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의 시험을 치르고 나온 수험생의 얼굴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시원함과 아쉬움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정경재/사법시험 응시자]
″저한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굉장히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올해 응시인원은 지난해 1차 합격자를 포함해 4천100여 명으로 지난해와 비슷했지만 최종 합격 정원은 100여 명으로 크게 줄어 경쟁률은 예년보다 크게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최광훈/사법시험 응시자]
″기회의 측면에서 사법시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로스쿨에 들어가는 일단 진입장벽 자체가 높고 또 들어가는 자체가 어렵고, 사실상의 나이 제한이 있다고 보고 비용 측면에서 장학금 제도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앵커 ▶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던 사법시험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건데요.
시대에 따라 시험 제도나 과목도 조금씩 바뀌어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법시험의 역사를 유선경 아나운서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 유선경 아나운서 ▶
광복 이후 1947년에 치러진 ′조선 변호사시험′의 합격증서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사법시험인데, 故 서일교 전 대법관이 지난 1947년 10월 16일 받은 합격증서를 기증해 대검찰청이 지난해 공개했습니다.
사법시험은 1950년에는 고등고시 사법과로 불리기도 했는데요.
머리수건까지 질끈 동여매고 시험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1963년 들어 ′사법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험이 실시됐습니다.
1980년대에는 국사와 국민윤리가 필수과목이었고, 2004년부터는 토익과 토플 등 영어시험 성적이 도입됐습니다.
이번에는 과거 사법시험의 모습을 영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리포트 ▶
[대한뉴스 (1958년)]
″금년으로써 10번째로 실시되는 고등고시 필기고시가 8월 18일부터 22일까지 서울대학교 고시장에서 4천여 응시자의 가슴을 설레는 가운데 막을 열었습니다.″
[대한뉴스 (1957년)]
″총 응시자 약 4천 명 중에서 사법과 108명, 행정과 11명 기술과 12명 합계 131명이 합격해서 1월 22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관계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국무원 사무국장으로부터 합격증이 각자 부여되었습니다.″
[대한뉴스 (1972년)]
″모든 어려움을 의지로써 이겨낸 형제가 제14회 사법시험에 나란히 합격했습니다. 서울 종로구 동승동에 박장우· 박홍우 형제가 이들인데 형은 신체가 부자연스럽고, 올해 19살의 아우는 이번 사법시험 합격자 가운데 최연소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이 형제들의 영광에는 어머니 황을연 여인의 정성이 큰 힘이 됐습니다.″
◀ 유선경 아나운서 ▶
사법시험 초기에는 선발인원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평균 6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합격하는 ′절대점수′ 방식이어서 합격자 수가 들쑥날쑥하다 보니 1967년 사법시험 합격자는 5명에 불과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부터는 법조인 인력 부족 때문에 정원제가 도입됐고, 1980년대 사법시험령이 전면 개정되면서 정원이 300명까지 늘었고, 이후 1996년 500명, 2000년 800명, 2001년에는 1,000명까지 늘었습니다.
그러다 사법시험 폐지가 확정되면서 갑작스런 시험 폐지에 따른 혼란을 줄이기 위해 유예기간을 두고 합격자 수를 단계적으로 줄였는데요.
지난 2010년 800명이었던 합격자 수는 해마다 50~100명씩 줄어서 지난해에는 153명이 합격했습니다.
◀ 앵커 ▶
스스로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서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이르게 되는 걸 가리켜 흔히들 ″개천에서 용 났다″고 표현하죠.
사법시험은 이런 이른바 ′개천용′을 배출하는 산실로 불리기도 했는데요.
왜 사법시험이 폐지 수순을 밟게 됐는지 이번에는 사시를 둘러싼 논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유선경 아나운서 ▶
사법 시험은 우리 사회에서 ′희망 사다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학력이나 나이 등 제한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가려지기 때문인데요.
실제로 어떤 합격자가 있었는지, 먼저 영상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 리포트 ▶
전남 강진에서 국민학교만 마친 서 씨는 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검정고시로 중고등 학교 과정을 마쳤고 지난 87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서 씨는 사법고시라는 또 다른 목표를 정하고 3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서정암]
″누구나 공부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로 없지만, 당장 자기가 공부로 한번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목표를 세웠다면 그 목표를 향해서 정진을 하면 어떤 결과든 반드시 나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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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시력을 잃었을 때 최 씨를 일으켜 세운 건 식당일로 뒷바라지해온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가족 품으로 돌아와 합격의 기쁨을 나누고 있지만 장애의 벽에 부대꼈던 지난 시간만큼 앞으로의 생활도 걱정입니다.
[최영/사법고시 2차 합격,시각장애]
″장애인에 대한 벽이 많이 느껴지는데요. 그 벽을 허무는 제도가 빨리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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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두 살에 시작한 사법시험.
합격까지 15년이 걸렸습니다.
시험장에선 학부모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오세범(당시 56살)/사시 최고령 합격]
″수험표 보여주면 뒤에 학부형들이 왜 저 사람은 (시험장에) 들어가게 하고 자기는 못 들어가게 하냐며 따져요. 그러면 수위가 ′저 사람은 수험생이다′라고….″
◀ 유선경 아나운서 ▶
1963년 사법시험이 치러진 이래 70만 명이 도전했는데요.
이 가운데 2만 6백여 명이 법조인의 꿈을 이뤄 합격률은 2.93%로 나타났습니다.
합격률이 이처럼 낮다 보니고시에 매달리는 이른바 ′고시 폐인′, 또는 ′고시 낭인′이 양산돼 국가적인 낭비라는 지적도 있었는데요.
관련 보도를 함께 보겠습니다.
◀ 리포트 ▶
고시생들에게 왜 고시에 매달려 있느냐고 물으면 거침없이 ′출세′, ′신분상승′ 등의 단어가 튀어나옵니다.
[사법시험 준비생]
″상류층으로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보죠.″
[사법시험 준비생]
″다른 것보다 신분상승의 기회라든지….″
응시자들의 평균연령도 점차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법시험 준비생]
″보통은 6-7년 정도 공부해서 되는 사람들도 있고, 10년 정도 공부해서 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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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아파트에서 28살 강 모 씨와 20살 문 모 씨가 함께 투신자살했습니다.
경찰은 사법 고시를 준비하던 강 씨가 2차 시험에만 세 번째 떨어진 뒤 힘들어 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라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문 씨와 함께 목숨을 끊은 걸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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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고시원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40대 남성.
5번의 낙방 이후 취업 준비에 매진했지만 이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각한 대인기피증과 자살 충동까지 생겼지만, 정신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우울증 경험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전과자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취업할 때도 나만 불이익을 받는 건 아닌가….″
◀ 앵커 ▶
책상에 앉아 사법고시에만 매달리다 보니, 사회 경험이 부족한 법조인을 배출한다는 비판도 거세졌죠.
그래서 도입한 게 바로 법학전문대학원, ′로스쿨 제도′인데요.
하지만, 로스쿨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일각에서는 사법고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유선경 아나운서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유선경 아나운서 ▶
가장 큰 문제는 학비가 비싸다는 겁니다.
전국 15개 사립 법학전문대학원의 최근 3년간 평균 등록금을 살펴봤더니, 한해 평균 2천만 원 가까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2년 천8백45만 8천 원이던 등록금은 지난해에는 천9백19만 5천 원으로 73만 7천 원이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