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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단독] "사상 검증에 아비규환"…지옥도라 불린 섬
입력 | 2020-06-25 19:28 수정 | 2020-06-2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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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전쟁 중에는, 아군이 상대편에 물들지 않도록 세뇌하고 그마저도 믿을 수 없어서 사상을 검증했습니다.
그 상징적인 공간이 전쟁 포로들이 지옥도라고 부른 용초도 입니다.
전쟁 때는 북한군 포로를 수용했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선 북에 잡혀 있던 국군 포로를 다시 가두었습니다.
그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시 영상과 함께 이재민 기자가 이어서 보도합니다.
◀ 리포트 ▶
포로 교환 협상이 한창이던 1952년, 남쪽 포로수용소에서는 반란과 진압이 반복됐습니다.
급기야 포로수용소 도드소장이 포로들에게 붙잡히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선우용수/당시 인민군 포로]
″우리들 자체가 우익과 좌익이 갈렸어요. 발 두 개를 잡아서, 텐트 가운데에서 끌고 나가는 거예요. 끌고 나가면 죽이는 거예요.″
포로 교환이 다가오자 성향에 따라 포로들을 분리하기 위한 분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착검을 한 미군 경계 속에, 수용소 안으로 최루탄을 잇따라 투척합니다.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쏟아져 나오고, 쓰러진 포로들 위로 계속 최루탄이 쏟아집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진압된 이른바 ′악질′ 포로들이 분산된 곳은 통영을 거쳐 배로 다시 40분을 가야하는 용초도였습니다.
[김두진/용초도 주민]
″딱 입을 벌렸지. 입을 벌리니까 처음에 도저가 내려오더라고, 불도저. 차들이 계속 연달아 나오는 거야 그 안에서. 나오더니 저쪽 산에다가 천막을 치는 거예요.″
마을 주민들이 강제로 내몰린 자리에는 속속 북한군 포로들이 도착했습니다.
해안가와 산등성이를 따라, 섬 전체에 포로 수용소 16동이 세워졌습니다.
[강기재/추봉도 주민]
″철조망도 치고. 포로들도 자기들이 지낼 막사, 철조망을 자기들이 만든 거예요. 미리 만들어 놓고 입주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 보면 참 전쟁치고는 이상했지…″
′인민군 만세′.
시멘트 담 위에는 아직도 포로들이 새겨 넣은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장교 2600명을 포함한 북한군 포로는 8000여명.
포로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고 총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남조/용초도 주민]
″합동 노래처럼 부르는 거야, ′인민의 총알을 받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으면 뭐가 나타나는 거야, 총 소리가. 땅, 땅, 하고.″
공식 기록으로 북한군 25명이 사망했습니다.
수용소에 있던 북한군 포로들은 1953년 포로 교환 때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갔습니다.
비어 있는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바로 북한군에 잡혔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휴전과 함께 돌아온 국군 포로 7천 8백여명.
집이 아니라, 북한군 수용소였던 용초도로 실려갔습니다.
공산주의에 물들었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던 국군 포로들은 사상 검증을 거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갑생/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실제로 돌아와 보니까 심문하는 방식이 적으로 먼저 간주하고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발을 하게끔 하는 그런 강압성…″
국군 포로는 군대에 복귀시킬 ′갑′, 처단해야 하는 ′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병′으로 분류됐습니다.
북한 노래를 알고 있는지, 포로 수용소에서 간부로 활동했는지가 기준이었습니다.
[박진홍/귀환 국군 포로]
″이북의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도 자살이라고 하는 건 전혀 없었습니다. 살아 돌아와서 자살하는 그런 광경을 보니까…″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군 포로 120여명을 ′처단 대상′으로 분류했는데, 공식적인 사망은 16명.
260여명은 ′미 소집자′라는 이름으로 분류해 행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MBC뉴스 이재민입니다.
(영상 취재: 방종혁 / 영상 편집: 유다혜 / 화면 제공: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경남 거제시·통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