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디지털뉴스제작팀

[스트레이트 63회 하이라이트] 빨대, 국정원, 논두렁 시계...

입력 | 2019-09-03 13:45   수정 | 2019-09-0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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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9 / 2009년 4월 22일
“박연차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에게 2억 원 상당의 명품 시계를 선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검찰은 뇌물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20여일 뒤
SBS의 보도는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SBS 8뉴스 / 2009년 5월 13일
“권양숙 여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명품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던 상황에서 나왔던
이른바 ′논두렁 시계′ 보도.

′드러났다′ ′확인됐다′는
단정적인 표현이 담긴 검찰발 기사였습니다.

′봉화마을로 시계 찾으러 가자′는
조롱과 비아냥이 쏟아지고,

언론들까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파헤치기식 보도를 이어갔습니다.

KBS 뉴스9 / 2009년 5월 14일
“인터넷에선 봉하마을로 명품 시계를 찾으러 가자는 웃지 못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질까 무서워 없애버린 계약서와 명품 시계, 노 전 대통령의 신병처리에 오히려 결정적인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논두렁 시계가 몰고 온 후폭풍은 거셌습니다.

SBS의 보도 열흘 뒤,
노 전 대통령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을 조사했던
당시 주임검사였던 우병우 중수1과장은
시계 수뢰 의혹을 집요하게 추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정말
고가의 시계 선물 받았는지,
받았다면 퇴임 이후인지 이전인지,
사실 관계조차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튀어나온 논두렁 시계.

검찰이 왜곡된 정보를 은밀히 흘려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몰고 갔다는 비난이 들끓었습니다.

KBS의 첫 보도 직후 검찰은
″우리 안에 나쁜 빨대가 있다,
반드시 색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빨대′, 다시 말해 기자에게 제보해주는 검찰 내부의 취재원을 질책하는 모양새였지만,

′명품시계′를 우회적으로 확인해주기 위한
의도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나쁜 빨대′라는
정치 검사들이라는 의심도 커졌습니다.

결국 당시 수사 지휘 체계에 있던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과 홍만표 수사기획관, 우병우 중수1과장 등 3명은
피의사실 공표죄로 고발됐습니다.

하지만 수사를 총괄했던 이인규 부장은
노 전 대통령의 명예를 해친 언론 보도는
검찰이 흘린 게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 / 2009년 6월 12일 뉴스데스크
“검찰은 이번 수사 과정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50일 뒤
이인규 부장은 스스로 검찰을 떠났습니다.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 / 2009년 7월 14일 퇴임식
“지난 25년 동안 너무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는데 미처 그 보답을 다 하지 못하고 나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렸을 수사 기밀.

얼마 뒤 검찰은
피의 사실 공표죄로 고발됐던 이인규 부장 등 세 명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이뤄진 진상 조사.

2017년 출범한 국정원 개혁위원회의 조사 결과, 일단 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 여론을 차단하고, 망신을 주자는 의사를 검찰에 전달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국정원 간부가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을 만나 ″고가 시계 수수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므로 언론에 흘려서 망신을 주는 선에서
활용하라″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습니다.

검찰에 이야기를 전한 것 외에
국정원이 보도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특히 검찰이 국정원 요청에 응했을 가능성,

있지도 않은 ′논두렁′이라는 표현을 누가,
어떻게 창작했는지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진상 조사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2017년 8월,

핵심 당사자인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9년간 다니던 로펌에 사표를 내고
돌연 미국으로 출국했기 때문입니다.

(CG) 이 전 부장은 출국 전
국정원 조사관과 통화에서
″지금 밝히면 다칠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남긴 채 구체적인 진술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장유식 변호사(국정원 개혁위 간사) / 2018년 6월 26일, MBC라디오 이범의 시선집중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전화 조사에 한 차례 응한 것 말고는 실제로 본격적인 조사에는 응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서 바로 또 미국으로 가셔서 사실 그 당시에 개혁위의 조사 내용도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었죠.”

보도를 한 SBS도
진상조사위를 꾸려 직접 조사에 나섰습니다.

결론은 문제의 논두렁 시계는
기자가 검찰에서 취재했다는 것.

실제로
당시 취재기자가 SBS 내부에 올린
보고 내용을 보면 정보 출처를 ′대검 관계자′라고 명시했습니다.

이희영 변호사(SBS 진상조사위원) / 2017년 12월 5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취재 당일 날 오후에 우연히 이 검찰 측 관계자를 만나서 따라붙어서 “노 전 대통령이 진술했던 내용 중에 이제까지 보도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있냐“ 이런 질문을 하다가 답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나온 워딩이 ′논두렁에 시계를 버렸다고 하더라′라는 말이 있다고 했는데요.”

SBS 자체 조사 결과대로라면
수사 정보를 유출한 건 국정원이 아니라
검찰 수사진으로 의심됩니다.

그러던 중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지난해 6월 미국에서
A4용지 4장짜리 입장문을 다시 냈습니다.

이인규 입장문
″원세훈 원장은 저에게 직원을 보낸 것 이외에 임채진 검찰총장에게도 직접 전화를 걸어 ‘노 전 대통령의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가 거절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국정원 수장까지 나서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자고 제안했지만,
자신이 거절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문제의 논두렁 보도 역시
대검 중수부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고,

국정원이 언론사를 상대로 직접 벌인
공작이라는 심증을 갖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인규 입장문
″그간 국정원의 행태와 SBS의 보도 내용, 원세훈 원장과 SBS와의 개인적 인연 등을 고려해 볼 때 SBS 보도의 배후에도 국정원이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원세훈 국정원의 기획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옥죄려는 정치 검찰의
술책이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부딪친 상황.

핵심 당사자가 미국으로 돌연 출국하면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른바 ′논두렁 시계′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