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저녁 7시쯤, 서울 봉천동 주택가의 한 은행 자동화기기 코너. 한 남성이 오른쪽 ATM 기기를 만지작거리더니, 바로 왼쪽의 ATM으로 자리를 옮겨 기기를 만집니다.
남성의 왼손에는 1만원권 현금 다발이 가득 들려 있습니다.
아마 어딘가로 입금을 하려는데, 오른쪽 ATM이 고장나서 왼쪽 ATM을 이용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한창 입금을 하던 남성, 또다시 오른쪽 ATM으로 다가가 버튼을 조작하고, 명세표를 뽑아 가방에 담습니다.
이 남성,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영상 속 ATM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비밀이 풀립니다.
ATM 기기가 지폐를 세거나 금액을 이체하는 등 자동화된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에, 남성은 양쪽 기기를 옮겨다니면서 잠깐잠깐 버튼만 누르는 모습이 생생히 보입니다.
알고보니, 한쪽 ATM이 현금을 입금 처리할 동안, 다른쪽 ATM에 또 현금을 투입하고 있는 겁니다.
남성의 이런 메뚜기같은 행동을 멀리서 지켜보던 행인이 있었습니다.
혹여나 ATM을 터는 것이면 어쩌나, 적어도 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니다‥ 이런 판단을 한 행인은 112에 범죄 의심 신고를 했습니다.
곧바로 긴급 출동 지령이 떨어졌고, 서울 관악경찰서 신림지구대는 순찰차 4대와 경찰관 10명을 동원해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경찰관 두 명은, 출동 사실을 감추기 위해 순찰차를 멀찌감치 세운 뒤, ATM기기로 걸어가 남성의 행동을 막아 세웠습니다.
무전으로 검거 사실이 전파되자, 혹시 모를 도주에 대비하던 다른 경찰차 3대가 ATM기기 바로 앞에 줄줄이 도착했습니다.
붙잡힌 남성은 캐나다에서 입국한 33살 교포였습니다.
경찰이 소지품을 확인하자 입금 영수증이 쏟아져 나왔고, 아직 채 입금하지 못한 1백만 원짜리 현금 다발 여섯 개도 나왔습니다.
현금을 담았던 것으로 보이는, 서로 다른 은행의 쇼핑백 3개도 발견됐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가 의심되는 상황, 하지만 이 남성은 ″한국에 들어와서는 단순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정당하게 업무를 하고 있었다″며 잡아뗐습니다.
경찰: 그 분하고 어떻게 연락했냐고요.
남성: 그냥 카톡 번호로‥ 아니, 저도 처벌하시려고요?
경찰: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들고 다녀요?
남성: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모아놓은 거예요.
경찰: 모아놓은 돈이 이렇게 빳빳해요? 한 건당 (돈을) 받았는데 현금이 이렇게 빳빳하냐고.
하지만 남성이 워낙 순식간에 검거된 탓에, 휴대전화 기록을 지우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경찰이 곧바로 확인한 남성의 휴대전화 2대 중 1대에서, 보이스피싱 조직과 긴밀하게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와 보이스톡 통화 기록이 확인됐습니다.
″다른 일을 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를 뜨겠다고 우기던 남성은, 결국 그 자리에서 긴급체포돼 지구대로 끌려갔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남성은 같은 날 오후 1시부터 두 시간 간격으로 서울 동묘앞과 남구로역, 그리고 ATM기기가 위치한 봉천동 쑥고개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 3명을 잇따라 만나, 피해금을 받아챙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남성이 이날 하루 모은 현금만 1만 원권으로 4천 480만 원.
금융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속아 피해자들이 남성에게 전달한 돈이었습니다.
이 돈을 보이스피싱 조직의 계좌로 입금해주면, 남성은 하루 일당 61만 원을 챙기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이 남성을 사기 혐의로 체포해 여죄를 조사하는 한편, 남성에게 수금을 지시하고 입금된 돈을 받아간 보이스피싱 조직 윗선을 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