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임상재

[스트레이트] '무임금' 1년, 그래도 버틴다

입력 | 2025-11-09 21:09   수정 | 2025-11-0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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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무임금′ 1년‥버틴다</B>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챙기며 출근 준비를 하는 장미영 씨.

″<사과, 과일 가져와. 반쪽만 싸갈래?> 반쪽만. 챙겨줬지? 포크 내가 넣을게.″

매일 새벽같이 챙겼던 도시락은 이제 일주일에 한두 번, 그것도 오전 느지막이 챙기면 됩니다.

[박희순]
″전에보다는 좀 뜸하죠. 요즘에는 두 번?″

인천에서 서울까지, 40분 남짓 걸리는 출근길.

라디오를 들으며 울고 웃다보면 순식간에 지났던 이 시간이, 언젠가부터 적막만 흐르는, 길고 긴 시간이 됐습니다.

[장미영]
″언젠가부터 그래요, 언젠가부터. 그래서 잘 안 듣게 되더라고요. 노래만 나오고 그러니까 좀 속상한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사무실 한편 작은 부스.

미영 씨의 소중한 일터입니다.

수도권 교통 정보를 전하는 19년 차 전문 리포터.

10명이 넘던 동료 리포터는 이제 5명만 남았습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쉴 새 없이 전하던 교통 소식은 이제 시간당 1번으로 줄었고, 날씨까지 맡게 됐습니다.

[장미영/교통 리포터]
″그전에 리포터들이 다 세분화가 돼 있어서 뭐 고속도로 전달하는 리포터 따로, 서울 시내 전담 리포터 따로, 그리고 뭐 기상 리포터 따로 심지어 뭐 철도 리포터, 공항 리포터 막 다 되게 많았어요. 다채로웠는데 저흰 지금은 다 이제 없어졌어요.″

평일 오전 11시.

어두운 사무실의 불을 켜는 이 순간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하지만, 밀려오는 서글픈 감정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김상아/아나운서]
″낮 시간대인데 아무도 없이 제가 불을 켜고, 그리고 나갈 때도 제가 불을 꺼야 하는 참 이런 환경이, 매일매일 좀 최대한 우울하지 않게 생각을 하려고 하는데…″

동료들로 북적대던 사무실엔 적막만 흐르고, 휴게실 냉장고는 텅 빈 상태, 업무에 필요한 용품도 다 떨어졌습니다.

[김상아/아나운서]
″원래 복합기가 2대가 있었는데 이것도 이제 저희가 돈이 없다보니까 아예 프린트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업무 자체가 지금 힘들어요. A4 용지랑 다 있어야 되는데 없어진 지 너무 오래돼서 저도 개인적으로 구매를 해서…″

입사 5년 차 아나운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시기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프로그램 하나 없다 보니, 상아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낮 12시의 5분 짜리 뉴스 한 번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동료 아나운서 7명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습니다.

[김상아/아나운서]
″그냥 방송이 좋아서 여기 들어왔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을 겪으니까, 정말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직원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지?′″

뉴스가 사라지면서, 기자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됐습니다. 

[김선환/기자]
″거의 한 50명 가까이 있었죠. 이제 그중에 상당 부분이 나갔고 지금 출근하는 인원은 5명 밖에 없어요. 오늘 날짜로도 1명이 퇴사를 했어요.″

수도권 유일의 지역 공영방송 TBS.

지난 1990년, 교통방송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 때부터 재원의 70%가량을 서울시 출연금으로 충당해 왔습니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이 취임한 지난 2022년, 서울시의회가 TBS 지원 폐지 조례를 통과시키면서 제작비가 줄더니, 지난해 9월부턴 인건비 등 모든 지원이 아예 끊겼습니다.

[TBS 비상고지 방송]
″시민의 방송 TBS는 경영상의 이유로 비상 방송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TBS 임직원은 현재 무예산의 비상 경영 상황 속에서도...″

이 때문에 주력인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은 5개로 줄었고, 시설 유지비도 없어 고가의 방송 장비들은 망가진 채 방치돼 있습니다.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 중인데 이 패드 보면 불이 나간 부분이 지금 고장 난 상태예요.″

견디다 못해 직원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6년 전 360명에 달했던 직원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남은 직원들도 1년 넘게 월급 한 푼 받지 못한 채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다.

[김도형/TBS PD]
″하루 10만 원 벌이로 연명하는 직원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대출들은 거의 다 제가 볼 때 한도가 다 차지 않았을까 싶은데 왜냐하면 급여가 없으니까, 대출받기도 사실 쉽지 않아요. 대부분 직원들이 부업을 하고 있고요. 일용직 같은 일들, 음식 배달 대행 서비스 같은 거…″

작은 동네 서점에서 책 정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중년 남성, 주용진 TBS 라디오제작본부장입니다.

[주용진/TBS 라디오제작본부장]
″돈을 벌어야 되는데 저는 제 건강 상태 때문에 이제 다른 친구들처럼 뭐 배달이나 이런 걸 할 수 없는 처지거든요.″

닥치는 대로 여러 일을 하면서도 라디오 방송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 

그럼에도 TBS를 어떻게든 지키려 하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무너진 회사를 그대로 외면할 순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용진/TBS 라디오제작본부장]
″예산을 끊어서 막는 경우는 80년대 전두환 때 이후 처음인 거거든요. 그런 식의 일은 일어나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크고…″

[김도형/TBS PD]
″퇴사를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우리가 무슨 큰 잘못을 해서 회사가 없어져야 되지?′ ′내가 왜 회사를 그만둬야 되지?′라는 의문을 가졌어요.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회사를 그만두는 거는 ′내가 이 부당함에 맞서지 못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고요.″

◀ 임상재 기자 ▶

이곳은 서울 상암동 TBS 사옥입니다.

멀쩡했던 공영방송, 출연자들과 직원들로 북적이던 방송사가 순식간에 고사직전 상황에 처했습니다.

서울시가 예산지원을 끊은 건 알려진 것처럼 비판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볼 수 있는데요.

프로그램만을 폐지시키거나 민형사 소송을 거는 수준이 아니라, 돈 줄을 끊어서 방송사 직원 전체를 길바닥으로 내몰았습니다.

자신들에게 비판적이었던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방송사를 아예 없애버리려한 한 조치는, 대한민국 언론 자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B>■ ″맘에 안 들면 없앤다″?</B>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자리를 지킨 동시에 서울시의회 과반 의석까지 차지한 국민의힘.

시의회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TBS 지원 폐지 조례를 발의했습니다.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이유는 TBS 대표 시사프로그램이었던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지나치게 편향됐다는 것이었습니다.

2018년 이후 5년 연속 수도권에서 청취율 1위를 차지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국민의힘은 진행자와 출연자까지 모두 민주당 쪽에 편향적이라며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이종배/국민의힘 서울시의원 - 오세훈/서울시장(2022년 9월 15일)]
″<지금 TBS 때문에 시민들의 불만이나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위상에 걸맞은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이미 기능이 쇠퇴한 교통방송으로서의 기능도 이번 기회에 새롭게 정립을 해서…″

압박 강도가 높아지면서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그해 12월 폐지됐습니다.

편향됐다고 비판하던 유일한 프로그램이 없어졌는데도, TBS에 대한 공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울시의 예산 지원 폐지 조례가 통과된 이후, 2021년 380억가량이었던 서울시 지원금은 매년 크게 줄었고, 지난해 행정안전부가 정부 출연기관에서도 제외하면서 아예 지원 근거마저 지워버렸습니다.

서울시는 민간투자 유치 등으로 재원을 확보하면 된다며 사실상 민영화의 길로 떠밀었지만, 정작 방통위가 정관 변경을 불허하면서 TBS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지원금이 완전히 끊기면서 각자의 프로그램에서 묵묵히 일하던 많은 직원과 그 가족들은 순식간에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됐습니다.

[장미영/TBS 교통 리포터]
″저는 교통을 전하는 사람인데 제가 뭐가 편향적이었을까요? 뭐 제가 뭐 빨간 불이라면 ′여러분 신호등에 빨간불은 나쁜 불입니다′ 제가 그랬을까요? 하루아침에 원래 기반을 두고 있던 곳에서 지원을 끊어버리는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는 저희 입장에서는 억울하죠.″

예산을 끊어서 맘에 들지 않는 방송사 전체를 없애버리려 한, 민주화 이후 초유의 언론 탄압 사례라는 평가입니다.

[신미희/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프로그램 하나, 뉴스 하나 잘못했다고 해서 방송사를 없애고 언론사를 없앤다면 민주주의의 기본인 ′언론 자유 보장′이라는 게 침해를 받는 일이 되지 않습니까? 이거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비판적이란 이유로 TBS 전체를 고사시키는 작업을, 과연 서울시의회만 독자적으로 한 걸까. 

TBS 사태와 관련해 자신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피해왔던 오세훈 서울시장.

[오세훈/서울시장 (국회 행안위 국정감사, 10월 23일)]
″TBS 출연기관 지정 해제 건은 참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TBS 폐국을 생각해본 적도, 지시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6월, 김어준 씨가 다시 돌아올 거란 말을 한 것이 TBS 지원금을 끊은 이유가 됐음을 인정했습니다.

[오세훈/서울시장 - 박유진/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 (서울시의회 정례회의, 6월 11일)]
″<당시에 지원 폐지 조례까지 안 갈 수도 있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런데 그 편향된 진행자가 나가면서 ′나 다시 돌아올 거야′ 이게 불을 질렀던 거 아닙니까?> 시장님 말씀은 ′그 진행자가 돌아온다′라는 것 때문에 불을 질러서 시의회에서 방송국 문 닫겠다는 거 결정했다는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나요?>″

지난달 23일 열린 국정감사.

서울시의회의 TBS 지원 폐지에 대해 서울시가 적극 찬성했다는 문건이 공개됐습니다.

2022년 폐지 조례안 심사보고서에서 당시 서울시 홍보기획관은 ′폐지 조례안 취지에 적극 찬성하며, 조례안이 가결되면 최선을 다해 후속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권칠승/더불어민주당 의원 - 오세훈/서울시장(국회 행안위 국정감사, 10월 23일)]
″<검토 보고서에 적극 찬성 입장을 밝혔잖아요.> 글쎄요. 그건 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비단 서울시뿐만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움직인 정황도 볼 수 있습니다.

정부 출연기관 지정 해제를 위해선 서울시장이 TBS 사장을 임명한다는 조항 등의 정관을 변경해야 합니다.

먼저 방송통신위원회가 정관변경 승인을 해줘야 하는데, 이를 건너뛴 채 행안부가 출연기관 지정 해제 조치를 강행한 건 당시 용산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민수/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 과방위 국정감사, 10월 20일)]
″방통위에서 정관 승인을 못 하니까 용산 대통령실이 움직여서 최측근인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필두로 위법한 ′출연기관 지위 해제′까지 감행한 것입니다.″

TBS 직원들은 당시 출연기관 지정 해제 절차가 위법하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소현민/변호사 (민변 미디어언론위원회)]
″먼저 해제한다는 고시를 해서 출연금부터 끊고 그다음에 이제 ′어떻게든 지배 구조를 변경하든 알아서 해라′ 이런 식이어서 위법하다는, 순서가 뒤바뀌어서 위법하다…″

곧 회사가 정상화될 거라는 바람으로 월급 없이 버텨온 1년.

직원들은 서울시 조례가 다시 개정 돼 예전처럼 시민을 위한 방송을 다시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송지연/전국언론노동조합 TBS 지부장]
″저희에게 정상화는 예전처럼 시민을 위한 방송을 만드는, 그래서 거주 외국인들 그다음에 서울 시민들 그 다음에 중앙 방송사에서 다루지 못하는 로컬 뉴스들을 예전처럼 다루는 그런 방송사로 돌아가는 거. 그게 정상화라고 생각을 해요.″

조용하던 회의실이 오랜만에 북적입니다.

최근 새롭게 시작한 라디오 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제작진이 다시 한자리에 모인 겁니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비는 0원.

당연히 제작진 보수도 없습니다.

[노소정/PD]
″이렇게 북적북적한 상태에서 방송을 한 게 정말 오랜만이더라고요. 그거 자체가 너무 좋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은 들었고…″

[박인영/작가]
″′라디오 유튜브 방송을 만들고 싶은데 도와줬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하셔서 뭐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그냥 돕겠습니다′″

진행자 역시, 출연료 없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흔쾌히 응했습니다.

[변상욱/진행자]
″뭐든 이제 한번 도와줘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번 뛰어들어서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을 했죠.″

TBS가 시사 프로그램 제작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지 2년 만에 처음 재개한 시사 방송.

[김혜지/TBS 아나운서]
″생방송 스튜디오에 들어간 건 일 년 넘었어요. 순간 좀 눈앞이 뿌옜어요. 뭐 이렇게 북받친다거나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꿈 같은 느낌?″

일주일에 단 이틀이지만, TBS 정상화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김도형/TBS PD]
″예전의 TBS로 돌아가는 과정 중에서 일단 시사 프로그램을 하게 된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 길이 쉽진 않겠지만, 다시 한번 ′시민의 눈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노소정/PD]
″TBS가 왜 시민들에게 필요한 방송이고 우리가 시민들한테 어떤 콘텐츠를 줄 수 있는지 우리 스스로 입증하고 우리가 그걸 많이 알려야겠다.″

[박인영/작가]
″시민들 속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겠다는 그 마음만은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 마음을 잊지 말고, 다시 한번 지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