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 항쟁의 교훈′이라고 적시한대로, 시민들이 군대만 봐도 겁이 나게할 정도로 신군부가 부마 항쟁 이후 시민을 상대로 어떤 훈련을 해왔고 그걸 광주에서 어떻게 실행했는지 조재형 기자 보도합니다.
◀ 리포트 ▶
부마 진압에 첫 투입된 3공수 특전여단은 대한민국 최정예 특수부대였습니다.
79년 10월 18일 새벽.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대규모 공수작전을 통해 부산에 들어온 3공수는, 경찰서까지 부순 기세등등한 시위대를 단 이틀 만에 제압합니다.
주로 시위대의 머리를 가격해, 20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변길남/부마·광주항쟁 당시 3공수 13대대장]
″(부마항쟁 때는) 군인들한테 붙잡혀가지고, ′진압봉′이라 그래. 그 진압봉에 얻어맞은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거야.″
7개월 뒤, 광주에 다시 나타난 3공수.
그런데 이번에는, 시민들에게 실탄을 쐈습니다.
부마항쟁 때만 해도 공포탄만 썼던 3공수가, 5·18 땐 m16 실탄을 쓴 겁니다. 5·18의 첫 집단발포 사건입니다.
[안종철/前 5·18기록물 유네스코등재 추진단장]
″바로 (1980년 5월) 20일 저녁에 3공수에 의해서 사살됐던 시민군 시신 2구, 이 2구가 광주시민들을 아주 격앙시켰던… 그 계기가 되게 된 거죠.″
부마에서 광주까지 7개월 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두환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뒤 7개 공수여단을 대상으로 충정 훈련, 즉 시위진압훈련을 대폭 강화합니다.
공중침투 훈련은 제쳐두고, 오로지 시위진압훈련에만 매달린 겁니다.
[노영기/조선대 교수. 前 군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
″공수부대원들에게 독기를 심어줬다고 할까… 시민들에게 증오심을 갖도록… 계속 훈련을 시키고…″
″공수부대원들이 80년도 초반부터…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충정 훈련을 받았다″, ″80년 2월부터는 모든 교육훈련을 거의 포기한 채, 오로지 충정 훈련에만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이 군 과거사위 조사로 확인됐고, 계엄사령부 일지에도, 5·18 전 공수여단들이 모두 폭동 진압 훈련만 받았음이 기록돼 있습니다.
[노영기/조선대 교수. 前 군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
″7공수나 11공수 같은 경우에는 (3공수의) 부마의 경험들 자체, 그 때의 시위 진압의 경험들 자체가 그대로 전수되었다, 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1979년 부마항쟁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적으로, 탄압대상으로 규정한 전두환 신군부는, 치밀한 준비 끝에 이듬해 5월 광주에서 끔찍한 살육을 자행합니다.
MBC뉴스 조재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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