에선 계단보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분들 있으실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의 이동권은 결국 우리의 문제이고, 장애인 이동권 예산 역시 우리 모두를 위한 예산이라는 문제의식이 필요해 보입니다. 전장연의 메시지는 다시 시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예산은 장애인의 예산이 아닙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예산은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한 예산이고 노인과 교통 약자에 대한 예산임을 명백하게 말씀드립니다. 지하철의 엘레베이터 설치는 장애인만 타지 않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이용할 것입니다. 저상버스 예산은 모든 분들에게 필요한 예산입니다. 걷기가 힘들 때, 짐을 가지고 다닐 때, 유모차를 끌고 다닐 때 반드시 필요한 교통수단입니다." - 지난 19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장애인과 타봤더니‥빙빙 돌고, 휘청이고, 거절당하고 (2022.04.20. 뉴스데스크)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61230_35744.html
사회
이유경
[탐정M] "대체 뭘 타야 하나요?"‥장애인들의 현실? 우리의 미래!
[탐정M] "대체 뭘 타야 하나요?"‥장애인들의 현실? 우리의 미래!
입력 2022-04-21 10:12 |
수정 2022-04-2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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