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부른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던 언론인 밥 우드워드의 신간 ′격노(Rage)′(15일 출간 예정, 현지시간)를 한국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MBC가 입수해 살펴본 결과, 두 정상이 주고받은 20여 통의 편지에 담긴 화려한 미사여구 뒤에는 치열한 수싸움이 있었다.
지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 뒤 트럼프 대통령은 본국에 돌아오자마자 펜을 들어 김정은 위원장에게 우호적인 편지를 쓴다.
□ 6월 15일(미국 시간) 트럼프 대통령 친서
″방금 막 미국에 도착했고 북한과 당신에 대한 미디어의 반응이 ′판타스틱′하다″
<i>″I just have arrived back in America, and the media for North Korea and you has been fantastic″</i>
하지만 다음 친서부터는 트럼프의 성격을 보여주듯 직접적이다.
2018년 7월 판문점 실무 접촉을 끝내고 1박 2일간 3차 방북 협의를 가는 폼페이오 손에는 싱가포르 합의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폐기하기로 약속한 미사일 시험장 검증문제, 그리고 비핵화 초기 조치까지 거론됐다.
□ 7월 3일 트럼프 대통령 친서
″폼페이오 장관은 내 지침에 따라 당신과 ′한반도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가능한 비핵화′와 북미간의 더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첫번째 주요한 단계를 밟기 위해 합의를 찾아가려고 한다″
<i>″Secretary Pompeo is under my instructions to find agreement with you on taking the first major steps toward the 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toward a more peaceful future between us.″</i>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가능한 비핵화, 즉 FFVD라는 강경한 원칙을 서신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이 친서를 동반한 3차 방북은 실패였다.
폼페이오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지도 못했고 싱가포르 합의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언론들은 ′빈손 방북′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떠나는 날 북한 외무성은 담화를 내고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측은 정세 악화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기본문제인 조선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 문제까지 조건과 구실을 대며 멀리 뒤로 미루어놓으려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 미국 인터넷 언론 복스(VOX) 등은 트럼프 대통령이 당시 싱가포르 회담에서 ′종전 선언′을 해줄 것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구두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정전 조약이 합의됐을 때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곧 끝날 것이라 희망할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은 곧 종결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대신 폼페이오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의 답서를 받아왔는데, 국내 비판여론에 직면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공개했다.
구체적인 답변 없이 둘의 관계를 칭송하는 내용 뿐인 친서였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김정은 ″고대하던 종전선언은 빠졌다″</strong>
이번엔 김정은 위원장이 친서로 역공에 나섰다.
□ 7월 30일 김정은 위원장 친서
″비록 고대했던 ′전쟁 종결 선언′이 빠져 유감이지만 각하처럼 강력하고 걸출한 정치가와 좋은 관계를 맺게 돼 기쁘다″고 했다.
<i>″I feel pleased to have formed good ties with such a powerful and preeminent statesman as Your Excellency, though there is a sense of regret for the lack of anticipated declaration on the termination of war.″</i>
긍정적인 표현 뿐이던 이전 편지와 다른 태도다.
전후 협상의 맥락을 고려하자면 우호적인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 ′종전 선언′이 이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종전선언에 관심이 없다고 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원하는 것으로 봤다″는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회고는 적어도 이때는 틀린 얘기다.
□ 8월 2일 트럼프 대통령 친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도 확답을 주지 않고 비핵화를 강조한다.
″이제는 (싱가포르 회담에서) 우리가 한 다른 약속, 완전한 비핵화 등에서 진전을 이뤄야할 때″라는 것이다.
<i>″It is now time to make progress on the other commitments we made, including complete denuclearization.″</i>
이 편지 이후 ′종전 선언′이 먼저냐, ′비핵화 초동조치가 먼저냐′는 신경전 끝에 8월로 예정됐던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협의는 공식 발표 하루 만에 무산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관계가 좋지만 바뀔 수 있다. 전체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매파인 미국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한미연합훈련을 재개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비핵화 조건′ 편지로 쓴 김정은</strong>
답답한 정국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다시 트럼프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톱 레벨′ 소통으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것이다.
이번엔 직접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조건을 제시했다.
□ 9월 6일 김정은 위원장 친서
먼저 ″우리는 단계적 방식으로, 한번에 하나씩 의미있는 절차를 밟아가고 싶다″며 ″ 위성발사구역, 즉 ICBM과 관련된 시설이나 핵무기연구소의 완전한 폐쇄, 핵물질 생산시설의 돌이킬 수 없는 폐쇄″를 예로 들었다.
<i>″We are willing to take further meaningful steps one at a time in a phased manner, such as the complete shutdown of the Nuclear Weapons Institute or the Satellite Launch District and the irreversible closure of the nuclear materials production facility″</i>
이미 트럼프 대통령에 약속했던 대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을 해제하기 시작한 뒤였던 만큼 이때 언급한 시설들이 다른 특정 장소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실제 9.19 남북 정상회담에서 동창리 시설의 폐기와 조건부 영변 핵시설 폐기를 공표하기 전에 미국측에 직접 유사한 안들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브로맨스′ 편지로 다음 정상회담 유도</strong>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제안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예의 둘 사이의 ′브로맨스′를 강조하는 서신들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음 만남′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 12일 김정은 위원장 친서
″각하와의 <다음 번 만남>은 안전하고 굳건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기회가 될 것″이라며 ″당신과 내가 쏟는 노력이 만족할만 한 결과를 계속 낼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i>″my next meeting with you will be an opportunity to plan for a safe and solid future. I’m sure that the effort you and I are putting forth will continue to bring about satisfactory results.″</i>
실무협상을 건너뛰고 다시 한 번 정상 간 담판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가겠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도 숨어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그해 12월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의 다음 정상회담을 기대하고 있다.
비핵화 문제에서 진전을 보고, 당신의 리더십 하에서 북한 주민들이 밝은 미래를 갖는 문제에서 진전을 보길 기대하고 있다″고 화답한다.
□ 12월 24일 트럼프 대통령 친서
<i>″I look forward to our next summit and to making real progress on denuclearization and a really bright future for your people under your leadership in the year ahead”</i>
그러나 이듬해 열린 하노이 회담에선 영변 핵시설 단지 이상의 양보를 요구한 미국과 주요 제재의 해제를 바란 북한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편지들은 ″화기애애하지만 이전보다 빈번하지 않았다. 비핵화 협상의 진전보다는 두 정상의 관계가 더 주목을 받았다″고 밥 우드워드는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