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6-05 15:10 수정 | 2020-06-05 15:14
#. 드디어 시작된 ′사모펀드의 시간′
어제(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16번째 공판.
예고된 것처럼 ′사모펀드′ 의혹과 관련한 검찰과 변호인 측의 공방이 본격적으로 개시됐습니다.
이번 공판에서는 재판부 변경에 따른 사모펀드 관련 서류증거 조사 갱신 절차가 진행됐는데요.
증인 신문 없이 검찰과 변호인 측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사모펀드 관련 핵심 논리가 압축적으로 전개됐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사모펀드 라운드′의 대결 지형도가 비로소 선명히 그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양측이 제시한 사건의 골격은 곧, 재판부의 몇가지 질문에 뒤엎어질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 ″검사님, 강남빌딩 얘기 그만하시고…″
먼저, 검찰측 서증조사가 2시간 가량 진행됐습니다.
검찰은 정 교수의 사모펀드 관련 혐의별로 핵심 증거들을 제시하며 특히 ′범행 동기′를 부각하는데 집중했는데요.
예컨대 검찰은 가장 먼저 이번 사건의 ′기본 성격′부터 이렇게 규정하고 시작했습니다.
[6월 4일, 정경심 16차 공판 中]
검사 : ″거대 사적 이익을 추구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저버린 범죄입니다. 기본 구조는 피고인이 공적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M&A 세력과 유착을 통해 불법적 수익을 추구한 새로운 형태의 범행입니다″
때문에 검찰 측이 제시한 서증에선 정 교수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같은 ′의도′를 추측케 하는 내밀한 증거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미 수차례 논란이 됐던 정 교수의 ′강남 건물′ 관련 문자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6월 4일, 정경심 16차 공판 中] (검찰이 제시한 2017. 7. 7 문자메시지)
정경심→정00(남동생)
″내 목표는 강남에 건물 사는 것″
앞서 정 교수 측은 검찰이 이 문자를 공개하자 ″쟁점과 관계 없는 키워드로 여론몰이를 한다″고 반발한 바 있죠.
이를 의식했는지 검찰은 이 메시지가 범행 동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보다 훨씬 길고 구체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6월 4일, 정경심 16차 공판 中]
검사 : ″모두 상식적으로 강남에 건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이루기는 힘듭니다. 다만 로또가 3~4번 연속으로 당첨되는 등 그 정도의 수익이 생길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검사의 ′강남 빌딩론(?)′이 끝날 듯 끝날 듯 계속 이어지자, 급기야 재판장이 개입했습니다.
[6월 4일, 정경심 16차 공판 中]
임정엽 재판장 : ″검사님, 강남 빌딩 얘기 그만하시고 넘어가시죠. 충분히 설명이 됐습니다. 이 부분 설명이 너무 깁니다″
이 대목에서 방청객 일부가 실소를 터뜨렸고, 재판장은 ″웃지 마시고″라며 제지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의 지적에 검사는 잠시 당황한 기색으로 ″강남 빌딩…″이라고 중얼거렸지만, 바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 정경심 측 ″근본적 의문 드는 기이한 사건″
오후에 시작된 변호인 측 서증조사 역시 2시간 넘게 PT 형식으로 진행됐는데요.
기소된 각각의 혐의에 대해 ′왜 죄가 안 되는지′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박 논리는 워낙 다양했지만, 거칠게 요약하면 정 교수가 주도해 생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남편이 민정수석이 된 이후 직접 주식투자를 못하게 된 정 교수가 기존 자금을 회수해 가족들 명의로 사모펀드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금융위에 ′출자 약정 금액′을 실제보다 부풀려 보고했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 교수 변호인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근본적 의문이 든다′고까지 말합니다.
[6월 4일, 정경심 16차 공판 中]
정 교수 변호인 : ″코링크PE의 의무사항 위반에 대해 (정 교수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기이한 사건입니다. (중략)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데…″
사모펀드를 규제하는 법령에 따르면 출자자가 바뀌거나, 출자금액이 달라지면 금융당국에 변동 사항을 반드시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그 보고는 사모펀드 운용사, 그러니까 이번 사건에선 ′코링크PE′가 하게 돼 있어서
출자자 중 한 명일 뿐인 정 교수는 이같은 ′업무집행′에 관여할 수도 없고 관여해야 할 의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국에 뭔가 잘못 보고됐다 치더라도 ′코링크PE′가 잘못한 걸 가지고 왜 정 교수를 기소했느냐, 이거죠.
#. 정작, ′투자냐 대여냐′는 중요치 않다?
사모펀드와 관련해서 검찰과 변호인 측이 몇 달간 증인 신문 때마다 치열하게 다툰 대표적인 쟁점이 하나 있죠.
바로 ′투자냐 대여냐′ 하는 쟁점입니다.
맥락을 간단히 살펴보면요.
별도 기소돼 선고를 앞두고 있는 조 전 장관의 5촌 조카 조범동 씨에겐 70억 원이 넘는 업무상 횡령 혐의 등이 적용됐는데요.
이 여러 건의 횡령 혐의 가운데 코링크PE에서 매달 컨설팅 비용 860만 원을 지급하기로 허위 계약을 체결해 회삿돈 1억 5천여만 원을 빼돌렸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범행에 정 교수가 공범으로 공소장에 적시돼 있는데요.
코링크PE에서 컨설팅비 명목으로 매달 860만 원씩 지급한 돈을 실제로 받은 게 정 교수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 교수는 그 돈이 2017년 2월에 빌려준 총 10억 원에 대해서 조 씨가 약속한 연 10% 이자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죠.
여기서 앞서 검찰과 정 교수 측이 이 금전거래 성격을 두고 몇달간이나 공방을 벌였던 ′투자냐 대여냐′라는 쟁점이 나오는 겁니다.
검찰 측은 정 교수가 남동생과 함께 10억 원을 코링크PE에 투자하는 대가로, 최소 수익금을 보전받기 위해서 회삿돈 횡령이 이뤄졌다고 보고 있고요.
정 교수 측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자신은 그저 매달 정해진 이자를 받은 것 뿐이라고 맞선 겁니다.
이런 대립이 계속되면서 마치 ′투자′라면 죄가 되고, ′대여′라면 문제가 없는 것이라는 식의 논리가 짜여진 것이죠.
그런데, 이번 공판 양측 서증조사가 끝난 뒤 재판장이 이 쟁점을 직접 언급합니다.
[6월 4일, 정경심 16차 공판 中]
임정엽 재판장 : ″검찰은 ′투자 계약이다′, 피고인은 ′대여 계약이다′ 강조했는데 저희 재판부가 현재까지 논의한 바에 의하면…(중략)…′투자냐 대여냐′에 (횡령죄 공범 여부 판단의) 논리적 귀결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일까요?
#. 이제 핵심은 ′알았냐 몰랐냐′로‥
정리해보면, 재판부가 보기에 오간 돈의 성격이 ′대여냐 투자냐′는 유무죄를 가리는 데 큰 관련이 없고,
정 교수가 ′조 씨의 회삿돈 횡령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가 오히려 주된 쟁점이라는 거죠.
재판부는 이같은 공범 판단의 기준으로 ′기능적 행위지배′ 여부를 제시했습니다.
법률 용어라 잘 와닿지 않으실 텐데요.
쉽게 말하면 조 씨와 정 교수가 각자 원하는 바를 함께 이루기 위해 역할을 나눠서 서로 이용할 의사가 있었느냐가 핵심이란 겁니다.
만약, 정 교수가 그 돈이 횡령 자금이란 걸 알면서도 자신의 이자 수익을 확실히 받으려 했다면 횡령 공범이 돼서 유죄.
정당한 돈인 줄로만 알고 받은 거라면, 횡령 범죄에 가담했다고까진 볼 수 없어서 무죄가 된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재판부는 또, 앞서 조 씨 재판에서 거듭된 쟁점인 ′코링크PE의 실소유주가 누구냐′하는 것도 정 교수의 공소사실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짚고 넘어갔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재판에서 실소유주를 밝히려고 너무 몰두할 필요가 없다고도 강조했습니다.
#. 새로 부상할 쟁점은?‥재판부의 ′힌트′
이렇게 지금까지 재판과 다수 언론 보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던 쟁점을 일순간에 불필요한 것으로 바꿔버린 재판부.
마지막으로 이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쟁점엔 슬쩍 밑줄을 그어줬습니다.
[6월 4일, 정경심 16차 공판 中]
임정엽 재판장 : ″피고인이 그러면 돈을 꿔준 상대방이 누구냐, 조범동 개인이냐 코링크PE냐, 라는 문제가 나오죠. (중략) 앞으로는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코링크PE 회사에 꿔준 거냐, 조범동에게 꿔준거냐 부분은 나중에 차차 주장하세요″
이 얘기도 쉽진 않은데, 이렇게 보면 해석의 실마리가 언뜻 보입니다.
일단 이 사건에서 조 전 장관의 5촌 조카 조 씨에게 적용된 ′업무상 횡령′이라는 범죄가 성립되려면 조 씨가 회삿돈을 빼돌려서 개인 빚을 갚는 데 쓴 경우여야 합니다.
′횡령′이라는 건 남의 돈을 일부러, 사적으로 써버리는 범죄를 가리키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 정 교수가 조 씨가 아닌 ′코링크PE′ 회사에 돈을 빌려준 거라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조 씨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회사 자금을 빼돌린 게 아니라, 회사가 빌린 돈을 회삿돈으로 갚은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이 경우 ′허위 컨설팅 계약′을 체결해 실제 자금 사용처를 숨긴 건, 회계 처리 위반으로 처벌될 순 있어도 정작 ′업무상 횡령죄′는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직 명확히 손에 잡히진 않지만, 재판부가 ′차차 주장하시라′고 화두를 던져둔 만큼,
이런 쟁점이 향후 공판에서 기존에 비중있게 다뤄졌던 쟁점들을 대체할 거란 예측도 조심스레 해볼 수 있겠죠.
다음주에는 정 교수 사건 공판이 두 번 열립니다.
사모펀드 혐의 관련한 가장 핵심적인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조범동 씨가 이틀 연속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인데요.
이번 공판에서 마치 복선처럼 떠오른 새로운 쟁점들이 어떻게 자리잡게 될지,
달라진 사모펀드의 지형 위에서 양측이 과연 어떤 논리를 준비해 나타날지도 주의깊게 지켜보고 다시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