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박성호

[워싱턴 나우] 봉준호의 충고 통했나‥미국인들 "오징어 게임, 자막 버전으로"

입력 | 2021-10-31 14:07   수정 | 2021-10-31 14:37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미국인들은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었을까</strong>

″자막의 장벽, 그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지난해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트로피를 거머쥔 봉준호 감독이 미국인들에게 했던 충고죠. 자막 읽는 수고를 꺼리며 비 영어권 국가의 작품에 배타적인 미국인들에게 던진 뼈 있는 한 마디였습니다.

마침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열풍이 거센 요즘 미국인들이 봉 감독의 충고대로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었을지 궁금했습니다.

최근에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오징어 게임′ 속 놀이(딱지 치기, 달고나 뽑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체험 행사를 취재하러 갔었는데요. 80명 모집에 3천여 명이 지원해 화제가 됐었죠.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K 드라마를 영어 더빙으로 볼 순 없다″</strong>

참가자들에게 ′오징어 게임′을 영어 더빙 버전으로 봤는지, 한국어 대사에 영어 자막이 달린 것으로 봤는지 물어봤습니다.

애즈마 라프만이란 20대 여성은 ″아무도 영어 더빙 버전으로 보지 않아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문화를 ′진품′(authenticity)으로 대하느냐 ′모조품′(copying)으로 접하느냐의 문제″라고까지 했습니다.
참가번호 1번 조 데이비스(52세)는 ″우리 가족은 드라마를 본 게 아니라 읽었다고 표현한다. 읽으면서 봐도 재밌었다.″고 했습니다.

고등학생 두 딸이 열렬한 케이팝 팬이라는 그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친숙해지려면 그 나라 언어로 접해야 한다.″면서 ″아빠로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도 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 상당수도 막상 해보니 자막 읽기가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앞으로 얼마든 해 볼 수 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찬사든 비판이든 미국내 중심에 진입한 ′K 콘텐츠′ </strong>

미국에선 ′오징어 게임′의 드라마로서의 만듦새와 그 안에 담긴 사회경제적 메시지에 대한 호평도 있지만, 그렇다고 좋은 평가만 받는 건 아닙니다. 폭력성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시청하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는 학교들도 적지 않습니다.

프랭크 부루니 듀크대학 교수는 ′오징어 게임′의 인기를 ″극단적인 것에 즐거워하는 기묘하고 불온한 현대적 감성″과 관련이 있다며 불편해 했습니다.
뉴욕타임스의 텔레비전 비평가 마이크 헤일은 이 드라마에서 ″계급, 탐욕, 인간의 야만성을 언급한 것은 끊임없는 대학살을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겉치장일 수 있다″고 혹평했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오징어 게임′에 후하게 점수를 매기진 않습니다. 제 취향도 아니고요.

하지만 한국의 문화 콘텐츠에 대한 비평이 미국에서 진지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매일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찬사든 비판이든 그 논의의 위치가 미국 사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한류′에 썰렁한 반응 보였던 14년 전 영국인들</strong>

격세지감입니다. 2007년 겨울 영국에서 대학원 유학 시절 ′한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수업 때 발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류′가 생소한 영국인들에게는 현상 자체를 설명하는 데에 꽤나 애써야 했습니다.

′겨울 연가′와 ′대장금′이 일본, 중국, 이란 등지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린 사례를 보여주고, 한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수출액 증가 추이도 제시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문화 상품이 ′허리우드 지배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서구 문화가 일방적으로 제3세계 문화를 지배한다는 기존의 ′문화 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 관점만 주목할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류′에서 보듯 비 서구권의 다양한 문화가 나름의 새로운 중심 역할을 하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도 교수도 별 관심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자, 반짝 유행 아니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저만 괜시리 ′국뽕′에 취해 흥분한 것처럼 느껴졌죠.

이 14년 전 일화를 얼마 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워싱턴 특파원에게 들려줬더니 ″그때 영국인들은 내심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시작은 K 팝이었지만‥</strong>

K팝, K드라마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서도 점점 더 폭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면, 유타주에 사는 이윤지씨가 비슷한 또래의 백인 여성 친구들과 운영하는 ′방탄 블론즈′(Bangtan Blondes)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요. ′방탄′에 열광하던 그녀의 친구들이 한식에 이어 한글 배우기, 시조 따라하기까지 도전하더군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고, 다른 문화에 열린 자세를 취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대중문화를 세계 표준처럼 여기던 데에 비하면 퍽 낯설게 느껴집니다.

박성호(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