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C′라는 반도체 밀봉재를 가열하면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같은 1급 발암물질이 나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김은숙/전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그게 1급 발암물질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 때는 몰랐거든요. 그때 우리 19살 아기들이잖아요. 냄새만 엄청 역겹게 나고 막 그랬거든요.″
IMF 외환위기 때 퇴사한 뒤, 온갖 병에 시달렸습니다.
갑상선암, 뇌수막염, 자궁경부이형성증.
그런데 병은 아이에게도 대물림됐습니다.
입사 8년차에 가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선천성 거대결장′이라는 병을 진단받았습니다.
대장이 기능을 못해 잘라내고 소장과 직장을 직접 연결하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제 성인이 됐지만, 평생 배변장애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김은숙 씨 아들]
″화병 나죠. 그냥 엄마를 탓하는 생각보다는 거기를 많이 탓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엄마는 그냥 이렇게 몰랐으니까.″
17살 때부터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한 김희정 씨.
유리 기판 위에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포토마스크′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김희정/전 반도체 생산 노동자]
″역겹기도 하고요. 그냥 순간 딱 맡으면, 아무튼 좀 지독한 냄새라고 보시면 돼요. 뚝 떨어지는 게 아니고 통통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튀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입사 9년 만에 가진 아이.
임신 22주째 병원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김희정]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를 하시는데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라고요. 계속.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콩팥이 하나가 없다고.″
아이는 왼쪽 신장이 없고, 오른쪽 신장도 10%밖에 기능을 못 합니다.
큰 수술만 네 번. 약값으로 매달 2백만 원이 들었습니다.
[김희정]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엄마 나는 왜 아프게 낳았어.′ 이 말을 하더라고요. 제가 이제 미안해라는 말밖에 못 했는데.″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가운데 자녀들의 선천성 질환에 대해 산업재해를 신청한 사람은 4명.
반도체 노동자 건강보호 단체 반올림에는, 이렇게 아이에게까지 직업병이 대물림됐다는 제보가 30건 넘게 들어왔습니다.
노동자 본인도 쉽지 않은데, 아이까지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MBC뉴스 이재욱입니다.
영상취재: 이상용 / 영상편집: 박혜린
◀ 앵커 ▶
이렇게 대물림된 직업병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이른바 ′태아산재법′이 내년 1월부터 시행됩니다.
하지만 어렵게 마련된 이 법에도, 전문가들은 실효가 있을까 우려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임신 중에 노출되면 태아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의심되는 유해 화학물질 후보가 1천4백 개가 넘는데, 고용노동부가 이 가운데 단 17개만 인정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차주혁 기자입니다.
◀ 리포트 ▶
2009년에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15명.
임신 중에도 계속 야근했고, 항암제 같은 위험한 알약을 가루로 빻았습니다.
15명 가운데 5명은 유산,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하지만 법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보험 적용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소송을 냈고, 2020년 대법원은 아이들도 산업재해로 인정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10년이 걸렸습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이른바 ′태아산재법′.
내년 1월 12일부터 시행됩니다.
임신 중 유해인자에 노출됐다는 걸 입증하면, 아이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유해물질들이 포함될까?
고용노동부가 처음 검토한 후보물질은 1,484개.
그런데 무더기로 제외되기 시작합니다.
국내에서는 노출 가능성이 없다며 784개, 유해성이 낮다며 158개, 취급하는 사업장이 100곳 미만이라며 172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가 없다며 194개.
유산과 사산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은 별도 법령으로 정하겠다며 또 제외했습니다.
결국 1,484개 후보물질 가운데 이것저것 다 빠지고 납, 니켈, 수은 등 고작 17개만 남았습니다.
[조승규/시민단체 ′반올림′ 노무사]
″저는 사실 되묻고 싶어요. 이 물질들이 정말 태아의 건강 손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물질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이렇게 다 빼버리면 산재 예방 효과가 없을 거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백도명/국립암센터 교수]
″대상 범위를 좁혀놨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보상이나, 혹은 보상을 통해서 그런 물질들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 효과가 있을까?″
고용노동부는 의학적 관련성이 인정되면 17개 말고도 유해인자로 인정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어떤 유해물질이 태아에 어떤 병을 일으켰는지 의학적으로 규명된 사례는 많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김현주/이대목동병원 교수]
″시행령은 의학 교과서가 아니에요. 시행령은 우리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어야 하는 거죠. 산재보험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한 인과관계의 원리를 주장하는 분들은 ′이 보험이 왜 생겼는지부터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