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 집 치고는 제법 큰 규모인 이 곳~
실타래만도 수 백 가지 재봉기계도 가짓수가 꽤 많은데요?
″일반 재봉틀이 하나, 둘, 세 개가 지금 있고요.″
″일반 수선 집보다 기계가 많은 것 같은데요?″
″다양한 옷을 수선을 하자고 보니까 밍크, 가죽기계, 청바지기계, 본봉, 수크리, 오바록크
삼봉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기계들이 좀 많습니다.″
″이 기계는 모피 기계인데 보통 기술자들은 다루기 힘든 기계입니다.″
그 어렵다는 모피수선까지 하는 집이라고요?!
뭔가 전문점 느낌이 팍!팍! 나는데요~
수선이 다가 아닙니다! 직접 옷까지 만드신 다고요?
″입고 있는 옷도 제가 디자인을 해서 만든 거예요.″
정말 솜씨가 좋으시네요~
[정혜영/탈북민: 청가방도 만들어서 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도 주고
재봉 기술만 있으면 뭐든지 만들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못 만드는 게 없는 그녀~그야말로 금손 중에 금손!
그렇다보니 전국에서 전화문의도 끊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가져와서 제가 봐야지요. 네네. 한번 방문해 보세요~″
전화 문의뿐이겠어요~ 이곳에 수선가게를 오픈한지 겨우 일 년 이지만..
혜영 씨 솜씨 알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하루 평균 20명은 넘다보니 늘 일감들이 수북~
그런데, 혜영 씨와 같이 일하는 이분들은 누구시죠?! 직원들인가요~
″새터민이고, 저하고 이미 일을 많이 해서″
혜영 씨에게 기술을 전수 받아 수선사가 된 순희 씨와 금단씹니다.
혜영 씨는 인기 만점 재봉선생님 이기도 한데요.
탈북민의 정착을 위해 자신의 재봉기술을 재능기부 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금단/탈북민: 손끝이 야무지고 바느질도 꼼꼼하게 잘하고 고객님들한테 항상 헌신적이고.]
[윤순희/탈북민: 북한에서는 재봉이라는 건 잘 사는 집들이나 하는 걸로 알고
(배우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무작정 도전을 했는데 할 수 없더라고요.
사장님은 하나를 가르쳐줘도 자기 모든 걸 열심히 (가르쳐주세요)]
북한에서는 고급기술로 통하는 재봉기술!
혜영 씨는 어떻게 배워 수선 집까지 오픈하게 된 거죠.
북한에서 재봉기술을 배우고 오신건가요?
[정혜영/탈북민: 북한에서 살 때 상업학교라는 게 있는데 거기를 봉제를 배우려 해도 못가요.
중상급, 상류층들이 가지 우리처럼 막노동자라면 배우기가 힘 들었어요.
대한민국에 와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생각을 하는데
그때 리폼 수선 (교육과정) 남북하나재단에서 그 사업을 시작했더라고요.]
남한 정착을 준비하면서 정부 기관의 지원으로 봉재 기술을 배웠던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봉재기술을 배우다보니 재미도 재미였지만 본인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수선 실에 취직해 곧 그 실력을 인정받았고~
무려 5개 의류 수선 실의 총괄 관리직에 오르더니~
현재는 본인의 수선 집까지 창업하게 된거죠.
이쯤이면~혜영 씨가 수선 집 사장님으로 승승장구 할 수밖에 없었던 비법~!! 궁금하실텐데요.
첫 번째 비법! 그녀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1인치 조금 더?″
″최대한으로 어쨌든 해볼게요.″
″이거는 예쁘게 좀 외출복 할 거니까″
″최대한 어쨌든 예쁘게 해놓을게요~″
[정혜영/탈북민: 제가 진짜 못하는 게 없이 앞에 아울렛 있는데 거기서 못하는 거
어디서 수선 집에서 못하는 것 저희들이 다 했어요.
10월, 11월 되니까 (3달 만에) 완전히 적자에서 (매출이)절반이 뛰어 올랐어요.]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 고객을 만족시키는 그녀의 솜씨도 솜씨지만,
가장 큰 비결은 붙임성과 친절~
″언니야~ 언니가 안감을 가져오는 조건에서는 제가 1만원 해 줄게요.″
″언니 이게 3만 원 나와요. 다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북한식 투박한 말투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고요?
[정혜영/탈북민: 처음에는 안 되더라고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일 없습니다″ ″일 없습니다″하고 사투리가 많이 나가더라고요.
우리가 기술은 기술이고, 고객응대를 좀 잘해야 돼요. 손님들하고]
그래서! 옷을 맡겨둔 손님들을 위해 수선 상황도 문자로 소통하는 등
고객의 편의를 위해 늘 고민하고 노력한다고 하네요~
″고객님들에게 문자를 넣어주면 손님들이 (옷을)찾으러오고″
사실 혜영 씨가 지치지 않고 오늘을 향해 달려올 수 있었던 건
중국에 잠시 맡겨 두고 온 두 아이들이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인데요.
이제 애 둘 데리고 와야 하잖아요.
애들을 당장 데려온대도 내가 알바나 하고 뭘 하면 안 되잖아요. 다짐을 했어요. 무조건 하자.
재봉기술 덕분에 혜영 씨는 1년 만에 중국에 있던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 올 수 있었고
그 딸이 이제 대학생이 되어 엄마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