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베일 벗은 북한 초기 영화

입력 | 2020-12-05 09:07   수정 | 2020-12-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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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필국 앵커 ▶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의 영화인들의 역정과 그 영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고 합니다.

◀ 차미연 앵커 ▶

특히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북한의 초기 영화들이 처음으로 그 베일을 벗었다는데요.

이상현 기자가 그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한반도 전체가 시민들의 거리행진으로 넘쳐나고 만세삼창으로 울려퍼졌던 1946년 8.15 해방 1주년.

[해방뉴-쓰 특보(1946)]
″8.15 1주년 기념일을 맞이해서 아침 6시부터 서울역에서 시작돼 종로네거리, 광화문통을 거쳐 군정청 앞으로 향했습니다.″

그 해에, 독립운동과 해방의 감격을 표현한 최초의 광복영화 ′자유만세′가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자유만세(최초의 광복영화, 1946)]
″큰일 났어요. 다이너마이트 가져오다 사형은 헌병대에 끌려가고 있고 나는 자전거를 훔쳐타고 도망쳐왔어요″

이후 남북의 단독정부가 각각 수립된 1948년엔 각자 자신들의 체제를 옹호하고 상대를 비난하는 기록영화들이 선을 보입니다.

[민족의 절규(남한 기록영화, 1948)]
″고대하던 군중 함성속에 도착한 백발의 노박사. 피곤도 없이 원기도 왕성하게 비행기에서 내리시던 노박사″

[수풍에프런공사(북한 기록영화, 1948)]
″소련 인민의 품위있는 원조와 조선인민의 애국적 역량투쟁 앞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시위했습니다″

이런 해방기의 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서울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아가봤습니다.

[이상현 기자/통일전망대]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 지금 이곳에선 해방직후 우리 영화인들이 걸어간 길을 엿볼수 있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북한의 초기 영화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는데요. 어떤 영화들이 있는지 지금부터 한번 들어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남북의 영화와 영화인들에 대한 설명과 당시 영상, 희귀한 문헌자료들이 전시관을 빼곡하게 채웠고, 한켠엔 북한영화 특별관이 마련됐습니다.

[조소연/한국영상자료원 큐레이터]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과 북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던 영화인들의 엇갈린 행로 속에서 분단의 역사와 비극을 되새겨보고자 준비했습니다.″

우선 눈에 띈건 1949년 윤용규가 연출하고 최은희가 연기한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갈등과 좌우 반목을 잊기 위해 미학적 특징과 자연의 풍광, 인간사의 조화를 주제로 만들어졌고, 작품성과 희소성을 인정받아 근대문화재로까지 등록된 작품입니다.

[마음의 고향(남한 등록문화재, 1949)]
″아버진 몰라도 어머닌 서울에 있대요″
″서울? 그래서?″
″모두들 우리 어머니도 아씨처럼 이쁘대요″
″내가 뭐 이쁘냐?″
″그러믄요″

연출자 윤용규는 이후 한국전쟁중에 월북해 북한의 주요 영화를 연출하며 북한영화계의 기초를 다지게 되고, 나머지 제작진과 배우들은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북한에서의 윤용규 연출작중 하나가 이번에 처음 공개된 1952년작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미군에게 일시 점령된 고향마을을 지키려는 북한 인민들의 투쟁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재일조선인들을 상대로 일본에서 상영됐고, 일본어 자막이 붙은 채로 국내에 입수됐습니다.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북한, 1952)]
″원수들이 파괴한 것보다 백배 천배 더 좋은 것을 만듭시다.″

영화인들의 엇갈린 행로는 계속됐습니다.

북한정권 수립 1주년을 맞은 1949년, 항일운동과 북한정권 수립의 정당성을 소재로만들어진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고향′.

[내고향(1949, 북한 최초 극영화)]
″어머니!″
″아이고 이를 어떡한단 말이냐!″
″어머니 울지마세요″

이 영화를 연출한 강홍식은 북한에 남았지만, 그의 딸인 배우 강효실은 전쟁중 남한으로 내려왔고 최무룡과 결혼해 배우 최민수를 낳게 됩니다.

반면, 같은해 북한의 두번째 극영화로 제작된 ′용광로′는 월북영화인으로 이후 인민배우 칭호까지 얻는 박학과 문예봉이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이번에 역시 처음 공개됐습니다.

[용광로(1949, 북한 두번째 극영화)]
″동무를 통해서 우리의 손으로 해결 안되는게 없다는걸 깨달았소″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대표]
″초기 북한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많은 영화인들이 일제강점기때 활동하던 영화인들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영화의 연장선으로 북한영화를 바라볼 수 있고요, 일제강점기때부터 내려오던 한국영화의 흐름이 남한영화뿐만 아니라 북한영화에서도 흐르고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박학은 전쟁 당시에 제작된 북한의 대표영화 ′정찰병′에서도 주연을 맡아 영웅병사의 역할을 소화해냈고, 이 영화 역시 국내에서 공개된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찰병(북한 전쟁기 대표영화, 1953)]
″조선인민군 만세, 우리의 영명한 남녘 빨치산 만세, 우리 조국의 자유와 독립 만세.″

이번에 처음 공개된 북한 영화들은 한국전쟁때 국군과 미군이 노획했거나 외국의 디지털기록보관소, 아카이브에 보관돼 있던 자료들이 바탕이 됐습니다.

[조소연]
″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었던 컬렉션들을 다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에 의미있는 작품들을 여러편 발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체제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남북의 유명 영화인과 문인들은 각종 영화와 기행문들을 통해 미국과 소련 체제의 홍보 일선에 나섰고, 그 와중에 안철영이 하와이 교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1948년 영화 무궁화동산은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과 북으로, 그리고 해외로까지 흩어졌던 영화인들.

치열한 체제경쟁 속에서 과거 북한 영화와 월북 영화인은 우리에겐 금기의 이름이었고, 지금도 완전히 자유롭진 못합니다.

[한상언]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아 북한은 이런 식의 과정을 겪으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왔구나라고 하는 것을 이해를 하고 그 이해의 단계에서 통일이나 평화 교류 협력 이런 것들을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반쪽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영화 100년.

이제 그 나머지 반쪽을 채우기 위한 작업은 조금씩 이뤄지고 있고, 그래서 앞으로의 100년 한국영화는 더 의미있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통일전망대 이상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