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2-04 08:03 수정 | 2023-02-04 08:26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애플이 자사 제품인 아이폰 성능을 일부러 떨어뜨렸다″??</strong>
지난 2017년 12월 세계적인 스마트폰 제조사 애플은 아이폰 제품의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했습니다. 대상 제품은 아이폰6와 6플러스, 6S, 6S플러스, SE, 7, 7 플러스였습니다. 아이폰을 이용하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새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라는 알림이 뜨면, 이를 전송받아 설치하는 방식입니다. 종종 오류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기능을 넣기 위해 진행되는 것이어서, 아마도 큰 의심없이 다들 업데이트를 했을 겁니다.
2017년 12월 업데이트는 ′성능조절기능′을 새롭게 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이폰의 배터리 충전량이 낮아지다 갑자기 꺼질 수 있으니, 배터리가 낮아지면 일부 기능이 작동하지 않도록 성능을 조절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산 지 오래 지난 스마트폰은 배터리 성능 자체가 떨어져, 배터리가 빨리 닿는다는 점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아이폰은 배터리가 빨리 닳아 충전량이 낮은 시간이 길어질 겁니다. 만약 이런 아이폰에 이 업데이트를 설치했다면 일부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시간도 길어지고, 이용자의 불편도 커졌을 겁니다.
아이폰 이용자들은 애플이 고의로 아이폰 성능을 떨어뜨렸다고 반발했습니다. 일정 기간 쓴 아이폰은 고의로 일부 기능이 잘 작동하지 않게 했다는 겁니다. 애플이 아이폰 이용자들이 새 아이폰을 다시 구매하도록 유도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부작용 숨긴 성능 저하로 정신적 피해까지…″ 소비자들이 나섰다.</strong>
2018년 3월, 아이폰 이용자들은 발벗고 나서기로 했습니다. 세계적인 스마트폰 제조사인 애플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원고 측, 그러니까 아이폰 이용자들은 6만 2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용자들을 대리한 법무법인 한누리는 애플이 아이폰 이용자들에게 2016년부터 적용된 업데이트의 부작용에 대해서 전혀 알리지 않은 점을 지적했습니다. 부작용이 있다면 고객에게 선택권을 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고 이는 불법행위 내지는 채무불이행에 해당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소장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애플 측이 문제가 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설치하면 일정한 환경 아래에서 아이폰의 성능저하가 일어난다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배터리결함의 은폐, 고객이탈방지, 후속모델의 판매촉진 등을 위해 문제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기획·제작한 다음 아이폰 사용자들에게 이러한 사정을 숨긴 채 배포하였고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원고들은 문제의 업데이트를 설치·실행함으로써 보유하고 있는 아이폰의 성능이 저하되는 손상을 입었다′
이용자들이 입은 피해도 구체적으로 나눴습니다. 아이폰의 영구적, 장기적 손상이라는 물질적 피해 뿐 아니라 아이폰 성능저하에 따른 부수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이용자 한 명당 요구한 금액은 20만원씩, 모두 합쳐 127억원을 지급하라고 청구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미국에선 배상금 주고 합의…세계 곳곳에서 소송·벌금</strong>
물론 국내 아이폰 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성능조절기능′은 전세계 이용자에게 모두 적용된 업데트였으니까요.
당시 업데이트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자, 애플은 배터리 성능이 떨어지면 스마트폰이 갑자기 꺼질 수 있어 속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전력 수요를 감소시켰다고 해명했습니다. 배터리 성능이 낮아진 스마트폰은 부득이 성능을 저하시켰다고 사실상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새 제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조치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전세계에서 애플을 상대로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이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애플은 지난 2020년 3월 미국에서 구형 아이폰 사용자 한 명당 25달러, 3만 400원씩 지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재판을 이어가지 않고, 대신 전체 규모 6천억원 정도로 추산되는 합의금을 지급한 겁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같은 소송을 제기한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등 미국 34개주에 1,375억원을 지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칠레에서 당한 집단 소송에서는 모두 38억원을 배상하기로 했습니다.
또 이탈리아 공정거래위원회와 프랑스 경쟁소비부정행위방지국도 애플에 이 사건 업데이트에 대한 벌금을 부과하는 처분을 내렸습니다. 아이폰 이용자들에게 업데이트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자국의 소비자법을 위반하였다는 이유였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5년 만에 애플 손 들어준 한국 법원… 도대체 왜?</strong>
우리나라에서도 소송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려 5년 만입니다. 그런데 해외 소송 결과들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애플이 승리한 겁니다. 서울중앙지법 제31민사부는 애플 측이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습니다.
국내 이용자들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겠죠. 해외에서 소송을 제기한 이용자들은 합의금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법원은 30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통해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했는데, 핵심만 추리면 이렇습니다.
1. ′성능저하′가 입증되지 않았다
관건은 성능이 실제로 저하되는지 여부입니다. 법원은 객관적인 감정 결과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사기관이 업데이트가 성능을 저하시킨 건지 감정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습니다.
업데이트가 성능저하인지 확인하려면, 업데이트를 한 아이폰과 하지 않은 아이폰 두 대를 놓고 비교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용기간과 사용방법이 똑같은 조건의 아이폰 두 개를 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이폰 성능저하의 형사사건을 수사한 경찰청 디지털포렌식 담당자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도 당시 고발인들이 제출한 아이폰 3대만으로는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보고 감정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용자들은 미국의 IT 제품 평가사이트에서 실험한 결과 성능 40~88% 수준으로 저하된 점이 확인됐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객관성과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며 믿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용자들이 주장한 성능 저하가 업데이트로 인한 것인지 검증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2. 합의금 줬다고 잘못 인정한 건 아니다
법원은 다른나라에서 아이폰 이용자들이 집단소송을 벌여 이긴 것은, 애플측이 합의금을 먼저 지급해 재판이 종결됐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재판에서 검증을 한 뒤에 법원에서 성능저하를 인정한 게 아니라, 소송 비용을 줄이고 논란을 빨리 끝내려고 애플이 합의금을 지급하고 재판을 끝냈다는 겁니다. 애플이 돈을 주고 합의했다는 것만으로 성능 저하가 입증된 건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러시아에서 벌어진 같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는 오히려 성능 저하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 점도 언급됐습니다. 러시아 연방지방법원은 감정 결과를 바탕으로 ′이 사건 업데이트는 최대 부하 상태에서 아이폰의 전원이 갑작스레 꺼지는 현상을 방지하고 용량이 줄어든 배터리를 더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결함이 아니′라고 판시했습니다.
3. 전원 꺼지는 것보다는 일부 제한이 낫다
간단하지만 기술적인 이유도 들었습니다. 이용자들이 성능저하를 가져온다고 주장한 업데이트 ′성능조절기능′은 전원이 갑자기 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작동되는 것이죠.
법원은 이 기능이 없으면 전원 자체가 더 빠르게 꺼질 수 있는 상황이 오고, 그렇게 되면 고성능 어플리케이션을 이용 못하는 일부 성능저하가 아니라 아예 전원이 꺼져 아이폰 자체를 사용하지 못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고성능 기능이 제한되더라도 전원이 켜진 상태를 유지하며 다른 기능을 이용할 수 있으니, 아이폰이 빨리 꺼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러시아 법원의 판단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또 애플 측이 사과하면서 2018년 3월부터는 성능조절기능을 끄거나 킬 수 있도록 한 점과 4월부터는 아이폰 배터리 교체 비용을 6만 6천원 인하해 제공한 점도 애플 측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습니다.
4. 첨단기술의 결정체… 예측도 어렵다.
마지막으로 법원은 스마트폰은 첨단기술의 집결체로 복잡한 작동원리를 가지고 있어, 소비자가 스마트폰의 모든 구체적 기능과 기술적 내용을 고지받아 인지하기는 어렵다고 봤습니다. 제조사 역시 모든 내용을 고지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봤습니다. 만약 모든 사항을 고지하라고 의무를 부담시키면 오히려 전체적인 사회비용이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애플이 성능조절기능의 내용을 고지하지 않은 점이 위법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미국 이용자는 받은 합의금, 한국 이용자는 왜 못 받나?</strong>
소비자단체나 변호사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우리나라의 집단적 소비자 피해구제 제도에 큰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한국에 소비자 집단소송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소송은 원고가 6만명에 달하는 소송이지만, 엄밀히 말해 집단소송이 아니라 공동소송입니다. 집단소송은 대규모로 피해가 발생한 사건에서 몇 사람이 대표가 되어 벌이는 소송을 말합니다. 만약 승소하면 모든 피해자가 같은 배상을 받습니다. 한국에서는 증권 분야에서만 지난 2005년 집단소송이 도입된 상태입니다. 만약 한국에도 소비자 집단소송제도가 있었다면, 애플 측의 반응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거란 겁니다.
또 한국에 증거 개시 제도, 영어로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없다는 점도 아쉬운 점으로 꼽힙니다. 증거개시 제도가 도입된 미국 재판에선 원고와 피고가 가진 증거 모두를 공개하고, 재판을 시작합니다. 기업들이 불리한 증거를 숨길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기업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거액의 합의금을 주고 재판을 빨리 끝내는 경우가 나오는 겁니다.
애플 측은 미국에서는 이용자들과 합의했지만, 한국에선 합의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제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미국에선 합의금을 주고, 한국에선 끝까지 소송해 한푼도 주지 않은 겁니다. 같은 애플의 고객인데, 한국의 이용자 입장에선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폰 이용자측은 항소 여부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만약 항소할 경우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어떨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