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데스크조인호

"끼니 굶어도 독립에 써 주시오"…눈물의 모금

입력 | 2019-04-11 21:34   수정 | 2019-04-1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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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임시 정부의 독립 투쟁이 머나먼 중국 땅에서도 멈춤없이 지속 가능했던 것은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한푼, 두푼 쌈짓돈을 모아 투쟁 자금을 지원했던 본국의 국민들 덕이었습니다.

특히, 우리에겐 덜 알려져 있지만 최악의 수탈 상황에도 임시정부 군자금에 큰 힘을 보탠 제주 도민들의 사연을 조인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리포트 ▶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한달 뒤인 1919년 5월.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려고 결성된 독립희생회에서 제주도의 한 교회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독립군을 키울 자금을 모아달라는 요청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청을 받은 조봉호 지사 등 제주의 기독교인들은 비밀리에 모금운동을 시작합니다.

당시 제주에 12곳이 있던 교회가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으는 비밀조직이 됐습니다.

[강연홍/제주 성내교회 목사]
″제주도를 3등분으로 나누셨더라고요. 목사님 세 분이 각 지역을 책임진 거죠. 책임지고 그 지역을 조직화시켜서 적극 독려를 했던 것 같아요.″

이들은 제주 법원에서 몰래 빼낸 등사기로 임시정부 선포문을 찍었고, 비밀리에 이걸 돌리며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단 50일 동안 참여한 제주도민이 4천 500명.

당시 최악의 수탈에 신음했던 제주도였지만, 한푼, 두푼 아껴둔 돈을 보태 군자금 만원, 현재 가치로 5억원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냈습니다.

[박찬식/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장]
″3.1 운동의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제주도에서도 3월 21일부터 조천만세운동이 터졌는데, 조천만세운동의 소식이 전도적으로 도민들에게 파급된 것 같습니다.″

모금 사실은 곧 일본 경찰에 발각됐고, 60여명이 체포됐습니다.

조봉호 지사는 동지들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고,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1년 만에 옥사했습니다.

이 일로 일제의 감시는 훨씬 강화됐지만, 이후에도 제주 도민들은 일제에 대한 항거를 이어갔습니다.

최남단 제주에서도 군자금 모금운동이 있었던 사실은 당시 임시정부가 온 국민의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MBC뉴스 조인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