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서혜연

[World Now] 24시간 통행금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입력 | 2021-01-29 11:34   수정 | 2021-01-29 11:39
어두운 밤 군용 탱크가 도심을 활보하고, 거리에는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자동차는 화염에 휩싸이고, 매캐한 연기가 거리에 가득합니다.

이곳은 레바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트리폴리입니다.

마치 내전이라도 벌어진 것 같지만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령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군인들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시위대에 발포까지…군부대 투입해 진압</strong>

시위는 지난 25일부터 시작됐습니다. 군부대가 투입됐고 시위대의 저항은 더 거세졌습니다. 곳곳에서 폭동으로 번졌습니다.

그러다 시위 나흘째인 지난 28일, 경찰과 군이 대규모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30대 남성이 총을 맞고 숨지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고무총이 아닌 실탄을 맞았는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목격자들은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날 진압과정에서 다친 사람만 2백명이 넘었습니다.

레바논 경찰은 실탄을 발포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대체 레바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레바논 시민들은 왜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봉쇄령에 저항하고 있는 걸까요?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집에만 있으라고? 먹을 것을 달라!</strong>
레바논 정부는 이번 달 들어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고 의료 체계가 붕괴 위기에 놓이자, 지난 14일부터 유례없는 ‘24시간 통행금지’ 봉쇄령을 내렸습니다.

봉쇄령 기간 동안 레바논 국민들은 빵집, 약국, 병원 등을 방문하는 긴급 상황이 아니면 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생필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도 배달만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들의 생계유지 대책은 내놓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집에만 머무르라고 하니 참다못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술래이만 모우너 알 아타키 씨는 ″배고프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시위에 참가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남편과 함께 자리에 참석한 알 아타키 씨의 부인도 ″집에만 머무르라고 하는데 먹을 것이라도 주고 집에 있으라고 해야될 것 아니냐″고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가 시민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경제위기에 코로나19까지…″굶어 죽느니 거리로 나온다″</strong>
단지 봉쇄령 뿐 만이 아닙니다. 격렬한 봉쇄 반대 시위는 레바논의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과도 연관돼 있습니다.

막대한 국가 부채와 높은 실업률, 물가 상승 등으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레바논은 환율까지 크게 하락해 레바논 화폐의 가치가 80% 넘게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지난해 8월 발생한 베이루트 폭발 참사는 경제 위기를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유럽을 떠도는 시리아 난민들이 독일 등 유럽으로 가기 위해 경유지인 레바논에 대거 들어온 것도 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레바논 인구가 6백 80만명인데 난민 규모가 1백만 명이 넘었을 정도입니다.

난민 유입으로 인해 극빈층이 늘어났고 코로나 19로 전면 봉쇄령까지 내려지자,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로 먹을 것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겁니다.

하지만 레바논의 코로나19 상황은 봉쇄밖에는 답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 사실입니다.

작년 말 18만명 수준이던 누적 확진자는 한 달 만에 10만 명이 증가해 29만 명이 넘었습니다.

정부가 연말 연휴 기간에 통제를 완화했는데, 이 기간 동안 수천 명의 해외거주자들이 레바논을 방문했고, 이로 인해 1월 들어 신규 확진자 수가 급증한 겁니다.

중환자실 병동은 한계에 이르렀고, 의료 장비조차 부족해 제대로 치료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누적 사망자도 2천 6백명이 넘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같은 중동의 부자 나라는 이미 작년 말부터 백신 접종을 시작했지만 레바논은 백신 물량 확보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바논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최고 수준의 봉쇄령 뿐이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가난한 사람들은 지쳤다″</strong>

″봉쇄령이 내려졌고, 일자리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지쳤고, 불행합니다.″ 시위에 참여한 사미르 아가 씨가 한 말입니다.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레바논 사람들은 코로나19보다 굶주림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게 두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봉쇄 반대 시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시위는 점점 반정부 양상을 띄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는 레바논 정부는 24시간 봉쇄 조치를 2월 8일까지 연장했습니다.

코로나19는 전세계에 동시에 퍼졌지만, 선진국보다는 후진국에,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욱 가혹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