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10-04 22:40 수정 | 2022-10-04 22:40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 미용실에서 일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했던 엄마 임경애 씨, 실종 24년 만에 노숙인 시설에서 돌아온 그녀는 전과 달리 지적장애와 대소변을 못 가리는 증세를 보였다
- 전두환 정부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부랑자들에 대한 대규모 청소를 실행했다
- 서울시의 2017년 <노숙인생활시설 인권실태 정기조사>, 영보자애원 주요 인권 침해 사례를 특이사항 없다고 보건복지부에 보고해 </strong>
4일 밤 PD수첩 <엄마의 24년, 거리에서 청소된 사람들>에서는 1983년 출근길에 실종돼 24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임경애 씨와 과거 노숙인 수용 시설에 강제 입소하게 된 피해자들에 대해 취재했다. 임경애 씨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영보자애원에서 확인한 엄마의 신상기록카드. 기록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은 같은 해 임씨가 <동부여자기술원>이란 곳에 입소됐다는 것. 그곳은 1980년대 윤락 여성들을 보호하고 계도 및 직업훈련을 돕는 목적으로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기관이었다.
아들 오충빈 씨가 2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던 어머니의 소식을 알 수 있었던 건 2007년 5월 도착한 우편을 통해서였다. <서울시립 영보자애원>이란 노숙인 수용시설에서 엄마 임경애 씨를 모시고 있다는 것. 집으로 돌아온 임경애 씨는 실종 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씨의 이모는 “배도 막달처럼 나왔고 한쪽 눈이 시커매요. 이도 거의 없고” 이모는 무엇보다 언니 임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지능검사를 했고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종 전에는 미용실에서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했던 임씨. 그녀는 가족에게 서울역에서 누가 자신을 데려갔었다고 밝혔다.
5년 전 <영보자애원>의 노숙인생활시설 인권실태 조사를 담당했던 민간 조사원 박병섭 씨. 그는 당시 조사대상자 십여 명을 인터뷰하며 충격적인 내용을 듣게 됐다. 시집간 언니를 보러 서울역에 온 여성이 길을 찾다가 노숙인 수용시설에 강제 입소됐고, 그 뒤로 아직도 시설에서 살고 있다는 것. 또 다른 조사원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혹은 버스 정류장에서 잡혀 시설에 강제 입소됐다는 말도 들었다고 밝혔다. <영보자애원>에서는 강제 입소된 사람들에 대한 의혹에 사실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곳의 원장 수녀님은 “여기를 전부 다 봐도 갑자기 차에 태워갔다는 분은 없었다”라며 임경애 씨의 경우 1986년 3월 서울시가 운영하던 <대방동 부녀보호소>에서 옮겨 온 것일 뿐 이전 시설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PD수첩은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임경애 씨와 입소 경위가 유사한 이들이 여럿이었고 대부분은 서울시립 영보자애원이 개원할 때 서울 대방동 부녀보호소에서 한꺼번에 옮겨온 것으로 확인됐다. 대방동 부녀보호소는 오갈 데 없는 부랑 여성과 성매매 여성을 일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시가 운영하던 기관이었다. 동네 주민 일부는 그곳이 마치 교도소처럼 차단됐고 탈출을 시도하는 여성들이 많았다고 했다. 1960년대부터 설립된 <대방동 부녀보호소>는 군사정권 시절 대표적인 여성 인권침해 공간으로 알려졌다. 여성 수용시설에 대한 연구를 한 황지성 박사는 “임씨가 실종된 1983년은 경찰의 단속이 센 상황”라고 설명했다. 임씨와 비슷한 시기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놀던 한 여성도 경찰 같은 사람이 와서 무작정 잡아가 <동부여자기술원>으로 넘어갔다는 것. “임경애 씨의 경우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충분히 잡혀갔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사회 정화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부랑인 단속은 전두환 정부의 주력 사업이었다. 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대외적으로 깔끔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정화사업을 펼쳤다. 행색이 초라하거나 불량해 보이면 집과 가족이 있어도 부랑인으로 몰려 강제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1981년 10월에는 대통령의 지시로 구걸행위자 보호대책도 수립됐다. 주요 내용으로는 부랑인 단속을 늘리고 전국에 부랑인 시설을 확충하라는 것. 올림픽을 앞두고 ‘거리 청소’가 시작된 셈이었다.
군사정권 시절 최악의 인권유린 사례로 꼽히는 형제복지원은 이 시기 정부의 지원 아래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성장했다. 1975년부터 십여 년간 형제복지원을 거친 사람만 3만 8천여 명. 1982년 당시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학생 최승우 씨는 한 경찰에 의해 형제복지원 끌려갔다.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소대장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생니까지 뽑혀 이후 젊은 나이에 틀니를 해야 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굶거나 약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의 공식 사망자만 657명. 사망자의 시신은 암매장됐고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팔려나갔다고 알려졌다.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가 터미널에서 경찰에 잡힌 연생모 씨.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강제 노역과 구타를 견디며 4년을 보냈다. 그는 “교도소는 형이 확정돼 나갈 날짜는 알고 있는데 이곳은 나갈 날짜도 알 수 없다”라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힘들어했다.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410호를 근거로 마구잡이식으로 부랑인 단속이 가능했다. 훈령에 부랑인의 정의를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 등의 개념이 모호했고 행정기관의 단속 권한까지 명시하면서 경찰들은 영장 없이도 부랑인을 잡아들이는 게 가능해졌다. 경찰은 형제복지원에 사람을 넘기면 가산점도 주어졌는데, 1986년 형제복지원의 전체 수용자 3,975명 중 3,117명이 경찰에 잡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1984년부터 9년간 성인 부랑인시설 수용 현황을 보면 행정기관의 의뢰로 수용된 사람은 전국적으로 6만 8천여 명. 그 절반 가까이가 내무부 훈령이 폐지되기 전인 80년대 중반에 수용됐다.
임경애 씨가 머물렀던 서울시립 영보자애원은 1985년 개원했다. 이곳은 서울시에서 복지사업을 민간위탁을 받아 대방동 부녀보호소에 있던 800여 명을 수용해 운영했다. 2017년 <영보자애원> 인권실태 조사에서 면담에 참여한 91명 가운데 88%는 자의로 입소하지 않았거나 입소 경위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10명 중 4명은 경찰에 혹은 타의에 의해 강제로 끌려왔다는 것. 하지만 서울시가 보건복지부에 보낸 최종보고서엔 주요 인권침해 사례를 ‘특이사항 없음’라고 명시돼 있었다. PD수첩은 면담에 참여한 91명 중 88%가 자의로 입소하지 않았는데 최종보고서에 해당 내용이 반영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서울시는 ‘자진 입소가 어려운 노숙인 시설 고유의 특성이 있으며 입소자들 대부분이 정신, 지적장애가 있어 질문을 이해하거나 응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라고 답했다.
임씨는 집으로 돌아와 3년 동안 건강 상태가 악화돼 결국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임씨의 뜻 모를 얘기가 신경 쓰였다고 했다. 매일 알 수 없는 약을 주고 아침이 되면 사람이 죽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영보자애원 관계자는 의무기록상 2005년경 임씨는 이미 고혈압 약밖에 먹지 않았으며 임씨가 퇴소할 때는 건강하다고 기록돼있다고 답했다. 그 외 이전 기록들은 문서 보존 연한이 지나 모두 폐기된 상황이었다. PD수첩은 시설 내 사망한 이들의 기록은 보관돼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개원 이후 올해까지 총 입소자 1,885명 중에 전원 및 퇴소자 819명을 뺀 1066명. 이중에 750명은 이미 사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약칭 진실화홰위원회는 여성 수용시설의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그런데 이미 지난 8월 24일 진실화홰위원회는 형제복지원의 사건이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라고 발표한 바 있다. 1987년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기까지 35년의 시간이 걸린 것. 하지만 이 결정에 법적 구속력은 없었다. 남찬섭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저희가 조사한 바로 조사 대상이 됐던 분들 중에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45%가 기초생활수급자”라고 설명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오랫동안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인 끝에 관련법이 만들어졌고 진실이 규명됐지만, 피해자들의 배상과 보상을 받기까지는 난관이 남아있었다. 정부가 적극적인 피해 보상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