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박성호

[워싱턴 나우] 투표하기 어려워지는 미국…바이든에겐 '아프간'보다 악재

입력 | 2021-09-03 14:15   수정 | 2021-09-03 14:15
′우리의 투표권을 제한하지 말라′.
이런 구호가 제3세계 국가도 아닌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부에서 울려퍼졌습니다.

지난주 토요일(8월 28일) 워싱턴DC에서 있었던 거리 행진과 집회에 가봤는데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유명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 58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는데, 올해는 유독 투표권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두드러졌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투표장 ′인종분리′ 멈춰라″…시민들, 투표권 보호 요구 </strong>

영상 33도의 무더운 날씨에도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몰려들었는데요. 그들이 들고 있던 팻말 중 가장 많이 눈에 띈 것은 ′흑인의 표는 소중하다′(Black Votes Matter)였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흑인 참가자는 ″지금 미국에선 투표장에 접근할 권리를 놓고 제2의 인종분리 정책(Apartheid)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행진 인파는 연방의회 의사당을 배경으로 길게 이어진 잔디밭 ′내셔널 몰′에 집결해 집회를 가졌습니다. 연단에는 지난해 경찰관의 무릎에 짓눌려 숨진 조지 플로이드의 형제들도 나와, ′2등 시민′으로 살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흑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연단 밑에서 만난 스콧이란 백인 남성은 ″투표권 제한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한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미국이 체면을 구겼는데, 이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사안″이라고 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투표권 제한′…미국에서 대체 무슨 일이</strong>

21세기 미국에서 투표권을 제한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그리고 왜 흑인들이 강하게 반발할까요?

올해 들어 미국에서는 조지아, 플로리다, 애리조나 등 17개주에서 이른바 ′투표 제한법′(voting restrictions bill)으로 불리는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주지사가 공화당 소속이거나 의회 다수파가 공화당인 주들입니다.

법안은 1) 우편투표, 조기 투표를 축소하고, 2) 유권자 등록 절차를 까다롭게 하며, 3) 선거관리 공무원의 권한은 줄이되 정당 참관인이 선거 결과에 이의제기를 쉽게 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조지아주는 선거관리 당국이 유권자들에게 먼저 나서서 우편투표 신청서를 발송하지 못하게 했고, 우편투표시 신청기한을 단축했으며, 우편투표 용지를 넣는 드롭박스의 사용도 제한했습니다. 심지어 조기 투표시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플로리다주는 조기 투표 기간을 선거일 전 8일로 축소하고, 투표 시간도 하루 8시간으로 단축했으며, 우편투표함의 숫자도 대폭 줄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대선 때 우편 투표, 조기 투표에 적극 참여했던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즉 흑인, 라티노, 젊은층의 투표율을 떨어뜨려 민주당 표를 줄이자는 공화당의 계산이라는 것이죠.

지난해 10월 대선을 3주 앞두고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조기 투표 현장에 가봤습니다. 이른 아침에도 줄이 건물 밖으로 5백 미터 이상 늘어섰습니다. 우편투표를 수거하는 옆에서 보니 우체통 한 곳에서만 1천 통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 조기 투표 참가자는 1억 명을 넘겨 4년 전보다 2배 이상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대선 투표율도 120년 만의 최고치인 66.7%까지 치솟았습니다.

공화당 입장에선 그래서 패배했다고 봤고, 투표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민주당 표가 덜 나온다고 보는 셈이죠.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집단 탈출′에 ′체포′ 엄포…′투표법′ 극한 전쟁</strong>

선거의 승패가 갈릴 문제니 민주당도 가만 있을 순 없습니다. 투표제한법을 놓고 양당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는 텍사스주의 사례에서 나타납니다.

텍사스주 공화당은 24시간 투표 금지, 승차 상태에서 투표하는 ′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금지를 뼈대로 하는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주의회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여서 처리를 자신했는데 복병을 만났습니다.

표결 처리를 위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게 민주당 의원 50여 명은 지난 7월 12일 의사당을 빠져나와 워싱턴DC로 ′집단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러자 그렉 애보트 텍사스 주지사(공화당)는 특별 회기를 두 차례나 연장해 여름 휴가철에도 의회 문을 열어놨습니다. 책무를 저버린 민주당 의원들이 텍사스로 돌아오면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공화당은 민주당 의원들이 머물던 워싱턴 시내 호텔에 카메라맨을 배치했습니다. 혹시라도 호텔 수영장에 의원들이 쉬러 나오면 ′도피 외유′를 즐긴다고 공격하려 했죠.

결국 민주당 의원들은 한 달 넘게 버티다 텍사스로 돌아왔고, 표 대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원에 이어 지난 화요일(8월 31일) 상원에서도 투표제한법이 통과됐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공화당, 내년 중간선거·2024년 대선 겨냥</strong>

공화당은 어떤 명분을 내세울까요? 투표 제한이 아니라 투표 관련 규정의 강화라고 설명합니다. 선거 사기를 방지하고,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 주장합니다.

지난 대선이 사기였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주장을 추종하는 트럼프 지지세력의 표심에 동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공화당은 내년 중간선거와 다음 대선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요인을 미리 제거했습니다. 트럼프가 2024년 재도전에 나선다면, 걱정거리 하나는 정리한 셈이죠.

투표 제한을 제도적 장치로 확보한 주가 전체 50개 가운데 벌써 3분의 1이 넘습니다. 대부분 공화당 아성이긴 하지만, 대선의 향배를 가를 경합주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해 애리조나주에선 0.3% 차, 조지아주에선 0.2% 차로 바이든이 승리했습니다. 공화당이 투표제한에 왜 그렇게 매달리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죠.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반격 카드 마땅치 않은 민주당…′필리버스터′ 폐지 요구도</strong>

바이든 대통령도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7월 13일 대국민 연설에서 투표 제한법 확산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 위협″이라고 했습니다. 과거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던 차별법 ′짐 크로′(Jim Crow)의 21세기판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바이든과 민주당은 연방 차원의 투표법 추진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포 더 피플 액트′(For the People Act)로 불리는 투표권 법안인데요. 전국적으로 조기 투표를 의무화하고, 각 주에서 통과시킨 투표 제한법을 무효화한다는 내용입니다.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에서는 통과됐지만, 여야 의석 수가 50대 50으로 같은 상원에서는 처리가 어렵습니다. 이미 두 차례나 부결된 바 있는데요. 법안이 상정되면 공화당은 ′필리버스터′, 즉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로 무산시킬 태세입니다.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하려면 상원의원 60명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 문턱을 넘는 게 불가능하다 보니 민주당 내 진보파는 물론 주류 의원들까지 ′필리버스터′ 저지 요건을 없애자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주말 집회 현장에서 만난 백인 부부는 ″필리버스터를 박살 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제 다음 주면 연방의회가 다시 문을 엽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는 투표제한법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과제가 절박합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에 관한 책임 추궁도 방어해야 합니다. 내년 중간선거로 가는 길이 험난해 보입니다.

-박성호(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