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신수아

[스트레이트] '악몽'을 기억해내다‥5·18 성폭력

입력 | 2025-11-23 21:12   수정 | 2025-11-2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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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차마 말 못 했던 ′진실′</B>

80년 5월 광주.

그 비극을 노래한 ′오월의 노래′.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노랫말처럼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그때.

살아남았지만, 죽음보다 더 끔찍한 기억을 각인 당한 여성들.

여러 번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했을 만큼 그날의 기억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최경숙/5·18 성폭력 피해자]
″(계엄군) 냄새가 너무 땀 냄새하고 술 냄새하고 너무너무 힘들었으니까, 저는 지금도 군인 아저씨 보면 너무 힘들고…″

[김지경/5·18 성폭력 피해자]
″지금도 어디 캄캄한 (그날 밤) 그거는 기억 못 해요. 뭐 암흑이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까.

45년이 지났지만, 한순간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김선옥/5·18 성폭력 피해자]
″하얀 메리야스를 입고 나를 성폭행이 끝나고 쳐다보는 그 눈빛. 그 눈빛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가 않고 나를 항상 괴롭혔어요.″

민주화 이후, 광주 학살의 진실이 속속 드러나던 순간에도…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그들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이남순/5·18 성폭력 피해자]
″이제 창피하기도 하고 또 여자이기 때문에 감춰야 되고…″

이제는 초로의 나이가 된 그들.

그냥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각오.

피해자들은 함께 뭉쳤고, 45년 전의 악몽과 당당히 맞섰습니다.

독재 권력이 앗아가 버린 그들의 삶.

그리고 명예를 되찾기 위해 용기를 냈고, 법정에 섰습니다.

◀ 신수아 기자 ▶

1980년 5월 광주의 실상은 민주화 직후부터 꾸준히 밝혀져 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끔찍했던 성폭력은 최근에서야 공론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웠던 진실.

이 보고서엔 어쩌면 죽음보다 고통스러웠을 40여 년을 버텨낸 5.18 성폭력 피해자들의 삶이 자세히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짓밟은 80년 5월의 그날.

용기를 내 <스트레이트>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B>■ 죽음보다 끔찍했던 ′성폭력′</B>

1980년 5월.

당시 27살로 4살 쌍둥이의 엄마였던 최경숙 씨.

광주의 한 회사에서 차량 운전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업무용 차량을 타고 귀가하던 중 전남여고 후문에서 대여섯 명의 계엄군이 차를 멈춰 세우더니, 총을 들이댔습니다.

최 씨는 두 아이의 엄마라며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최경숙/5·18 성폭력 피해자]
″′총으로 쏘지 말고 나만 살려주시오. 그리고 아기들이 쌍둥이들 둘이나 있는데 저 죽어버리면 힘듭니다…′ 그러니깐 ′내 말 안 들으면 총 쏘려고 하니까 그렇게 알라′고… 뒤에서 이렇게 차를, 제가 운전대에 있는데 나오라고 해서 뒷좌석으로 가라고… 주먹으로 그 이를 이렇게 때려버리더라고요, 주먹으로…″

무자비한 폭행 뒤, 차량 뒷좌석에서 2명의 계엄군에게 번갈아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살아 돌아왔지만, 당시 셋째를 임신 중이었던 최 씨는 사건 이후 이 아이를 낙태해야 했습니다.

[최경숙/5·18 성폭력 피해자]
″임신 3개월 됐어요. 근데 하혈을 하더라고요. 조산소에 가서 조사를 하니까 아무리 해도 아기를… ′피 이렇게 흐른 지가 얼마나 됐냐′고 그래서 한 일주일 넘었는데요… 그러니깐 아무래도 그 낙태를 해야 될 것 같다고 그래서…″

생계를 위해 택시를 몰았지만, 손님으로 군인들을 태우게 되면 그날의 기억, 그 순간 군복에서 났던 냄새가 떠올라 숨이 막혔고, 하루종일 구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최경숙/5·18 성폭력 피해자]
″군인을 만약에 태우거나 어쩔 수 없이 태울 수가 있을 때는 그날 일 못 합니다. 울렁증하고 같이 섞여서 너무 힘들어 버리더라고요. 그리고 그… 압박감.″

결국, 5년 만에 택시 일도 접어야 했습니다.

80년 5월의 그날 이후, 최 씨는 자신의 인생을,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누가 조금만 흔들면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삶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0년 5월.

20살의 나이로 광주의 한 시외버스 안내원이었던 김지경 씨.

버스 운행을 마치고 차고로 돌아가는 길에 살려달라며 달려온 학생들을 태웠습니다.

그러자 계엄군이 버스를 멈춰 세우고 올라타더니, 버스 바닥이 피로 물들 만큼 학생들을 구타한 뒤 연행해 갔습니다.

그리고 계엄군은 버스를 어디론가 이동시키더니, 그녀를 저수지 근처로 끌고 가 성폭행했습니다.

자신을 성폭행했던 두 명의 군인.

지금까지도 기억이 선명하다고 합니다.

[김지경/5·18 성폭력 피해자]
″군복 자체가 무섭고 군화가 무서웠어요. 내가 그 성폭행 당할 때 군화를 봤었거든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피 묻은 근무복을 입고 회사 숙소로 걸어 돌아왔습니다.

김 씨는 그날 이후 계속 하혈을 했습니다.

잊고 살려고 했지만,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세 차례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술 없이는 견디기 어려워 알코올 중독에 빠졌습니다.

가족에게도 그날의 기억을 말하지 못했던 김 씨는 아들이 군인이 되겠다고 하자, 뭔가에 홀린 것처럼 미친 듯이 말렸다고 합니다.

[김지경/5·18 성폭력 피해자]
″할 것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네가 부사관이냐고 너 왜 그런, 갈 수가 있냐고… 나는 군인이 싫다고. (아들은) 엄마 왜 군인이 싫냐고 엄마가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왜 엄마가 군인 싫어하냐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아오던 지난 2014년.

김 씨는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김지경/5·18 성폭력 피해자]
″경부암 걸릴 때 기분이 더러웠어요. 왜 암 중에서, 내가 경부암을 걸려야 되냐 그 말이에요. 그렇잖아요. 남자들이 우리를 만졌으니까 이렇게 (암이) 온 거라고 난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자존심이 더 상한 거예요.″

80년 5월 그날.

22살 직장인이던 이남순 씨는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가혹한 진압을 목격했습니다.

[이남순/5·18 성폭력 피해자]
″꿈을 똑같이 꿔요. 시체 주우러 다니고 닦고 막 이런…″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금남로를 오가던 중, 5월 27일, YWCA 건물 안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군용 차량에 오르던 순간, 계엄군의 대검에 신체 중요부위를 찔린 뒤 그대로 기절했습니다.

[이남순/5·18 성폭력 피해자]
″이제 다른 차에 타는데 이제 밑에서 대검이 들어와 버린 거지. 그러니까 나는 의식을 잃어버려서 몰라요. 정신이 들어서 깨어났을 때는 통합병원 복도에 누워 있더라고 내가. 어떡해, 하혈은 줄줄 하는데… 쓰레기 더미에 외상 환자들이 쓰고 버린 붕대가 이렇게 쌓여 있었어. 그러니까 그거 이제 말아다가 (하혈하는 데) 대고…″

사건 이후 난소 하나의 기능을 잃었고, 자궁을 적출해야 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삶은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이남순/5·18 성폭력 피해자]
″′여성 아닌 것′을 선택했지. (마트에) 생리대 용품 같은 거 팔잖아. 근데 거기서 내가 안 집어 오면, 뒤에서 막 ″XX, 바보″ 욕하는 것 같아서 꼭 나도 그 코너에 가면 그걸 하나 샀어요.″

자신의 연행·구금 사실 때문에 가족들, 특히 어린 동생들까지 연좌제로 고초를 당할까 두려워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도망가듯 떠나야 했습니다.

[이남순/5·18 성폭력 피해자]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부모님 계시지 형제들 있지… 그들한테 어떤 피해가 될까 봐 지금 당장 가고 싶은데 못 가고, 엄청 아리고 쓰리고 아주 감당이 안 돼…″

이 씨 역시 지난 2004년 암 진단을 받은 뒤,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사는 주택 건물에서 의상실을 운영했던 당시 23살의 김미숙 씨.

80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대검을 꽂은 총과 수류탄을 든 계엄군 한 명이 간첩을 잡으러 왔다며 들이닥쳤습니다.

흰 테를 두른 철모를 쓴 계엄군이었는데, 함께 있던 어머니를 위협해 내쫓은 뒤 김 씨를 성폭행하려 했습니다.

[김미숙/5·18 성폭력 피해자]
″이렇게 할 바에는 죽여버리라고 그랬더니 총으로 쏘면 (총알 자국이) 배 들어갈 때는 조그만하고 나올 때는 크다 하더라고요. 얼마나 나를 갖고 난리를 쳐버리고, 막 때리고 구둣발로 차버리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군인이 휘두른 대검에 등을 찔렸습니다.

예쁜 옷을 만들며 멋 내기 좋아하던 그녀의 삶은 그날 이후 처참하게 망가졌습니다.

결혼을 했지만, 계엄군에게 당했던 피해를 알게 된 남편은 김 씨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최근에서야 자녀들의 권유로 이혼했습니다.

[김미숙/5·18 성폭력 피해자]
″아버지가 결혼이라도 한 번 시켰다는 말 들으려고 시집을 보냈는데 동네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아기 아빠가. 그래가지고 이제 그때부터 나를 폭행하기 시작했어요. 완전히 나를 날마다 두들겨 패다시피 하고 있는 돈 다 갖다 없애버리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보듬어 주지 않았던 이들의 상처.

그 고통과 괴로움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 신수아 기자 ▶

끔찍했던 성폭력이자, 잔인했던 국가폭력.

게다가 지금보다도 훨씬 가부장적이었던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오롯이 홀로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 괴로움이 너무나도 심해서였을까.

피해자들 상당수가 현재 암 투병 중입니다.

이들은 지난 2018년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는 ′미투′ 운동을 보고 하나둘 용기를 내 침묵을 깼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터진 12.3 내란 사태를 계기로 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B>■ ′악몽′과 맞서다</B>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 음악교육과 학생으로 도청에서 안내방송을 담당했던 김선옥 씨.

이 사실 때문에 그해 7월 상무대로 연행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김선옥/5·18 성폭력 피해자]
″′대빵′ 끌려 왔다고 지하 철판 위에 올리라고 했을 때 얼마나 내가 그때부터 나는 정신을 잃었어요. 얼마나 맞고 잠을 3일간 잠을 안 재우고 그 고문을 당했던지…″

조사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던 어느 날.

계장이라 불리던 수사관은 김 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인근 여관에서 성폭행했습니다.

[김선옥/5·18 성폭력 피해자]
″근처 여관으로 손을 끌고 가서 나를 눕혔어요. 나는 그때 저항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이미 포기 상태. 내가 언제 나갈지도 모르고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성폭행 피해에 폭도라는 낙인까지.

평범한 음악인을 꿈꾸던 그녀의 삶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김선옥/5·18 성폭력 피해자]
″눕혀놓고 하얀 메리야스를 입고 나를 성폭행이 끝나고 쳐다보는 그 눈빛. 그 눈빛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가 않고 나를 항상 괴롭혔어요.″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감추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40년 가까이 흐른 지난 2018년.

성폭력 피해를 공개 증언했던 당시 서지현 검사를 보고 용기를 냈습니다.

[김선옥/5·18 성폭력 피해자]
″서지현 검사가 ′미투′하면서 내가 화면으로 봤을 때 참 저렇게 똑똑하고 검사인데도 ′미투′를 하는데 5·18 그래, 나 살려준 내 몫으로 내가 (증언)하겠다. 이 세상에 내가 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 그때 두렵지 않았어요.″

김 씨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5.18 성폭력 피해를 처음으로 공개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피해자들도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공식 조사에 착수하면서 끔찍했던 5.18 성폭력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났습니다.

[정경두/당시 국방부장관 (2018년 11월 7일)]
″심지어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여학생, 임산부도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평생 잊으려 했던 기억을 자세히 진술해야 하는 조사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극우세력의 2차 가해까지 마주해야 했습니다.

[김선옥/5·18 성폭력 피해자]
″발가벗고 세상에 탁 던져진 기분. 남이 다 나를 쳐다보고 ′쟤 성폭력 피해자래…′, ′쟤는 딸까지 있는데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왜 이제 겨우 몸까지 팔아서 배상, 돈 받으려 하나′ 막 이런 댓글이 실리고 그랬을 때 내가 그걸 극복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김선옥 씨는 조사 과정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한동안 광주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기존에 앓고 있던 유방암은 난소암으로까지 전이됐습니다.

피해자들의 삶을 망가뜨린 가해자들은 과연 밝혀졌을까.

일부 가해자들이 특정되기는 했지만, 모두 강력하게 부인하는 데다 40여 년 전의 일이라 당연히 증거도 남아있지 않아 확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선옥 씨를 성폭행한 걸로 지목된 당시 수사관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윤경회/5·18조사위 조사4과 3팀장 (성폭력 사건 조사)]
″결국 그가 썼던 진술서는 부인하는 내용이었어요. ′자신은 그런 일이 없고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거고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는 뭐 보상금 정도 노리는 것′ 같은… 그러니까 어렵게 용기 낸 사람들 또 흠집 내는 그런 얘기들로 가득 채운 진술서를 받았거든요.″

성폭력 가해 사실을 인정한 당시 계엄군·경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5·18 진상조사위가 성폭력 피해 의혹 사건으로 꼽은 건 총 52건.

이 가운데 16건에서 성폭력 피해가 인정됐고, 국가폭력으로도 규정됐습니다.

[이남순/5·18 성폭력 피해자]
″내가 여지껏 어두운 세월은 이렇게 터널처럼 지나왔지만 (국가가) 인정했으니깐 내가 어디서라도 이제 말할 수 있고 내가 이런 피해자였다고 말할 수 있고… 그땐 말 못 했지만…″

하지만, ″여성으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고만했던 다른 16명은 구체적인 피해 진술조사를 거부했습니다.

또 당시 미성년자였던 피해자들은 정신과 질환을 앓다가 생을 마감했거나, 지금까지도 병원 치료를 받고 있어 조사가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훨씬 더 많은 5.18 성폭력 피해가 있었지만, 진상이 밝혀진 건 극히 일부인 셈입니다.

극한의 상처를 혼자서만 감당해왔던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은 뒤 함께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김미숙/5·18 성폭력 피해자]
″처음엔 창피했어요. 부끄러웠어요. 부끄러웠고 그 (진술) 안 하고 싶었어요. 진짜 이거 안 하고 싶었는데… 우리가 5·18 때 같은 일을 당했잖아요. 그래갖고 같은 아픔이 있으니까 같이 말하면 다 통하더라고요.″

′열매′란 이름의 피해자 모임을 만들고, 국회에서 증언 대회도 열었습니다.

국회를 향해선 5·18 성폭력 피해자들의 후유증을 고려한 새로운 보상 기준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지금은 신체 상해 중심으로만 보상 기준이 정해져 있어, 성폭력 피해를 보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7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의 첫 재판.

새벽 첫 열차를 타고 올라온 ′열매′ 회원들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향했습니다.

[김복희/5·18 성폭력 피해자 모임 ′열매′ 대표 (11월 7일)]
″우리는 개인적 감정이 아닌 헌법과 법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성폭력은 국가의 이름으로, 권력의 이름으로 벌어진 범죄였습니다.″

피해자들은 ″신속한 판결로 5·18 성폭력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국가 측은 일부 피해의 경우 사실관계를 다시 다퉈봐야 한다거나, 소멸시효가 지나서 배상이 어렵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날짜는 작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5.18의 비극이 잉태된 바로 그 날짜였습니다.

이 날짜를 선택했던 이유.

생전 다시는 겪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불법 비상계엄을 목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경숙/5·18 성폭력 피해자]
″너무 힘들었는데 이 계엄령이 뭔데 또 나온다냐… 변호사님한테 그 우리 서류 보류시키지 말고 12월 12일날, 꼭 12·12사태로 넣어주시오. 제가 그랬죠.″

′열매′ 회원 중 가장 고령인 78살로, 휠체어나 지팡이 없인 몇 걸음 걷지 못하는 성수남 씨.

5·18 당시 희생자 시신을 수습하다 계엄군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했습니다.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 소식을 듣자, 1980년 그때처럼 피를 닦을 수건과 약통을 챙겨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로 달려갔습니다.

40여 년 전 그날의 악몽이 재현될 것 같아 분노가 치밀었다고 합니다.

[성수남/5·18 성폭력 피해자]
″(TV에) 막 총을 군인들이 몰아붙이고 그냥 군인들이 나타나고 막 그러더라고. 옛날같이 계엄군들이 또 이제 덮쳐버린다 하고… 그냥 분해갖고 나갔지. 또 이제 뭔 난리 날까 봐. 수건하고 막 이렇게 좀 챙겨 갖고 갔지. 약통하고…″

40여 년 전, 이 땅의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 젊었던 그들의 꿈도 인권도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명예회복을 위해, 그리고, 불법적인 계엄이 국민들에게 어떤 끔찍한 고통을 주는지 널리,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이들은 죽는 날까지 남은 힘을 다할 생각입니다.

<blockquote style=″position:relative; margin:20px 0; padding:19px 29px; border:1px solid #e5e5e5; background:#f7f7f7; color:#222″>′5.18  성폭력 진상조사보고서′를 공개합니다.
방송에 다 담지 못한 피해자들의 구체적 진술과 판단 근거가 담겨 있습니다.</blockquote>

5·18 성폭력 진상조사보고서
<a href=http://image.imnews.imbc.com/pdf/society/2025/11/20251123_1.pdf ″ target=″_blank″><b>http://image.imnews.imbc.com/pdf/society/2025/11/20251123_1.pdf </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