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김정인

[서초동M본부] "국정원에서 15글자 받는데 4년이 걸렸습니다"

입력 | 2021-04-10 07:57   수정 | 2021-04-11 10:41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정보공개 소송)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베트남 퐁니·퐁넛마을 학살…″국정원은 정보를 공개하라″</strong>

어제(9일) 서울지방변호사회 5층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 화상전화 연결 너머로 한 베트남 여성의 울분 섞인 목소리가 가득 울려퍼졌습니다.
[응우옌 티 탄/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생존 피해자]
″저는 생존자입니다. 그리고 그날의 참상을 몸으로 겪고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이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이러한 정보공개는 전혀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 씨.

그녀는 지금도 당시 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8년 2월, 베트남 중부 꽝남시 퐁니·퐁넛 마을. 안전지대로 불렸던 이 마을에서 느닷없이 주민 70여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이 아이, 여성, 노인이었습니다.

어렵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한국군이 마을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8살 소녀였던 응우옌 씨는 당시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었고, 그녀 자신 역시 배에 큰 총상을 입었습니다.

2000년대 베트남 참전군인들이 언론을 통해 하나 둘 증언을 하기 시작하면서 학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학살 다음해였던 1969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참전군인들을 조사해 신문조서와 보고서를 남겼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참전군인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을 신문조서와 정보기관 차원의 보고서…이 문건에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왜 죽임을 당한 것인지, 그날의 진상이 담겨 있지 않을까.

응우옌 씨는 국정원에 자료를 공개해달라고 요청했는데요.

하지만 국정원이 자료를 계속 공개하지 않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피해자를 대신해 자료 목록이라도 공개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4년 간의 소송…단 15글자만 공개한 국정원</strong>

2017년 시작된 소송은 4년이나 계속됐습니다.

그동안 판결은 5번이나 있었는데요.

처음에 국정원은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고, 법원은 그럴 우려는 없다며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러자 국정원은 조사 받은 군인들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며, 또 정보공개를 거부했습니다.

1심부터 다시 시작된 소송에서 법원은 그러면 기록에서 군인들의 생년월일만 빼고 나머지를 공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자료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 공개할 가치가 인정된다고도 지적했습니다.

[ 서울고등법원 2020.10.14 판결문 中 ]

″피조사자들의 사생활 비밀 또는 자유 침해할 우려가 있는 생년월일을 내지 출생년도에 관한 정보를 제외 내지 삭제하고, 피조사자들의 성명과 조사일시 등이 기록된 나머지 목록 부분만을 공개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나머지 부분만으로도 대한민국 정부가 퐁니 사건에 관해 관련자들을 조사했는지 여부 등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이므로, 공개할 가치도 인정된다″

지난 3월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드디어 공개된 국정원 정보.

응우옌 씨가 끔찍했던 총격 50여 년만에, 또 정보를 공개해달라고 소송을 낸지 4년만에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건, 달랑 15글자에 불과했습니다.

참전군인 각 소대장 3명의 이름과 출생 지역이 전부, 1칸에 5글자씩 그래서 15글자였습니다.
해당 문건의 작성일시와 형태 등의 내용은 싹 비워져 있던 겁니다.

재판부는 ′성명과 조사일시 등이 기록된 나머지 목록 부분을 공개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지만, 국정원은 군인들의 이름, 지역만 남긴 채 나머지는 빈칸으로 보내왔습니다.

참전군인 이름이 7번째 칸부터 쓰여 있기 때문에, 위에 6건의 자료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역시 모두 빈칸이었습니다.

[임재성 변호사]
″국정원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50년 전에 정보기관이 진상규명을 했는데, (국정원은) 이 정보에 대해서는 전혀 공개할 생각이 없습니다.″

국정원은 ″판결 취지에 따라 제공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문서 내용이 아니라 문서 목록을 공개하라는 판결″이었다며, ″공개 대상 정보인 3명의 생년월일(출생년도)을 제외하고 성명ㆍ지역명(출생지 또는 본적지)이 명기된 내용을 그대로 제공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응우옌 티 탄/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생존 피해자]
″국정원에서 성의 없는 태도로 단지 소대장들의 이름과 거주지역 정도, 15글자만 공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룰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많이 힘들었습니다…모든 정보를 공개해주시길 바랍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빈 깡통을 주고 있다″…국정원의 성의 없는 정보공개 행태 </strong>

국정원의 부실한 정보공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 대법원은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의 민간인 불법사찰 문건을 피해자들에게 직접 공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국정원은 TF팀까지 꾸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과 박재동 화백 등 사찰 피해자들에게 문건을 보냈습니다.

보도자료를 통해 사찰을 사과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정작 문건을 받아본 피해자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김승환 전북도교육감은 ″국정원은 2017년 11월 21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 수사 검사가 저에게 보여줬던 사찰 기록마저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SNS를 통해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배우 문성근 씨가 받은 국정원 문건 역시 곳곳이 빈칸이었습니다. ′좌파 문화예술단체 현황 및 주요 인물′이라고 작성된 문건은 제목만 빼고는 모두 비어있었습니다.

[김남주 변호사]
″국정원이 사찰 피해자 정보공개에 대해 너무 무성의한 거죠, 문서를 특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비밀정보기관이 갖고 있는 걸 점쟁이도 아니고 어떻게 특정을 합니까...국정원이 주는 모든 문건에 중요한 부분은 삭제가 되어 있습니다. 보도자료로는 정보공개를 잘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빈 깡통을 주고 있는 셈입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응우옌 씨의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12일 재판</strong>

응우옌 씨 측은 우리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도 함께 냈는데요. 오는 12일 월요일 열리는 2차 공판에서 국정원에 문건 공개를 다시 한 번 요청할 계획입니다.

대리인단은 국정원에 당시 장병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기록 일체를 법원에 송부할 것을 신청했고, 담당 재판부는 신청을 받아들여 국정원에 조회서를 보낸 상태입니다.

대리인단은 만약 국정원이 법원 조회에 응하지 않고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다시 정보공개청구를 하고 기나긴 소송절차에 나설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날 그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제쯤에야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까요.

응우옌 씨의 바람은 언제 이뤄질 수 있을까요.

[응우옌 티 탄]
″한국 정부가 그날 학살의 사실을 인정할 것과, 참전 군인의 단 한마디의 사과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