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조희원

[스트레이트] 열사는 '관련자', 가해자는 '유공자'

입력 | 2026-01-11 21:13   수정 | 2026-01-1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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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민주유공자 아닌 ′관련자′</B>

<B>전태일 -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에서 분신 사망</B>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민주화·노동운동을 일깨우다

[김영문/전태일 열사 친구]
″이 자리예요, 이 자리. 저기에서 이리로 뛰어나온 거예요. 불이 얼마나 세게 타올랐겠어요. 옷을, 얼굴을 다 그슬리고 하니까…″

<B>박종철 -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다 사망</B>

[강민창/당시 치안본부장 (기자회견, 1987년 1월 19일)]
″위협 수단으로 머리를 한 차례 욕조물에 잠시 집어넣었다가 내놓았으나…″

″종철이를 살려내라! 종철이를 살려내라!″

<B>이한열 - 1987년 7월 5일, 반독재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사망</B>

[(1987년 7월 5일, MBC 뉴스데스크)]
″심장 정지 상태로 들어가서 긴급 심폐 소생 시술을 시도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고 배은심 여사 (이한열 열사 영결식, 1987년 7월 9일)]
″살인마 물러가라, 물러가. 이 많은 청년들이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줄 거야.″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호헌철폐! 독재타도!″

[노태우/당시 민주정의당 대표 (직선제 개헌 발표, 1987년 6월 29일)]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민주화를 이끌어냈지만, 유공자 아닌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일 뿐

′유공자′가 된 건 국가폭력 책임자들

유가족들의 40년간 이어진 ′투쟁′

천막농성 422일… 삭발, 단식, 오체투지

[장남수/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장]
″열사들이 자기가 누려야 될 그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게 우리 부모들의 목표입니다.″

◀ 조희원 기자 ▶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우리는 ′열사′라고 부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소중한 가치는 물론, 광장에서 촛불과 응원봉을 들 수 있는, 지금 보면 당연한 것 같은 자유까지 오늘의 우리는 수많은 열사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입니다.

더 기가 막힌 건,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폭력의 책임자 상당수가 아직까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고 온갖 예우까지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스트레이트는 국가폭력으로 숨진 민주 열사 136명 사망 사건의 책임자들을 전수 조사했습니다.

<B>■ 가해자가 국가유공자 </B>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반독재 학생 운동에 참여한 21살 청년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고문하고 살해한 것도 모자라 거짓으로 조작 은폐하려 했던 독재 정권.

시신조차 가족 동의 없이 화장했습니다.

[박종부/박종철 열사 형]
″관에 들어있는 얼굴만 확인하는 거니까 그런 그 고문 형태 그런 거는 전혀 볼 수가 없었죠. 경찰이 외부와 벽을 치고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우리(유족)만 내부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습니다.

[박종부/박종철 열사 형]
″한 석 달 동안은 경찰에 의해서 저희 유족들은 철저하게 통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디든 가도 따라붙고 그리고 뭐 모든 전화는 이제 다 도청이 되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를 통해 드러난 진실은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됐고, 군부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가해자들 단죄는 제대로 이뤄졌을까?

직접 고문에 가담한 경찰 5명은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부분 형기를 채우기 전에 가석방으로 나왔고, 사건 은폐 축소를 지시한 경찰 수뇌부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대공분실의 홍승상 경감.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날조한 초기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유가족 감시와 회유까지 담당했다고 유가족들이 지목한 인물입니다.

[박종부/박종철 열사 형]
″제 기억으로는 아버지께서 만나보셨었고 당연히 아버지한테 이제 소위 말하는 ′위로금′ 그런 이야기를 했겠죠.″

하지만 검찰은 그를 조사하고도 기소하지 않았고, 그는 국가유공자 직위를 유지한 채 승진과 훈장까지 잇따라 받았습니다.

홍 전 경감은 2년 전 윤석열 정부가 독립외청인 경찰청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행안부에 경찰국을 신설하면서 다시 세간의 이목을 받았습니다.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이 과거 학생운동을 하다 경찰에 특채돼 이른바 ′밀정′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는데, 김 국장을 특채하고 활용한 인물이 바로 홍승상 전 경감이었습니다.

[홍승상 전 경감 가족 (2022년 8월)]
″<홍승상 선생님 혹시…> 암 환자예요. 암 환자. 귀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못 해요. 말도 못하고.″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뒤, 대학가에서 반독재 시위가 이어지던 1973년.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는 ′유럽 간첩단′ 수사 참고인으로 남산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석했다 사흘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한 뒤 7층에서 투신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최광준/최종길 열사 아들]
″우리 집 앞에 골목마다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고,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도 아버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던 동생 최종선 씨는 내부에서 진상을 파악한 뒤, 감시를 피하려 정신병동에 스스로 입원해 98쪽짜리 수기를 썼고, 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하면서 거짓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에 밀려 검찰이 재수사에 나섰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은 30년 뒤에 밝혀졌습니다.

[최광준/최종길 열사 아들]
″(의문사위가) 검찰에 그 1988년 당시에 수사 자료를 요청을 했더니 그것이 캐비닛 하나 분량의 굉장히 많은 자료들이 발견이 됐다는 겁니다. <다 알고 있었던 거네요.> 네, 모든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던 거죠.″

의문사위는 최 교수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간첩임을 자백하지 않았으며, 투신자살은 중앙정보부의 날조였다고 밝혔습니다.

최 교수가 자백했다는 신문조서, 현장검증, 수사보고서 등이 사후에 조작됐고, 검찰 재수사 때도 허위 진술을 공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같은 조작과 은폐를 주도한 곳은 중앙정보부 5국.

핵심 인물은 5국 수사단장 장송록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장 씨를 비롯한 책임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2011년 사망한 장 씨는 현재 국가유공자들이 묻히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유신독재 시절 대표적 ′사법 살인′으로 꼽히는 인혁당 사건.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된 서도원, 도예종 씨 등 8명은 북한의 사주로 인민혁명당을 결성해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며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서도훈/서도원 열사 아들]
″건장한 아저씨 둘이가 왔더라고요. 와서 엄마하고 저보고 ′잠시 나가라′ 그러고 그 방에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고 가셨어요. 애들 잘 키우라고.″

1심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10개월, 확정판결 18시간 뒤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서도훈/서도원 열사 아들]
″염할 때 장남은 참석을 하라고 그래서 내가 했어요. 했는데 보니까 하여튼 내 기억에는 몸에 있는 구멍이라는 구멍에선 다 피가 나와 있더라고요. 이 땀구멍까지도 그게 이제 말라 있는. 그게 굉장히 생생해요.″

그리고 32년 만에 재심을 통해 나온 무죄 선고.

[(2007년 1월 23일, MBC 뉴스데스크 )]
″법원은 오늘 이 사건의 판결이 잘못됐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30년 넘게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온 유가족들에겐 너무도 지연된 정의였습니다.

무도한 독재권력, 그 하수인이었던 사법부 누구도 처벌받거나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대전현충원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이곳에는 당시 인혁당 사건 조작을 지휘했던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이 안장돼 있습니다.

신 씨의 묘비에는 ′인간의 기본권을 애써 옹호하는 길을 지향했다′고 적혀있습니다.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독재권력을 지키려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전두환 신군부 일당.

이들이 내란 성공을 자축하며 남긴 기념사진 속 34명 가운데,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주범 13명의 서훈은 지난 2006년 박탈됐습니다.

하지만 14명은 지금도 국가유공자로 남아있고, 사망한 13명은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박종부/박종철 열사 형]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런 어떤 그 민주열사들을 탄압한 그런 경력이 밝혀진다면, 모든 것이 취소돼야 되겠죠.″

반면, 민주화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민주 열사는 1999년 제정된 민주화운동보상법에 의해 136명이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라는 이름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가운데 61명은 독재권력에 저항하고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졌고, 18명은 시위 도중 최루탄이나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고, 18명은 투옥 등으로 생긴 병으로 숨졌습니다.

그리고 17명은 아직도 사망 경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조희원 기자 ▶

이렇게나마 민주 열사들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건, 유가족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마음에 스스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부모들은 같은 아픔을 겪은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40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내 자식의 죽음이 마지막이 돼야 한다′, 오직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거리 위로 나섰지만,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B>■ 자식 이어 뛰어든 민주화운동 ′40년′</B>

국회의사당 바로 앞, 비닐과 나무판을 덧대 만든 임시 천막.

민주열사 유가족들의 모임인 ′유가협′ 농성장입니다.

유가협은 1986년 8월, 군사독재 정권에 목숨을 잃은 11명의 부모들이 뭉치면서 시작됐지만, 또 다른 국가 폭력 희생자가 계속 나오면서 지금은 105가족으로 늘었습니다.

간첩 가족, 빨갱이라는 오명과 핍박을 이겨내며 전국을 돌며 농성과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장남수/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장]
″국가 시책에 반대하는 불순분자로 취급을 했습니다. 가족들이나 그 모두를 감시를 하고‥″

[강선순/권희정 열사 어머니]
″내 자식도 단식을 하다 잃었는데 단식이 얼마나 내가 끔찍하겠어요. 그런데도 자식이 했던 길인데 옳다고 했으니까, 부모로 안 할 수 없잖아요.″

87년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 도입, 집회·결사와 언론·출판의 자유 보장, 노동조합 결성·가입 확대, 법정 근로시간제도, 최저임금제도 도입.

자식의 뒤를 이어 뛰어든 민주화운동은 모두가 누릴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김동춘/좋은세상연구소 대표·성공회대 명예교수]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거꾸로 가려고 할 때 이분들이 했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고 가장 앞장서서 어쩌면 강경하게 싸웠던 분들이다.″

유가족들이 가장 바라는 건 진상규명 그리고 명예회복.

하지만 여전히 많은 죽음이 의문사로 남아있습니다.

1987년 9월, 군 입대 넉 달 만에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된 서울대 84학번 최우혁 군.

학생운동을 하다 입대한 최 군은 보안사의 조사를 받았고, 요시찰 대상자에 올랐습니다.

군은 군 복무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했다며 사건 보고서 3장만 공개했을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최종순/최우혁 열사 형]
″우혁이 문서를 청구했더니 나온 자료가 페이지 넘버가, 쪽 넘버가 91, 92, 93 세 페이지가 나왔어요. 그럼 1부터 90까지 있다는 얘기잖아요. 근데 그거 없다고 그러는 거야. 그게.″

1992년 기차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된 전남대 90학번 문승필 군.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문 군은 귀가 중이라는 전화를 끝으로 행방불명됐고 보름 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경찰은 스스로 철로에 뛰어들었다고 발표했고, 추가 조사는 자료가 없다며 중단했습니다.

[오순례/문승필 열사 어머니]
″아마 쫓겨서 그 뒤로 갔지 않았나. 아니면 어디서 사고를 당해서 그 철도에다 갖다 놨느냐‥″

서울대 무역학과 82학번 안치웅 군은 1988년부터 지금까지 실종 상태입니다.

민주화추진위원회 핵심 활동가로 구로 동맹파업을 지원하다 구속되기도 했고, 공안기관의 사찰을 받아왔습니다.

경찰은 관련 기록이 없다며 더 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옥심/안치웅 열사 어머니]
″내 생각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끌고 가서 어디서 그냥 하다가 얘가 너무 지치니까 죽여버린 것 같은 그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지난 2002년 의문사위 조사 결과, 접수된 의문사 85건 가운데 국가권력의 개입을 밝혀낸 건 19건뿐.

증거자료 부족, 권한 한계 등의 이유로 법적 판단조차 못 내린 사건이 30건에 이릅니다.

[최종순/최우혁 열사 형]
″그냥 자발적인 협조를 받는 수준의 법안 가지고 그 사람들을 조사했단 말이에요. 경찰, 국정원이 죽음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의 자료를 내놔야 되는데 안 내놓는 거예요.″

명예회복을 위한 길도 멀고 험합니다.

1999년, 유가협의 422일 천막농성 끝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민주 열사들이 처음으로 국가로부터 존재를 인정받게 됐습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도 아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분류했습니다.

유가족들은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며 다시 천막 농성에 나섰습니다.

현재 4·19와 5·18로 한정돼 있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열사 등 다른 민주화운동 희생자까지 확대하고 예우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장남수/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장]
″군사정권에 항거함으로써 다시 민주주의를 되찾은 그 죽어간 이분들이 공이라고 난 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국가유공자가 안 되면, 돼야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법안은 지난 20여년 간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폐기돼 왔습니다.

보수 정당과 정권에서 ′운동권의 셀프 특혜′, ′가짜 유공자 양산법′이라며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박민식/당시 국가보훈부 장관(국회 정무위원회, 2023년 12월 14일)]
″′586 운동권′의 기득권 유지하는 ′운동권 카르텔 특혜법′이자 운동권 출신이면 유공자가 되어야 하는 ′현대판 음서제도′다.″

이 같은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B>운동권 셀프 특혜? 가짜 유공자 양산?</B>

법안에 따르면, 민주유공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된 경우로 제한됩니다.

이미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판정받은 136명에 장애 수준의 부상자 693명을 더해 총 829명만 예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B>현대판 음서제도?</B>

또, 유공자 예우는 본인과 자녀 세대까지 받을 수 있지만, 민주 열사의 상당수는 미혼 상태로 숨졌고, 자녀가 있더라도 이미 장성해 혜택을 더 물려받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B>과도한 특혜?</B>

이번 국회에 발의된 법안에는 다른 유공자 혜택과 달리 임대주택 입주, 교육비 지원, 취업 가산점 등 생활지원 조항이 삭제됐고, 최소한의 의료 지원만 남겨뒀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 권오을/국가보훈부 장관 (국가보훈부 업무보고, 2025년 12월 18일)]
″현금 보상이나 이런 건 없고, 한다면 실질 보상이라고 하는 게 의료, 요양 지원, 국가유공자에 준해서 그 정도다? <그건 연간 예산이 20억 정도밖에 안 들어갑니다.>″

사실상 명예 회복이 핵심인 민주유공자법은 지난해 9월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돼 오는 3월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12.3 내란을 막기 위해 국회 앞으로, 광화문으로, 남태령으로, 주저 없이 달려갈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을 통해 켜켜이 쌓여온 민주주의의 가치가 우리 안에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라도 그 빚을 갚고 국가폭력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숙제입니다.

[김동춘/좋은세상연구소 대표·성공회대 명예교수]
″공권력의 잘못에 의한 범죄는 시효 없이 수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들에 대한 예우를 박탈해야만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수립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