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10-06 08:09 수정 | 2022-10-06 08:10
지난 열흘 남짓 전세계 금융시장의 관심은 온통 영국에 쏠렸습니다. 리즈 트러스 총리의 야심찬 계획-이른바 작은 예산(mini-budget)-은 발표 즉시 영국 금융 시장을, 곧이어 국제 금융시장까지 뒤집어 놓았죠.
영국 중앙은행이 100조원이 넘는 자금(650억 파운드)으로 시장 개입에 나서야 했습니다(9/28). 트러스 내각의 재무장관 콰지 쿼텡은 영국 시각 월요일(10/3) 아침, 감세 계획 일부를 전격 철회했습니다. 말하자면 결자해지! 시장은 안정을 되찾았고, 혼선은 일단락됐습니다.
<b style=″font-style:italic;″>하지만, 불씨가 여전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왜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고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b>
트러소노믹스의 철회? 전술상 후퇴?
사태의 발단이 된 ′작은 예산′에 대한 영국 야당과 여론의 반발은 주로 상위 1% 고소득자가 혜택을 보는 소득세 최고세율 조정에 집중됐습니다. 하지만, 축소한, 혹은 작은(mini)이라고 번역할 명칭에 부합하지 않는 제법 거창한 부양책이 담겨 있습니다.
<b style=″font-style:italic;″>′작은 예산′의 골자는 1) 전기·에너지 가격 동결을 위해 2년 동안 240조원(1500억 파운드)을 소비자·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한다, 2) 5년 동안 72조원(매년 14조4천억원) 정도 세금을 줄여준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결코 작지 않습니다.</b>
금융시장은 트러스 총리가 후보 시절부터 공언했던 정책 보따리에 줄곧 부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총리가 된 트러스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장의 선순환을 만들 새로운 접근″이라 의미를 부여한 트러스의 경제관을 담은 예산안은 취임 17일 만에 별다른 수정없이 발표됐습니다.
그런데, 금융시장 반응은 예상보다도 냉혹했습니다. 파운드화 가치가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까지 급락했고(9/26), 영국 국채 금리는 투매 현상을 빚으며 30여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9/28)까지 치솟았습니다. 신용평가사 S&P는 영국의 신용등급을 내릴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는데 이르렀습니다(9/30).
<b style=″font-style:italic;″>″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역사의 첫 장만 읽은 것 같다″</b>(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언론의 혹평을 불렀습니다. 래리 서머스 미국 전 재무장관으로부터 <b style=″font-style:italic;″>″개발도상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신뢰의 상실″</b>이 일어났다는 비판을 받은 데 이어, 국제통화기금 IMF로부터, ′계획을 철회해달라′는 (영국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이례적 충고를 듣기에 이르렀습니다.
금융시장의 강력한 경고 신호에도 ′원안 강행′을 고집하던 트러스 총리는 금융시장 개장을 앞둔 월요일 이른 아침 결국 ′일부 후퇴′를 선택합니다. 전날 심야회의에서 확인한 당 내부 반발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을 겁니다.
′국채 금리 급등으로 주택 담보 <b style=″font-style:italic;″>대출 금리가 오르면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b>될 것′, ′<b style=″font-style:italic;″>국민들의 연금 펀드에 큰 손실</b>을 안길 것′이라는 경고가 민심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보수당 지지율이 야당(노동당)에 33%p 뒤진다는 여론조사 결과(유고브, 9/29)가 보수당 의원들을 압박했겠죠.
보수당내 지지 의원들조차 ″잘못된 가치를 보여준다″, ″보수당 답지 않다″는 원색적 비판을 쏟아내, 의회 통과 가능성마저 불투명해졌습니다. 세계 채권·주식시장까지 뒤흔들었던 열흘의 정책 실험 시도는 신임 총리의 회군으로 일단락되는 분위기입니다.
비판이 집중됐던 ′부자 감세′가 문제라면, 원인이 제거된 셈입니다. 하지만, ′불씨가 그대로 남았다′는 시각도 여전합니다.
우선 이번 발표로 되돌린 고소득층 감세는 트러스 정부 원안의 5%에 못미치는(20억 파운드/450억 파운드) 규모에 불과합니다. ′부자를 위한 감세′를 철회했다는 정치적 효과는 남겠지만, 불안의 뿌리를 제거했다 말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국채(길트)와 파운드화 가치를 끌어내린 것은 영국의 재정 상황, 영국 재정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의심이라는 것이 IFS(재정연구소)같은 영국 싱크탱크 분석입니다. 영국의 쌍둥이 적자(정부 부채, 경상수지 적자)가 문제인데, 새 내각은 이것을 줄일 방법을 내놓지 않았다는 지적이죠.
영국의 정부 부채는 2019년까지 GDP의 80% 초반을 유지했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GDP 100%을 넘는 수준까지 늘었습니다. 이번 보조금과 감세안은 이 비율을 불과 3년 안에 5% 넘게 끌어올릴만큼 큰 규모입니다.
국가 경제가 1년 동안 외국과 돈을 벌고 내준 거래를 정산하는 가계부라 할 ′경상수지′도 올들어 악화됐습니다. 영국은 지난 1분기 GDP의 8%를 넘는 적자(83조원)를 봤는데, 적자규모가 단숨에 4배 정도 늘어난 것입니다. 에너지용 가스 수입 가격이 급등한 탓이겠지만,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죠.
다시 한번 정리하면, <b style=″font-style:italic;″>새 내각은 1년에 100조원 넘는 돈을 국민들에게 쓰겠다는 약속과 세금을 10조원씩 덜 걷겠다는 약속을 동시에 했습니다. 이 계획에 필요한 돈은 남에게 빌려(국채발행) 마련하겠다고 한 것이죠. 3일 발표로 철회한 고소득자 감세 규모는 3조원(20억 파운드)을 조금 넘습니다.</b>
과정이 어찌되었든, ″정부의 감세와 에너지 보조금 정책을 펴는데 필요한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근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스테픈 밀라드, 영국 국립 경제·사회조사 연구소(NIESR) 부소장)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타협을 위한 전술적 후퇴를 선택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았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부메랑 될까, 눈치 보는 나라들></strong>
경기 부양책을 쓰고 싶은 (혹은 이미 쓰고 있는) 나라는 영국만이 아닙니다. 트러스 총리는 ″우리보다 적자 규모가 큰 선진국이 많다″고도 항변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여러 국가들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금리를 올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 일본·중국처럼 준-기축 통화국 위상을 가진 나라들은 금리를 제자리에 묶고 경기 침체에 대응하는, 나름의 ′독자 노선′을 걷고 있기도 합니다. 최근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큰 돈을 풀겠다″는 극우 성향 정당이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 영국 상황을 보면서, 일본·중국 같은 나라의 고심도 깊어질 겁니다. 일본은 GDP의 2배가 넘는 거대한 빚에 탈나지 않을지 안팎의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은 GDP의 30%에 이르는 부동산 산업의 침체가 확산돼 금융시장을 흔드는 ′전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될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금융시장이 영국발 충격에 진통을 겪던 지난주 두 나라 통화는 유난히 크게 하락했고, 중앙은행이 외환 시장에 개입해 환율 방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손발 묶인 정부‥″위기 대응 어려워″></strong>
경기가 어려워질 ′조짐′을 보일 때, 정부가 선제적으로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경기대응적 정책′이라고 부릅니다. 적절한 시기에 좋은 정책을 쓰는 것이 바로 정부의 능력이죠. 지금을 경기 부양책을 펼쳐들 적절한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벌어진 혼란은 정부가 정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환경 아래 있다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의 냉엄함을 보여줍니다. 대단치 않은 부양책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습니다.
미국의 급격한 금리인상이 다른 나라 정부의 정책 수단을 빼앗아간 셈입니다. ″인플레이션이 물러갈 때까지 정부의 손이 상당기간 묶인 상태가 될 것″(신영증권 박소연 스트래터지스트)이 분명해 보입니다. 재정적자가 큰 정부일수록 제약은 더 심할 겁니다. 영국처럼 존재감이 큰 나라도 예외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경제는 어떨까요? 정부 부채 규모는 유럽 선진국보다 작고, 경상수지도 그럭저럭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이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점도 있습니다.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 경제 규모가 작고, 통화·경제의 위상이 높지 않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발생한 위기의 소용돌이에 급작스레 빨려들어갔던 1997년 외환위기처럼, 주변 거대 경제권의 위기에 전염되지 않도록 경계·대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계 경제는 ′누구도 안전 항해를 자신할 수 없는 위험한 해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예외없이 위태롭고,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만한 작은 약점을 파고들어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전세계 금융시장에 영국이 몰고 온 ′작은 폭풍′이 알려준 교훈일 겁니다.
<i>요약 정리: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을 불러온 영국 감세 정책, 영국 새 정부가 일부를 철회했지만, 취소된 감세 규모는 당초 계획의 5%에 불과합니다. 영국의 쌍둥이 적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금융시장 불안이 재연될 수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인플레이션과 달러의 급격한 강세로, 경기 대응 정책을 자유롭게 펼 수 없는 금융시장 상황 아래, 우리 경제도 경계를 늦어서는 안됩니다.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