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앵커: 엄기영,백지연

[12.12 16년]반란군의 병력 동원 상황[윤도한]

입력 | 1995-12-12   수정 | 199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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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16년][반란군의 병력 동원 상황]

● 앵커: 참모총장 연행에 성공한 반란군은 동시에 서울지역에 군 병력을 출동시켜서 육군본부와 국방부장악에 나섭니다.

육본을 장악하라.

국권탈취를 위한 반란군의 병력동원 상황을 윤도한 기자가 보도 합니다.

● 기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체포한 반란군은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군 병력을 출동시킵니다.

반란군 측은 먼저 기동성이 뛰어난 공수부대에게 육군본부 점령을 지시했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박희도 1공수여단장은 김포에 있는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던 공수부대를 끌고 육군본부를 향했습니다.

병력규모는 890여 명.

이들 1공수여단은 이곳 행주대교를 건넙니다.

12월 13일 새벽 0시 5분이었습니다.

이들은 행주대교 검문소의 30사단 병력을 무장해제 시킨 뒤 육군본부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기도 부평에 있는 9공수여단을 육군본부로 불러들입니다.

● 이민영 소장(연합사 정보참모부): 10대의 트럭에 병력을 싣고 서울 쪽으로 향하는 군용트럭이 있었다는 보고가 미군 측으로부터 들어왔거든요.

부평에 있는 9공수가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요.

●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 응!

● 기자: 그러나 윤성민 육군참모 차장은 12월 13일 새벽 0시 10분, 윤흥기 9공수여단장에게 부대복귀를 명령합니다.

출동하던 9공수여단은 결국 이곳 부천 I.C에서 방향을 돌려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순간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자칫 9공수여단에 의해 진압될 뻔한 1공수여단은 유유히 육군본부에 도착해 경비 병력에게 총격을 가하며 육본을 점령했습니다.

1공수여단 일부 병력은 또 국방부를 장악했습니다.

●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 그러니까 지금 1공수에서 와가지고 육군본부, 국방부에 갔단 말이지요.

● 윤성민 중장(육참차장): 네, 지금 다 점령이 된 것 같습니다.

● 기자: 1공수여단이 육본을 향해 출동하던 시각 전두환氏의 지시를 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병력을 이끌고 서울 거여동 특전사령부에 난입해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뒤 13일 새벽 2시, 640여 명의 공수 부대원들을 경복궁으로 출동시킵니다.

장기오 5공수여단장 역시 전두환氏의 지시를 받고 480명 규모의 공수부대 병력을 새벽 2시에 육군본부 쪽으로 출동시켰습니다.

이와 함께 노태우 9사단장은 구창회 9사단 참모장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이필섭 9사단29연대장은 13일 새벽 2시 20분 1,390여 명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새벽 3시 반 중앙청을 점령했습니다.

이들은 정식 지휘계통인 이건영 3군사령관의 병력출동 금지지시를 무시한 채 병력을 동원한 뒤 허위보고까지 합니다.

●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 어디 출동한다고 그러는데 무슨 소리야?

● 구창회 대령(9사단참모장): 연대가 말 입니까?

●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 응!

● 구창회 대령(9사단참모장): 연대 출동 안합니다.

●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 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 구창회 대령(9사단참모장): 연대 출동 안합니다.

● 기자: 13일 새벽 2시 반, 제2기갑여단장인 이상규 준장은 대전차 포탄과 고폭탄을 실은 전차 35대와 16전차 대대 180명 규모의 병력을 출동시켜 역시 중앙청을 점령했습니다.

이 또한 이건영 3군 사령관의 지시를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 어디 다른데서 전화 오더라도 절대 움직이면 안돼.

● 이상규 준장(2기갑여단장): 예 알겠습니다.

●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 O.K, 들어가요.

● 이상규 준장(2기갑여단장): 계속 복무하겠습니다.

● 기자: 중앙청이 반란군들의 손에 점령된 시각은 13일 새벽 3시 반쯤, 이때 대한민국의 군권은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어 새벽 5시, 박희모 30사단장은 330명의 30사단 90연대 병력을 동원해 새벽 6시 20분 고려대에 진주시킴으로써 반란군은 확고한 보호막을 쳤습니다.

반란군이 동원한 병력은 공수부대 2,000여 명 등 모두 5,000여 명.

60만 대군은 새벽에 동원된 이들 5,000여 명의 병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 장교A: 뭐하면 또 좋은 자리 나가려고 하겠지 뭐.

● 장교B: 우리 박형 어디 한자리 없는가?

● 장교A: 이번에 바로 장군으로 해가지고.

MBC뉴스 윤도한입니다.

(윤도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