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달 / 1979년 당시 부산 보안사 부대장 (2010 진화위 · 음성 대독)]
″중정에서는 남민전 관계자 등이 부마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보인다며 조직도를 그려 와서 남민전에 맞춰서 수사를 하라고 협조 요청하였으나, 막상 조사를 해 보니 남민전과는 관련이 전혀 없었습니다.″
[차성환 /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 상임위원]
″사실관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얼마든지 그렇게 조작했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부마가 10·26 사건으로 그렇게 끝나지 않았으면 그런 대형 공안 조직 사건이 만들어졌겠죠.″
간첩 사건 조작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서 비롯된 걸로 보입니다.
항쟁 사흘째이던 10월 18일, 박 대통령은 ″조직적인 배후가 있는 것 같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하고 있다니, 철저히 조사하고 규명하라″고 했습니다.
[이은진 /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 상임위원]
″대통령이 배후 세력 수사하라고 그러면 ′있다고 해′, ′만들어 내라′는 것이지 배후 세력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사실을 수사하라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바로 권력자예요.″
박 대통령 지시 당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돼 군 병력이 동원됩니다.
투입된 부대는 제3공수여단.
이듬해 5월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던 바로 그 특전사 부대입니다.
이틀 뒤엔 마산에도 군대가 진입했습니다.
[정성기 / 부마민주항쟁 참여자 (2019년, 부산MBC)]
″(마산은) 3·15 의거가 일어나서 이미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 그런 도시잖아요. 그런 점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훨씬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
이처럼 정권 차원의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부마 항쟁은 간첩 사건으로 변질됐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입수한 중정의 보고서 중에는 좀 다른 내용도 눈에 띄는데요.
′관련자들을 조사해 봐도 대공 용의점이 없다′, 이런 결론까지 선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당시 권력 주변의 정서와는 좀 동떨어진 듯한 이런 대목들, 결국 10·26 사건의 도화선으로 작용했습니다.
중정의 45쪽 분량 또 다른 보고서.
제목은 ′부산 마산 소요 사건의 실태와 대책′입니다.
′비밀문서′고, ′회의 종료 후 반납′하라고 돼 있습니다.
부마 항쟁의 특징과 발생 원인, 대책 등을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로 적고 있는데요.
종래 데모 양상과 달리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했고, 공장 직원과 점원, 재수생, 무직자 등 사회 저변층, 그리고 상인들과 일반 시민도 성원하고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이진걸 / 부마민주항쟁 참여자]
″사람들이 손 흔들고 박수치고 그랬습니다. 저녁때 시위하러 갔을 때 진짜 물도 주고 음식 같은 것도, 막 빵 같은 것도 나눠주고 그랬습니다. 조세에 대한 불만, 빈부격차, 저임금, 정치 불신, 불황에 따른 취업난이 소요 사태로 이어졌다며 사회 저변층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이 절실하다고 분석돼 있습니다.″
또 당시 부산 민심을 자극했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 제명 등을 간접적인 배경으로 꼽고 있는데요.
조세 문제 등의 근본적 해결과 함께, 과감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유화책으로 민심을 달래야 한다는 건데요.
[차성환 /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 상임위원]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염증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하는 분석이 전제로 깔려 있는 거잖아요.″
′그런 여론을 좀 무마하자′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거죠.
당시 청와대에는 이 같은 중정의 보고서와 정면충돌하는 군의 보고도 올라갔는데요.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부마 지역 학생 소요 사태 교훈′이라는 문서입니다.
보안사는 ″대통령 각하 영도력에 대한 지지와 존경 및 흠모는 변함이 없다″고 했고, 특히 ″과감하고 무지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 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0·26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쥔 전두환은 7개월 뒤 광주에서 이처럼 섬뜩한 주장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김상봉 / 전남대 철학과 교수]
″′[초반에 강경 진압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 걸 그 당시 [신군부가 ′교훈′으로] 삼았던 거죠.
이게 불행입니다. 그것이 이제 5·18의 비극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던 거다…″
결국 부마 항쟁 당시 박 대통령 선택을 받지 못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김재규 / 전 중앙정보부장 (재판 육성)]
″각하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 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다음에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사람들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희생을 시켰는데 우리 대한민국 100만~200만 명을 희생한다고 까짓것 문제 될 게 있겠느냐 이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건 소름이 끼칠 그런 일들입니다.″
유신 정권이 갑자기 막을 내린 뒤 전두환 신군부가 득세하면서, 부마항쟁의 진상도 그대로 묻혔습니다.
2019년, 유일한 공식 희생자로 인정받은 고 유치준 씨.
그는 마산의 시위 현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는데요.
경찰은 가족에게 묻지도 않은 채 시신을 부검한 뒤 매장해, 사망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부산의 여고 2학년이었던 서회인 양은 하굣길에 소형 최루탄인 ′사과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됐습니다.
이후 폐병과 우울증으로 지난 2000년 39살 나이에 생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진료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사망이 아닌 부상 피해자로만 인정됐습니다.
어머니는 몇 장 안 남은 딸 사진도 잘 꺼내보질 못합니다.
[김영자 / 故 서회인 어머니]
″(보고 싶으실 텐데 왜 자꾸 안 보세요.)아이 뭐 보고 싶고 뭐고, 보면 열이 올라오는데. 그냥 잊어버리고 있어야지.″
고문 피해자도 속출했습니다.
옥상열 씨는 당시 부산에서 불난 파출소를 구경하다 졸지에 방화범으로 몰렸습니다.
다섯 달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 취직도 어려워 원양 어선을 타면서 생계를 이어왔다는데요.
지난 2018년에야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문에 못 이겨, 처음 본 사람을 공범으로 지목했던 건 악몽처럼 남아 있습니다.
[옥상열 / 부마민주항쟁 고문 피해자]
″노란 주전자, 물 주전자 있죠. 거기다 물을 한가득 넣어서 (얼굴 덮은) 수건에 뿌리는 거라. 그럼 숨을 못 쉬어요. 죽어요, 죽어. ′공범이지?′ ′아닙니다′하면 또 때리고.결국은 ‘맞습니다, 맞습니다′(라고 허위자백했죠)″
[이종설 /당시 전투경찰 - 이진걸 / 부마항쟁 참여자]
″진출하려고 입구에 오니까 전경들이 ′페퍼 포그′ 차로 딱 막고 있더라고요. 그때 여기 계셨습니까? (그렇지, 여기 있었죠.)″
진압에 나섰던 전경들도 시위대와 한마음이었다고 합니다.
출동 차량 안에서 불렀다는 노래.
[이종설 / 부마민주항쟁 당시 전투경찰]
″[데모 막으러 갔다가, 데모하고 오지요.] 뭐 이렇게 불렀어, 허허. 그러면 우리 소대장이나 경찰관들이 껌뻑 넘어가지.″
부마항쟁 보상법이 제정된 게 지난 2013년.
보상 근거를 조사할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듬해 출범했습니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이던 2015년, 대법원은 ″부마항쟁 당시 긴급 조치가 위헌″이라면서도 ″배상 책임은 없다″고 판결했는데요.
올해 8월,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부마항쟁 피해자들의 배상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19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 등을 한 부마 항쟁 피해자가, 70여 명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오래 전 재판에서 줄줄이 패소했습니다.
[변영철 / 변호사]
″양승태 대법원 시절에 손해 배상 청구를 했던, 부마 항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은 전부 패소 확정]됐고 뒤에 조금 덜 관여된 분들은 지금 이제 막 전환 판결에 따라서 승소 판결을 받고 있고 굉장히 이게 지금 모순된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재심을 신청할 수 있도록 부마항쟁보상법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국회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김상봉 / 전남대 철학과 교수]
″부마 항쟁의 역사적인 중요성, 4·19 이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시 부활한 전 시민적인 봉기입니다. 이것이 5·18로 이어지고 그리고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고 최근에 촛불시위로 이어지는. 온전한 민주주의, 그게 ′안 죽는다′라고 하는 걸 보여준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