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5-07 10:30 수정 | 2022-05-07 12:37
<b style=″font-family:none;″>< 영국 판사의 질타 ″경찰은 무능, 검찰은 무책임″ ></b>
지난 2014년 12월, 영국 중앙형사법원 올드 베일리 법원 법정, 웬디 조셉 판사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공개적으로 검찰과 경찰을 싸잡아 비난한 겁니다. 조셉 판사는 ″경찰이 무능하다″고 했습니다. 검찰을 향해선 ″책임감이 없다″고 질타했습니다.
당시 법정에선 횡령과 사기로 3천 700만파운드, 약 584억원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사기일당 7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경찰은 일당이 2013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대학과 동물원, 주류업체와 생명보험 회사 등을 통해 돈을 세탁해 횡령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검찰은 경찰이 넘긴 수사내용 그대로 이들 7명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검경이 제시한 범행 일지 곳곳이 틀렸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법원에 제시한 증거들도 앞뒤가 안 맞았습니다. 경찰이 돈세탁에 동원된 계좌 200여개를 아예 조사하지 않은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재판 도중 횡령 금액이 3천 700만 파운드에서 4천만 파운드로 늘었나는 황당한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영국은 미국처럼 배심재판을 합니다. 조셉 판사는 배심원단을 향해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이 대단히 잘못됐다는 사실을 배심원 여러분들이 알 것이다. 검찰 측도 역시 공소 유지가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면서 “반쪽짜리 수사 결과를 갖고 재판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조셉 판사는 더 이상 재판을 진행할 수 없다고 보고, 배심원들을 해산시켰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 우리나라도 수사·기소 분리되는데, 혹시 영국처럼? ></b>
영국은 수사와 기소가 분리돼 있습니다. 경찰은 수사하고 검찰은 기소합니다. 경찰·검찰이 서로 견제하면서 협력하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판사가 법정에서 ″경찰은 무능하고 검찰은 무책임하다″고 공개 질타한 겁니다.
영국 검찰·경찰을 감시하는 감찰처는 검경이 ″습관적으로 미흡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2017년 감찰처 통계를 보면 검찰이 기소한 146개의 주요 사건 중 56개가 경찰의 부실 수사로 공소 유지에 실패했습니다. 또, 검찰이 경찰의 미진한 수사를 문제 삼아 보완한 사건은 4개 중 1개꼴에 불과했습니다.
걱정이 생깁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수사와 기소를 분리시키려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3일,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거쳐 공포됐습니다. 검사는 경제 범죄와 부패 범죄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사건을 수사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경찰이 송치한 사건에 대해선 검사가 보완수사를 할 수 있되 수사를 확대하지 말라고 제한했습니다.
아직 검찰에게 일부 수사기능이 남아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른바 ‘검수완박’ 2탄, 중대범죄수사청 설립이 마무리되면, 검찰의 수사기능은 완전히 없어집니다. 경찰과 중수청이 수사하고 검찰은 기소만 하는 체제가 되는 겁니다. 즉, 영국과 비슷해집니다.
혹시 우리나라도 ″경찰은 무능하고 검찰은 무책임″한 사법체계를 갖추게 되는 건 아닐까요?
한 나라의 형사사법시스템이 뒤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다른 나라들의 시스템은 어떨까, 궁금함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저희는 미국, 독일, 영국, 일본의 시스템을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은 영국의 사례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요 선진국 중에서 그나마 우리와 비슷한 수사·기소 분리 모델을 채택한 게 영국이기 때문입니다.
<b style=″font-family:none;″>< 막강했던 영국 경시청… 경찰 견제하려고 수사·기소 분리 ></b>
먼저, 영국이 왜 수사와 기소를 분리했는지, 영국의 역사를 좀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영국은 왕국입니다. 시민들이 왕권을 축소시키면서 권한을 나눠 가진 과정이 바로 영국 역사입니다. 그래서 영국 시민들은 왕권 아래 놓인 검찰이 시민을 구속하고 처벌받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국의 형사사법 시스템은 그래서 ‘사소’ 개념으로 시작됐습니다. ′사소′, 즉 개인(사)이 소송(소)을 제기한다는 뜻입니다. 국가기관이 아니라, 개인이 다른 개인을 상대로 민사 뿐 아니라 형사소송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은 압수수색도 할 수 없고 수사권한도 없습니다. 수사 인프라나 노하우도 없겠죠. ′사소′만으로는 범죄자가 설치는 걸 막을 없다보니, 1829년 최초의 경찰 조직 런던경시청이 세워집니다. 영국 경찰은 수사권은 물론 기소권까지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 살인사건을 계기로 사정이 달라집니다. 1972년 런던의 성노동자 맥스웰 콘페이트가 집에서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수사 끝에 18살, 15살, 14살, 3명의 소년들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사망 추정 시각에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였습니다. 소년들은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2년 뒤 내무부 장관이 바뀌면서 대한 재조사가 이뤄집니다. 법의학적 분석 결과 사망 추정시간부터 완전히 틀렸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심지어 소년들의 최초 자백은 경찰의 가혹 행위에 따른 허위 자백이었습니다. 소년들은 1975년 다시 재판을 받아 무죄를 받았습니다.
경찰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고, 14년의 긴 논의 끝에 1986년 비로소 검찰이 세워졌습니다. 명칭은 CPS(Crown Prosecution Service)입니다. 이때 검찰은 공소 유지 권한만 가졌다가, 17년 뒤 2003년에야 기소권까지 가져왔습니다. 검사가 기소할만큼 증거가 탄탄한지 미리 확인해야, 재판도 수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된 겁니다.
검찰이 설립되고 2년 뒤, 영국은 큰 사건만 맡는 또 다른 수사기관을 세웁니다. 1988년 설립된 중대범죄수사청(SFO)은 법무부 장관 산하의 검찰 기관으로, 주로 대기업들의 대형 경제 범죄 사건을 맡습니다. SFO는 수사와 기소, 공소유지를 전부 합니다. 법리 관계와 사실관계가 복잡한 대기업의 배임 사건 등은 처음부터 수사에 참여한 검사가 재판까지 책임져야 효율적이라고 본 겁니다.
<b style=″font-family:none;″>< 우리나라는? 검찰 키웠다가… 70년 만에 수사·기소 분리 ></b>
결과적으로 영국의 수사권·기소권 분리도 오랜 전통을 가진 게 아닙니다. 여러 시행착오의 결과로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기소하는 제도는 약 20년 전에야 만들어진 겁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검찰이 경찰 수사에 법률 자문을 하는 일종의 수사지휘까지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됐습니다. 영장 없이도 사람을 막무가내로 구속하던 일제강점기 경찰을 견제하기 위해, 검찰이 경찰을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검찰에게 수사권, 기소권, 공소유지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까지 모두 다 줬습니다.
경찰을 견제하기 위해 검찰을 둔 건 영국과 비슷하지만, 많은 권한을 한꺼번에 다 준 겁니다. 70년 가까이 지나, 문재인 정부는 막강해진 검찰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습니다. 경찰이 갖고 있던 기소권을 검찰에 나눈 영국,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에 넘긴 한국. 종착역은 ‘수사·기소 분리’로 같았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 ′검수완박′ 2탄 중수청‥ 영국 국가범죄수사청과 닮은듯 다른듯 ></b>
′검수완박′의 2탄이자 수사권·기소권 분리의 마무리는 중대범죄수사청의 설립입니다. 이 중수청 역시 영국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국가경찰 조직인 국가범죄수사청(NCA) 얘기입니다.
NCA는 2006년 설립 때부터 ‘영국형 FBI’라고 불렸습니다. 중수청을 ′한국형 FBI′라 부르는 것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NCA는 마약, 인신매매, 아동 성폭력 등 중대범죄와, 48개 자치경찰 관할을 넘나드는 사건을 효율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지난 2017년 당시 이성한 경찰청장과 황운하 수사구조개혁단장은 ‘수사·기소 분리’ 의제를 꺼내면서 NCA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도 얘기했습니다.
중수청을 어느 부처 산하에 둘지부터 검경간 혹은 여야간 논쟁이 예상됩니다. 미국 FBI는 미국 법무부 산하입니다. 영국 NCA는 내무부 산하 기관입니다. 그래서 황운하 단장은 우리나라도 중수청을 행정안전부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영국의 법무부는 법원과 교정행정, 사법정책에 관여할 뿐, 수사 및 기소 관련 업무는 관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국형 FBI′ 중수청은 미국처럼 수사를 관장하는 법무부 산하로 둬야 한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리기도 합니다.
또, NCA는 영국의 오랜 자치경찰제의 보완제로 신설된 조직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중앙집권적 형태의 경찰의 보완제로 자치경찰제가 최근 도입됐죠. 이미 중앙집권적 경찰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중수청이 오히려 ′옥상옥′이 될 수 있습니다.
수사·기소 분리가 권한 견제의 차원에서 이론적으로는 옳은 방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 작동이 쉽지 않다는 점은 웬디 조셉 판사의 질타에서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능한 경찰, 무책임한 검찰″을 피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무능한 경찰, 무책임한 검찰″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보입니다. 경찰은 이미 2021년 각 지방경찰청에 부패범죄, 금융범죄, 마약범죄 등 분야별로 전문 수사대도 만들면서 수사역량을 키워왔습니다. 또한 70년 역사를 가진 검찰이 경찰의 수사 결과만 보고 무책임한 기소로 국민들에게 피해를 줄 거라고도 결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도 영국처럼 앞으로 실무 영역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조정 작업도 계속 있어야 하고요.
이번 형소법, 검찰청법 개정안 통과는 한 달 만에 신속하게 진행됐습니다. 중수청이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그 모든 걸 논의할 사개특위는 12월까지 기한을 뒀습니다. 그 사이 충분한 토론과 협의를 거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