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한수연

[World Now] 러시아 백신 '내가 맞겠다'…'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의 심정

입력 | 2020-08-14 11:35   수정 | 2020-08-14 16:05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맹물보다 나을 게 없다″…비웃음 산 러시아 백신 ′스푸트니크V′</strong>

러시아가 세계 최초로 등록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V′에 대한 우려와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백신 개발의 일반적 절차인 3단계 임상 시험을 거치지 않았고, 1·2단계의 임상 시험도 제대로 수행됐는지 확인되지 않아 효과와 안전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러시아 정부는 임상 1단계에서 백신을 1~2차례 접종한 38명 전원에게 중화 항체가 생성됐다고 주장했지만, 그 데이터와 결과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모든 절차를 밟았다′, ′내 딸도 맞았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세계 최초타이틀을 얻기 위한 무리수란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물보다 나을 게 없다.(오히드 야쿱 영국 서섹스대 박사)″는 혹평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러시아 백신을 적극 환대하고 나선 두 나라가 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내가 맞겠다″ 피실험자 자처한 두테르테</strong>
먼저 필리핀입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백신 무상 공급을 제안했다″며 ″백신이 도착하면 내가 첫 시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연구에 엄청난 신뢰를 갖고 있다. 러시아가 생산한 백신은 인류를 위해 정말로 좋은 일″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백신 등록을 마친 ′스푸트니크V′에 대한 임상 시험을 2천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 임상 시험에 두테르테 대통령과 필리핀 국민들도 참여하겠다는 뜻입니다.

정말이냐 의심쩍은 시선이 나오자 해리 로크 대통령 대변인은 다시 한 번 ″농담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대통령은 이미 늙었습니다. 필리핀 국민들을 위해 목숨도 희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중국에도 ″백신 달라″ 호소</strong>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7월에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직접 코로나19 백신을 요청했습니다.

″나흘 전 시진핑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필리핀이 먼저 코로나19 백신을 획득하거나 구매할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 (7월 27일, 국회 국정연설)

그러면서 영유권 등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중국의 소유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까지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해야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대통령이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미국 편에 서서 중국의 주장에 맞서왔던 필리핀이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을 돌연 포기한 것은 백신을 얻기 위해 중국에 굴종한 것이란 평가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엄격한 봉쇄에도 동남아 감염국 1위…′백신′만이 살길이다?</strong>

그는 왜 유독 개발되지도, 검증되지도 않은 백신에 이렇게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는 걸까요.

여기엔 필리핀의 심각한 코로나19 상황과 이를 둘러싼 두테르테의 정치적 위기가 관련돼 있습니다.
월드오미터 집계에 따르면(13일 07시 기준) 필리핀의 코로나19 확진자는 14만 3,749명으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습니다.

특히 8월 들어 일일 신규 확진자 수가 4천 명대로 전달보다 2배 이상 급증했고, 지난 10일엔 6,871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신규 확진자의 60% 가량이 수도권인 메트로 마닐라에서 발생하면서 필리핀 정부는 지난 4일부터 메트로 마닐라와 인근 지역의 방역 수준을 ′준봉쇄령′ 수준으로 높이고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8월 중순까지 연장했습니다.

메트로 마닐라와 인근 지역에선 지난주부터 2,7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택 격리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동남아에서 가장 길고 엄격한 폐쇄 조치를 계속하고 있으니 경제 상황도 좋을리 없습니다.

필리핀의 올해 2분기 경제성장률은 -16.5%로 사상 최악을 기록했고 지난해 39.6%였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올해 48%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신의 은총과 백신은 언제쯤…</strong>

그런데도 두테르테가 내놓고 있는 건 ′신의 은총′과 ′백신′ 카드뿐입니다.

″저의 간청은 조금만 더 참아달라는 겁니다. 약속합니다. 신의 은총으로 12월까지는 우리가 정상(normal)으로 돌아갈 수 있길 희망합니다. 제가 처음부터 말했듯이, 우리 함께 백신을 기다립시다.″ (7월 31일, 현지 라디오방송 연설)

하지만 이런 두테르테의 대처에 불만과 비난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대유행 사태를 헤쳐나갈 수 있는 보건 및 경제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는다.″ (리사 혼티베로스 상원의원)

″전염병에 대한 대통령의 대응은 중국의 백신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레나토 레이즈 시민단체 사무총장)

″백신은 ′허위의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빨리 구하는 데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필리핀 국민 건강권 연합 조시 산 페드로 박사)

특히 ′중국′ 백신에 의존하는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중국은 품질 좋은 약품을 만드는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모더나, 화이자, 옥스퍼드 등 (FDA 기준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옵션을 고려하는 게 이상적일 것이다.″ (리천, 필리핀 화이자 의료부장)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도 ″미리 (개발되지도 않은) 중국 백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대유행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고 두테르테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그럼 중국 백신 말고 러시아 백신이라도…</strong>

이렇다보니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러시아 백신에 손을 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이 다시금 상기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 2016년에도 두테르테 대통령은 섣부른 백신 접종으로 곤욕을 치른 바 있습니다.

필리핀은 2016년 세계 최초로 뎅기열 백신 ′뎅그박시아′를 대량으로 접종했지만, 이후 수십 명의 어린이가 부작용으로 사망해 백신 승인을 뒤늦게 철회한 바 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브라질 파라나주도 러시아와 MOU 체결</strong>

필리핀보다 더 발 빠르게 스푸트니크V 확보에 나선 정부도 있습니다.
코로나19 세계 2위 감염국, 브라질 남부의 파라나주 정부인데요.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세아라 등과 함께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발생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파라나주 정부는 현지시간 12일 러시아와 ′스푸트니크V′ 시험·생산을 위한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주 정부 대변인은 ″곧바로 양측이 참여하는 실무그룹을 구성해 기술이전과 생산을 위한 구체적인 협력 방안에 관한 협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백신의 생산과 접종을 위해서는 브라질 국가위생감시국의 최종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브라질 보건부는 러시아 백신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 실제 상용화로 이어질지는 의문입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가격까지 정해진 스푸트니크…백신 전쟁 승자 될 수 있을까?</strong>

미국 FDA가 정한 임상시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임상 1단계는 보통 20~1백 명이 참여해 수개월 동안 지속하며, 2단계는 수백 명이 참여해 최대 2년까지 지속될 수 있습니다.

3단계는 3백~3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해 1년에서 4년이 걸릴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최대 6년까지 걸리는 건 그만큼 안전과 효능을 담보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미국 역시 ′초고속 작전′으로 이런 절차들을 역사상 유례없이 단축시키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벌써 수출 가격까지 책정했습니다.

러시아 대형 제약사 알-파름 대표이사 알렉세이 레픽은 13일 현지 언론 ′로시야-24′와의 인터뷰에서 백신 수출 가격은 (1인 접종 분량인) 2회분에 최소 10달러(약 1만2000원)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산량이 대규모로 확대되면 더 저렴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부자나라들의 사재기로 코로나19 백신은 꿈도 꾸지 못하던 가난한 나라들에게 러시아 백신은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매력적일 수 밖에 없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