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가 했던 펀칭 공정은 화학물질을 취급하지 않았다…공조시스템으로 인근 공정에서 사용하는 유기용제와 포름알데히드에 노출된 것으로 판단되나, 노출기간이 짧고 병과의 관련성에 대한 역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또 질병의 원인물질로 알려진 벤젠이 작업환경 측정 중 노출수준 평가 결과 검출되지 않았고 노출 가능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먼저 근로복지공단이 판단할 때 사용했던 역학조사에 잘못이 있었다고 꼬집었습니다.
2015년 12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사업장에 대해 역학조사를 했는데, 김 씨가 근무할 당시 펀칭작업을 했던 1층에 대해선 조사조차 하지 않았던 겁니다.
김 씨 사망 이후 회사는 펀칭작업을 2층으로 옮겼는데, 2층에 대해서만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판결문 中 / 서울행정법원 3부]
″김 씨가 근무할 당시 펀칭 공정은 1층에 있었고 근처에는 가공실과 박막실이 위치해 있었다. 가공실과 박막실에서는 아세톤, 이소프로필알콜, 금속가공유, 황산 등 다수의 유해물질이 사용된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 역학조사에서는 이와 같이 작업 장소의 변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층에 위치한 가공실과 박막실에 대해서는 포름알데히드와 벤젠, 톨루엔, 자일렌 등의 휘발성 유기화합물에 대한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김 씨가 2교대 근무에 연장근무, 주말특근으로 주 6일 이상 하루 10.5시간이나 근무했고 펀칭 공정 외에도 다른 공정에서도 상당기간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다른 종류의 유해물질이나 더 많은 양의 유해물질에 노출됐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회사는 작업의 업무분장이나 작업량 같은 기초적인 자료도 재판부에 내지 않았고, 유해화학물질의 종류나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게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재판부는 반도체 공장 ′클린룸′의 특성을 짚었습니다.
[판결문 中 / 서울행정법원 3부]
″작업 장소들은 층별로 하나의 공조시스템을 사용했고 내부적으로 공기를 재순환하는 클린룸 설비의 특성상 다른 작업 장소에서 발생한 유해물질에 함께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반도체 공장 ′클린룸′의 세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해보이는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에서, 먼지 하나 없이 세심하게 만들어 나간다는 반도체 관련 제품들.
하지만 대체 회사가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이 물질들이 어떻게 화학 반응을 해서 어떤 유독물질을 만들어내는 지 그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쉽게 알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갇힌 공간에 화학물질들이 떠 다니는 그 곳에서 많은 이들이 시름시름 앓다 숨져갔지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우린 아직도 확인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회사는 필수적인 정보조차 공개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피해자에게,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어떤 물질로 왜 이 병에 걸리게 된 건지 증명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김 씨의 부인은 A4용지에 적은 글을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읽어내려갔다고 합니다.
″시부모님, 형제분들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십니다. 유전적인 것도 없고, 남편의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내 남편이 왜 죽었는지, 저한테 조사하라고 하는 게 너무 버거웠습니다.″
서울행정법원은 김 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근로복지공단 등 국가기관이 피해자들에게 의료적인 증명을 엄격히 요구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판결문 中 / 서울행정법원 3부]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작업현장에서 생길 수 있는 이른바 ′직업병′에 대한 경험적, 이론적 연구결과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 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의 넋두리
마지막으로 반올림을 통해 김 씨 부인이 남긴 메시지를 전합니다.
<i>″우리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6여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가 절망과 분노로 가득한 세월이었습니다.
2020년 5월 28일까지도 근로복지공단과 남편의 회사는 저의 남편의 질병이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더불어 남편의 질병에 대한 인과관계를 밝히고 증명하는 책임은 오로지 남겨진 가족의 몫이었습니다. 힘 없고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너무나 가혹한 우리나라의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재판에서 승소하여 너무나 기쁩니다.
이번 재판으로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쓰러진 지 한 달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난 남편의 죽음이, 산업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해 중 하나임을 밝혔습니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져, 그로 인해 인체에 유해한 약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조치가 이루어져 안전한 노동환경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또한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국가에서 그 원인을 밝혀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경제를 책임지는 노동자들이 보호받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합니다.″</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