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곽동건

[서초동M본부] '필름 끊겼으니' 괜찮다고?…'취중 성범죄' 엄벌 추세로 바뀔까

입력 | 2021-02-23 11:38   수정 | 2021-02-23 13:45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만취한 10대와 모텔에 간 경찰공무원</strong>

2017년 2월, 수도권의 한 모텔에서 20대 남성이 10대 여성을 추행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 남성은 현직 경찰공무원이었는데, 이날 밤 처음 만난 여성과 모텔에 들어간 걸로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당시 술에 만취해 이른바 ′필름이 끊긴 상태′였다는 것.

어떻게 이 남성을 만나 모텔까지 가게 된 건지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 남성은 결국 ′준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데요.

피해자의 기억이 사라진 시간동안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진실은 오로지 재판을 받아야 할 남성만 알고 있는 상황.

이 남성은 끝까지 ′첫눈에 서로 불꽃이 튄 것′이라면서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법원의 판단도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심 법원은 이 남성에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불과 넉달 뒤 2심에선 ′무죄′가 나온 겁니다.

이렇게 판결을 완전히 뒤집은 핵심 쟁점, 이른바 ′알코올 블랙아웃′이었습니다.

흔히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다′고 말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술에 만취해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고 봤는데, ′겨울에 외투도 걸치지 않고, 휴대전화도 소지하지 않은 채 일행도 찾지 못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2심은 모텔 CCTV 등을 보면 피해자가 3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고, 비틀거리거나 부축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심신상실 상태가 아니었다′고 봤습니다.

2심 판단대로라면, 그날 피해자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정도로 취하지 않았고, 이 남성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데 동의했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는 겁니다.

″피해자가 멀쩡히 동의를 해놓고 나중에 술이 깬 뒤 동의 여부를 까먹었다고 해서 이 남성을 처벌할 수 있느냐″는 남성 측 주장이 받아들여진 겁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단순히 피해자가 ′정상적 판단′이 가능했지만 ′기억만 끊긴′ 상황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는데요.

이렇게 1·2심의 판단이 엇갈린 뒤,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 ′준강제추행′이 뭐길래?…</strong>

′심신상실′이 쟁점 대법원 판단이 결국 어떻게 나왔는지 말씀드리기 전에, 이 사건에 적용된 ′준강제추행′이라는 게 어떤 범죄인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형법에서 강제추행이란 죄목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추행한 경우′를 말하는데,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합니다.

물리력을 동원하거나 피해자를 겁에 질리게 하는 등 강제성이 동반된 성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인 거죠.

그런데 어떤 성범죄는 물리력이나 협박 없이도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게 바로 ′준강제추행′이라는 죄목입니다.

′강제추행′ 앞에 ′준할 준(準)′자가 붙은 ′준 강제추행′이란 ′강제추행′에 비길 만한 범죄라는 뜻이겠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준강제추행도 강제추행과 같은 형량으로 처벌하고 있는데요.

피해자가 이미 의식을 잃거나 잠드는 등 판단력을 완전히 잃어 반항할 수 없는 상태라면 폭행이나 협박조차도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런 ′심신상실′ 상태를 이용해서 추행한 경우엔 ′준강제추행′이 되는 겁니다.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하는 것보다 더 교묘하고 지능적인 성범죄로 볼 수도 있겠죠.

이 같은 ′준강제추행′이나 비슷한 구조의 ′준강간′ 사건의 경우, 피고인들이 재판에 단골로 들고 나오는 논리가 있는데요.

바로 ″당시 피해자가 심신상실 상태가 아니었고, 동의를 받은 상황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어차피 피해자가 당시 기억을 잃었으니 이런 주장을 쉽게 할 수 있는 거죠.

이렇다 보니 재판에서 피고인의 행위보다는 피해자의 상태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허다한데요.

피해자가 ′단지 기억만 못하는 건지′ 아니면 ′아예 의식이 없었던 건지′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곤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드린 사건처럼 피해자의 당시 상태를 CCTV나 목격자 진술만 가지고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너무 많습니다.

진짜 ′심신상실′ 상태였던 건지, 아니면 어느정도 의식이 있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멀쩡한 데 잠시동안의 기억만 나지 않는 것인지…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한 논란의 여지 없이 정확히 파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수사 단계에서도 피해자가 마치 기절한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는 게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아예 무혐의 처분을 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신상실′에 대한 법원 판단은 흔히 기계적으로 나오곤 하는데, 이런 기준에 맞춰 수사까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로 피해자들은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한 게 아닌가″, 혹은 ″술 취한 자체가 잘못이었나″하는 자책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게다가 무혐의나 무죄로 사건이 끝난 경우 되레 가해자 측에서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곤 하죠.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대법원 ″단편적 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돼″ </strong>

그럼 다시, 술에 취한 10대를 추행한 경찰공무원 사건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대법원은 앞서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유죄′ 취지로 법원의 판단이 두 번째 뒤집힌 거죠.

대법원 재판부는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무려 14가지나 들면서 2심 재판부의 잘못을 조목조목 꼬집었는데요.

술 취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각기 다르다는 걸 감안할 때, 단순히 피해자가 특정 시점에 부축 없이 혼자 걸을 수 있었단 이유만으로 의식까지 멀쩡했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피해자가 술에 취해 직전까지 함께 있던 일행이나 소지품도 잃어버린 채 찾지 못하거나, 실종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객실에 들어왔는데 옷도 챙겨입지 못했던 걸 예로 들었는데요.

이같은 사정을 볼 때 피해자는 당시 술에 취해 기억 뿐 아니라 판단 능력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긴 ′심신상실′ 상태로 보인다는 겁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 ′피해자 시각·사건 맥락′ 강조한 판례…′취중 성폭력′ 엄벌될까? </strong>

특히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더이상 ′준강간′이나 ′준강제추행′사건에서 피해자의 겉모습만을 핑계로 기계적인 판단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분명히 했습니다.

피해자의 모습 뿐만 아니라 사건 전후 정황을 비롯해 피해자와 피고인의 관계까지 종합적으로 살펴보라는 주문입니다.

특히, 대법원은 그 판단 기준 중 하나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정신이 멀쩡했다면 과연 성적인 접촉에 동의했겠냐″는 질문까지 던져보라고도 강조했습니다.

[대법원 판결문 中]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 하에서라면 피고인과 성적 관계를 맺거나 이에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하리라고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인정되는데도, 피해자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피해자가 단순히 ′알코올 블랙아웃′에 해당하여 심신상실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하여서는 안된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 피해자는 만 18세 여성으로 피고인과 10살 차이가 났고, 모텔에 들어갈 때까지 따지면 만난 지 1시간 밖에 되지 않았던 데다, 이름도 알지 못 할 정도로 사실상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건 직전까지 지인과 함께 있었던 피해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외투와 휴대전화까지 모두 자리에 놓고 나온 상태였죠.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정상적인 동의를 했다고 보는 게 더 상식을 벗어난다는 겁니다.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들을 대리해 온 변호사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일단 법원에서 ′피해자가 혼자 걸을 수 있었다′거나 ′기대지 않고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죄가 선고되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그 영향으로 그동안 손쉽게 불기소 처분됐던 성폭력 사건들을 수사기관에서도 더 꼼꼼히 살펴보게 될 거란 기대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더 종합적으로, 피해자의 시각에서 사건 전후의 맥락을 살피라는 대법원의 주문은 매우 상식적이죠.

앞으로 이 대법원 판례가 하급심에서 준강간과 준강제추행 사건의 지형을 어떻게 바꿔놓을 지도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