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5-09-22 08:48 수정 | 2025-09-22 11:23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공장 공사현장에서 무차별적으로 구금됐던 한국인들이 석방돼 구국한 지 일주일 여가 흘렀습니다. 이후 조금씩 체포 당시의 상황과, 구금 과정의 부당한 대우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자, 외교부는 부당한 조치가 있었는지 전수 조사하고, 피해자들이 소송을 진행할 경우 측면 진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MBC는 임신 상태로 일주일 넘게 구금됐던 여성 엔지니어 김 모 씨를 인터뷰해 <b>〈뉴스데스크〉</b>로 보도했습니다. 국민적 관심 사안임을 고려해, 분량상 방송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을 일문일답 형태로 공개합니다.
<b>- 처음 체포 당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b>
나는 엔지니어라 공장 안쪽에 있었다. 나중에 군인이 들어와서 나가라고 했다.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던 터라, 정중하게 잠깐 화장실을 들를 수 있는지 영어로 물었는데도 일단 밖으로 나가라고 하더라.
<b>-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b>
일단 몸수색을 다 했다. 처음엔 B1비자(단기 사용비자)와 이스타(ESTA)인 사람을 구분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하다고는 생각 못했다. 그냥 이스타인 직원들은 좀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과장님, 부장님은 ″저녁에 소주 한 잔 해야겠다″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다들 합법 비자가 있으니, 이게 절차가 오래 걸릴 뿐 나한테는 문제가 없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가서 보니까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들이 잡혀서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b>- 이민국 단속은 어떻게 진행됐나?</b>
처음에는 합법 여부를 질문하고 구분할 줄 알았는데, 질문 없이 빨간색 종이 팔찌를 손에 채우더니 그물망에 소지품을 걷어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구금센터에 갇혀서 돌이켜보니, 사람이 많고 시간이 길어지니까 그냥 몽땅 끌고 간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별히 저항하는 한국인은 없었다. 총기 소유가 가능한 국가인 만큼 혹시 총에 맞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흑인들이 경찰 총에 맞는 사건들을 보지 않나. 중간에 가족에게 ′추방될 것 같다′고 카카오톡 메세지라도 보내려고 했는데 군인들이 가방에 집어넣지 않으면 뺐겠다고 경고했다. 억압적인 분위기였던 건 사실이다.
<b>- 수갑과 쇠사슬로 묶는 장면이 충격적이었다.</b>
나 같은 경우는 운 좋게 수갑을 차진 않았다. 처음엔 도망가려는 시도를 한 사람들을 묶은 줄 알았다. 시선이 딱 가게 돼 있다. 중범죄자 같이 손이 묶여서 들어오니까. 한 여직원은 내가 범죄자도 아니고 도망칠 것도 아닌데 왜 묶어두느냐고 항의해서 대기하는 동안 풀어주기도 했다. 반면 케이블 타이로 묶여서 공장 밖으로 끌려 나오고, 다시 호송차에 탈 때 수갑을 찬 여성 직원도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수치스럽게 느껴졌다고 한다.
<b>- 어떤 절차를 밟게 되는 건지 설명이 없었다고 들었다.</b>
그렇다. 전혀 영문을 몰랐다. 어떤 요원에게 물어봤더니 ″너희는 ′프로세싱 센터′로 가게 될 것이다, 별일 아니니 가서 잘 해결하면 된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수용소가 아니라 이민국이 있는 건물에서 조사를 하나보다 생각했다.
이송도 오래 걸렸다. 오후 3시 반쯤 호송차량에 탑승해서 5시 반쯤 출발했다. 그러고 한 8시 반쯤에 남자들이 수용된 포크스턴 구금센터에 도착했다.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다. 호송 요원 손목시계를 몰래 보거나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추측했다. 여성들이 수용된 스튜어트 구금센터에 도착하니까 새벽 2시였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사무실에 잠깐 대기를 하다가 상태가 대기동(홀딩 룸)으로 옮겨졌다. 대기동 시설이 가장 열악했다. 문에 쇠창살이 격자로 돼 있고, 밖에서 감시할 수 있는 곳에 변기가 있었다. 변기를 구획하는 벽은 성인 허리 높이라 일어나서 보면 소변, 대변 보는 사람이 보일 정도였다.
다시 저녁 무렵에야 수용 절차가 끝나서 ′죄수복′을 입고 죄수방 같은 곳에 들어가게 됐다. 10시간 넘게 대기한 것 같다.
<b>- 영화에서 수형자들이 입는 점프수트 말인가?</b>
그렇다. 원래 위험도에 따라 빨간색·오렌지색 수형복 입은 이들이 같은 방을 쓰고, 카키색·남색 수형복끼리 같은 방을 쓴다. 수용 공간이 부족해서인지 우리는 오렌지색 수형복을 입고 고위험군과 같이 생활했다. 중범죄자랑 같이 생활하는 건지 싶어서 굉장히 두려웠다. 마지막 날에서야 남색 수형복으로 갈아 입혔다.
<b>- 사실 구금될 이유가 없지 않았나?</b>
나 같은 경우는 장비 설치와 현지 운용 직원인 ′오퍼레이터′ 교육 목적으로 B1 비자를 받았다. 업체 간 계약 서류와 초청장도 첨부해서 서울 주한미국대사관 영사과에서 비자를 발급받은 것이다. 입국 심사할 때도, ′나는 자동화 기술자이고 정확히 44일 있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8월 6일에 입국했으니 원래는 이번 달 18일이면 한국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구금시설에 도착해서도 계속 얘기했다. 우리는 법을 위반한 사람들이 아니고 비자 유효 기간도 남아있다, 그렇게 어필(호소)을 했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하더라. 얘기를 들어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b>- 내부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b>
침대가 한 60개 정도 들어가 있는 한 방에, 배터리 공장 현장에서 잡혀온 사람들하고 원래 있던 사람 포함해서 3~40명이 함께 생활했다. 변기 4개, 세면대 3개가 안에 있었는데, 화장실 쓰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변기가 너무 개방된 곳에 있었고 여성들은 생리도 하기 때문에…… 밖에서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환경이니까 힘들었다.
침대마다 번호가 붙어있었다. 8번 A, B 이런 식으로. 교도관들이 이름 대신 침대 번호로 불렸다. 새벽 4시 50분쯤이면 일과가 시작됐다. 그때 일어나서 아침을 가져다 먹는 방식이었다. 식사는 우리끼리 ′탄탄탄′이라고 불렀다. 빵이랑 감자 위주로 탄수화물 종류만 있어서 그렇다. 빵에선 오래된 빵 특유의 냄새가 났다. 쉰내가 나서 나도 잘 못 먹었다.
<b>- 막막했을 텐데 어떻게 버텼나?</b>
먼저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적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됐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다들 충격을 받았다. 나도 겁이 났다. 올해 안에 아이 아빠랑 가족을 오래 못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때 같이 갇혀 있던 한국인 여직원들이 의지가 됐다. 어떻게든 내부 상황을 바깥에 알려야 한다고 대책을 논의하고 그랬다. 누가 침울해 하면 우리 이야기 영화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서로 농담하기도 했다. ″눈물을 흘려봤자 우리를 약하게 볼 뿐이다. 인터뷰 할 때도 당당하게 이성적으로 얘기하자″고 서로 다독였다. 하지만 사실상 제대로 된 인터뷰는 없었다.
한 차례 석방 직전에 멈춰 섰을 때 있지 않나. 그때는 다시 언제 귀국하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지급 받은 칫솔도 버린 상태였다. 씩씩하게 웃으면서 잘 지냈는데, 그날은 모두 허무해했다. 제일 강한 모습으로 임신부라고 나를 챙겨주던 친구도 눈물을 보였다.
<b>- 임신부라는 사실을 알리진 않았나?</b>
구금 시설 측에서는 조금 더 나은 수용동으로 옮겨줄지 물어보긴 했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했다. 혼자 다른 곳에서 방치되고 싶진 않았다. 한국인들하고 같이 지내는 것이 더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부 소식도 듣고 같이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송 중에 히스패닉 여성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놀라서 소리를 쳐서 도움을 요청했다. 죽을 것처럼 숨을 못 쉬고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 교도관이 ″걸어서 나와봐라″라고 하면서 피식 웃더라. 임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도 가볍게 여겼다. 나도 임신부인데, 이러는 것을 보니 ′정말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고 공포스러웠다.
나는 임시 초반이어서 입덧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너무 놀라서 그런지 입덧을 안 하더라. 혹시 아이가 잘못된 건지 걱정이었다. 그러다가 한미 정부 간에 협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입덧이 돌아오더라. 너무 끔찍했다.
<b>- 가족들이 엄청 걱정했을 것 같다.</b>
변호사 연락해보라거나 가족에게 어떻게 연락하면 된다는 안내가 전혀 없었다. 통역사 통해 요구하니 휴대전화에서 전화번호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같이 수감돼 있던 멕시코 직원이 종이를 빌려줘서 거기에 회사 연락망을 메모해서 외부에 연락하고 가족에게 연락을 부탁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가족들이 뉴스를 볼 때마다 울었다고 하더라.
<b>- 임신부가 있다는 소식에 많은 분들이 걱정했다.</b>
비행기 타고 오는 내내 가족을 만날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 착륙 3,4시간 전부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기도 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머리도 아프고 근육통이 밀려와서 누워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날 곧장 산부인과부터 달려갔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이 아기 심장도 잘 뛰고 건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 순간 딱 남편하고 같이 안도하고 미소 짓고 그랬다. 사실 임신 사실을 부모님도 잘 모르고 계셨는데, 병원 진료 끝나고서야 말씀 드렸다. 만에 하나라도 안 좋은 소식을 들으면 더 안타까워 하실 까봐 말을 못하고 있었다.
<b>- 석방 뒤에 먹고 싶은 음식은 없었나?</b>
엄마가 해주는 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집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에 엄마가 끓여 준 청국장을 먹고 나니 너무 살 것 같았다. 한국 음식이 이렇게 맛있었나,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다. 사소한 일상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변에 선언을 했다. ′나는 다시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b>- 정말 고생 많았다. 후유증이 남진 않았나?</b>
풀려난 다른 직원들 중엔 심리적으로, 트라우마가 있다는 얘기를 하는 분들도 있다. 잠을 잘 못자는 분들이 많다. 나도 아직 매일 매일 그 때 꿈을 꾼다. 집에서 자다 깼는데 교도소인 줄 알았다. ″내가 왜 방이 옮겨졌지? 누가 나 잘 때 옮겼나?″ 이러다가 ″아, 나 집에 왔지″ 자각을 하게 된다. 거기에 있었던 상황을 꿈꾸다 깨기도 한다. 내가 매우 잘 견뎠다고 생각하고 ″뭐 살면서 언제 또 이런 경험 해보겠냐, 참 특별하다″ 웃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도 내 자신이 잠을 깊게 못 잔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 너무너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싶다. 그 소송의 나라에… 다른 직원들도 소송하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하나 둘 하기 시작했다. 피해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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