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1-08-14 10:11 수정 | 2021-08-14 10:42
미국 정가에서 신기한 장면을 봤습니다. 야당의 최고 지도자인 공화당 미치 맥코넬 상원 원내대표가 며칠 전 바이든 대통령의 공이 크다며 한껏 치켜세웠는데요.
도로, 다리, 인터넷 확충 등에 투입할 1조 달러짜리 인프라 법안이 상원에서 초당적 합의로 통과된 이후였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핵심 과제였는데, 바이든의 꾸준한 설득 끝에 공화당에서 19명이 넘어왔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미 대통령이 ″합헌인지 나도 모르겠다″며 정책 발표></strong>
신기한 장면은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3일 바이든 대통령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면서 ″이게 합헌적 조치로 인정될지 나도 모르겠다. 몇몇 학자들은 된다고 하고, 다른 학자들은 인정될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헌법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헌법에 부합하는지 자신이 없다고 털어놓다니, 이게 무슨 상황?
내용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두 달 간은 코로나19 탓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세입자들이 집세를 못내도 쫓겨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대상은 코로나19 감염률이 높은 지역입니다.
이미 작년 9월 트럼프 행정부 때 전국적으로 취해진 조치였고, 세 차례 연장된 바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이 쫓겨나, 갈 곳 없는 ′홈리스′가 될 경우 코로나 억제에 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죠.
이걸 공식 명령으로 발표한 것은 질병통제예방센터(CDC)입니다. 방역대책 기관에서 세입자 보호를 한다니 그것도 꽤 낯설었는데요.
그런데 바이든은 합헌인지 왜 자신 없어했을까요. 기존의 퇴거 유예 조치(eviction ban moratorium)가 7월 31일로 효력이 끝나는데, 더 이상은 연장할 수 없다는 취지의 연방대법원 판단이 나와서입니다.
집주인들이 불공정하다며 소송을 냈는데,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9일 CDC의 조치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5대 4 판결.
찬성 편에 서긴 했지만 캐버너 대법관은 ″의회의 명확하고 구체적인 승인이 있어야 강제퇴거 금지가 지속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법도 없는데, 행정부 마음대로 하는 건 권한 밖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이든은 살짝 비켜가는 수를 내놨습니다. 기존 조치가 대상을 ′전국′으로 한 것과 달리, 새 조치에서는 ′코로나 감염률이 높은 카운티′로 좁혔습니다.
그렇다 해도 의회에서 입법을 한 것이 아니니 문제는 여전히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이 ′계산된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단 바이든 스스로도 ′시간 벌기′라고 말합니다. 백악관은 오늘 성명을 하나 냈습니다.
집세 지원금 명목으로 465억 달러(54조 원)를 코로나 재난 지원 법안에 배정해서 작년 12월에 통과시켰는데, 주 정부들은 서둘러서 지급하라고 했습니다.
재무부 집계로는 지난 달 말까지 30억 달러만 지급됐다고 하니 1%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허위 신청을 막으려다 보니 신청서와 처리 절차가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바이든 입장에서는 새로운 유예조치 시한인 10월 3일 이전에 얼마라도 더 지급해 충격을 완화하려 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원래는 두손 든 상태였습니다. 그와 백악관 참모들은 법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다며 취약계층이 대거 쫓겨날 상황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만료 이틀 전인 7월 29일 백악관 성명을 보면 이렇습니다. ″의회와 펠로시 하원의장이 지체 없이 새로운 퇴거 유예 조치를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 의회로 공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며칠 만에 입장이 180도 바뀌어서 대통령 스스로도 합법인지 확신 못하는 조치를 내놓은 것일까요?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펠로시 의장의 압박…′홈리스′ 출신 의원의 항의></strong>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뚝심이 통했습니다. 백악관이 법적 명분을 못 찾겠다고 하자, 펠로시 의장은 ″더 나은 변호사를 구하라″며 백악관 비서실장을 압박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바이든에게도 직접 몇 차례 전화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버드대 로스쿨의 로렌스 트라이브 명예교수의 자문을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교수는 합법적으로 연장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고, 결국 36시간 만에 CDC는 대상 지역을 좁힌 수정안을 내놓게 됐습니다.
한 사람 또 있습니다. 지난주 나흘 넘게 워싱턴DC의 연방의회 의사당 계단에서 한 흑인 여성 의원이 노숙 시위를 했습니다. 미주리주 출신의 코리 부시(Cori Bush) 하원의원입니다.
간호사이자 인권운동가 출신의 ′싱글맘′입니다. 본인이 세 번이나 퇴거 조치로 쫓겨난 경험이 있습니다.
노숙 시위는 소셜미디어로 생중계됐고, 많은 세입자들과 당내 진보파 의원들의 응원이 이어졌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연장 조치를 이끌어낸 뒤 그는 CNN에 출연해 뿌듯해 했습니다.
백악관이 법 때문에 안 된다고 했는데, 활동가 시절처럼 나섰더니 해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절충수 찾아, 두마리 토끼 잡은 바이든></strong>
결국 바이든은 두 가지를 얻었습니다. 세입자도 보호했고, 당내 진보파의 반발을 가라앉혔습니다.
당초 백악관의 ′떠넘기기′에 민주당 내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퇴거 조치를 사실상 허용한다며 공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바이든은 이번에 통과시킨 1조 달러 인프라 법안 처리 과정에서, 성에 차지 않아 하는 민주당 진보파 의원들을 달래야 했습니다. 앞으로도 추진할 여러 법안에서 그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좋은 평가만 있는 건 아닙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퇴거금지 유예 결정으로 법치주의가 유예됐다고 비판했습니다.
CDC의 조치는 불법적이며, 세입자가 월세를 내든 안 내든 집주인도 세금과 융자를 꼬박꼬박 갚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대법원의 직접적인 경고를 무시했다면, 민주당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로남불′도 언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