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앵커: 이상열,김은주

캄보디아 내전 13년[신창섭]

입력 | 1991-11-09   수정 | 199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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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내전 13년]

● 앵커: 캄보디아의 내전은 한마디로 수백만 명이 대량 학살되는 영화 킬링필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냉전체제와 국내정치세력간의 싸움으로 현대사에서는 최대 비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23일 파리 평화협정 체결까지의 캄보디아의 내전 13년을 신창섭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 기자: 캄보디아의 비극은 지난 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 장군이 우익쿠데타로 프랑스로 부터 독립해 중립주의를 내걸어 온 시아노프 정권을 뒤엎은 것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소 냉전구도의 큰 배경과 뿌리 깊은 지역문제가 맞물림 해서 20년 이상 피의 대립이 지속됐습니다.

지난 75년에는 지역 패권주의에 기울은 중국을 등에 업은 크메르투즈군이 론놀 장군을 무너뜨린 뒤 민주캄보디아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크메르루즈는 시아노프를 배제하고 급격한 사회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200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이 처형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크메르루즈의 급진적 정책은 이 지역을 통합해 인도지나 연방을 구상했던 베트남을 자극했습니다.

이어 78년 소련 을 등에 업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 점령해 괴뢰정권을 세운 뒤부터 친베트남계 정부군과 크메르주 그리고 시아노크 교우회 등 반정부 게릴라 간에 내전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이 세운 훈센정권의 타도를 위해 반정부 게릴라세력이 공동전선을 폈지만 각 정파 간의 깊은 불신과 알력은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했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은 국내 정파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띤 캄보디아 내전은 고르바초프 등장이후 미-소 냉전체제의 와해와 중-소화해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출구가 보이기 시작해 지난 10월 23일 평화협정 체결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정책과 킬링필드가 남긴 비극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MBC뉴스 신창섭입니다.

(신창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