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박성호

[워싱턴 나우] "바이든,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버리지 않았다"

입력 | 2021-08-25 13:52   수정 | 2021-08-25 14:03
″바이든은 위선적 트럼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지 100일이 조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평가를 접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와 활발하게 접촉해온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한테서였는데요. 행정부가 바뀌어도 국익을 우선하는 미국 외교의 기조는 다를 바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바이든 외교, 트럼프와 뭐가 다른가″</strong>

아무리 그래도 바이든을 트럼프와 비교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는 미국 언론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마이클 거슨은 지난주 ″어쩌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바이든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됐나?″고 개탄했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할 비용을 아끼려고 철수를 서둘렀지만, 결국 인도주의적 재앙과 미국의 신용 훼손, 새로운 테러 위협 가능성 등 더 큰 대가를 지불하게 생겼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아프간 철수를 통해 바이든은 자발적으로 패배했고,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가 정신적으로 승리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트럼프가 남긴 ′미국 우선주의′의 유산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요? 워싱턴포스트가 최근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통상, 이민, 코로나 등 여러 문제에 걸쳐 나타납니다.

우선 바이든은 트럼프가 부과한 대중국 보호관세의 상당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작년 3월 도입된 보건법 42조를 숱한 철회 요구에도 놔두고 있습니다. 이 법은 질병을 퍼뜨릴 우려를 내세워 멕시코 국경에서 넘어오는 이민자들을 추방할 수 있도록 트럼프가 강하게 밀어붙인 결과물입니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추진한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취임 직후 중단했지만, 그 역시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WHO가 가난한 나라들의 사정을 생각해 코로나 백신의 ′부스터샷′(추가 접종) 논의를 일시 중단해 달라고 했지만,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이번 아프간 철수때는 구체적인 계획을 유럽의 동맹국과 상의하지 않아, 동맹을 경시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폴란드 외교장관을 지낸 라도슬로 시코르스키 유럽의회 의원은 ″스타일과 정책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바이든은 그의 전임자가 가졌던 ′미국 우선주의′ 태도에 일부 공감한다″고 했습니다.

과달루페 코리아-카브레라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바이든의 외교정책은 근본적으로 트럼프때와 다를 것이란 기대가 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오바마도, 바이든도 ″내전 개입할 의무 없어″</strong>

바이든이 보여준 ′미국 우선주의 2.0′을 순전히 트럼프에 빗댈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그의 예전 ′보스′였던 오바마 전 대통령도 현재의 바이든과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오바마에겐 재임 시절 시리아 내전이 문제였습니다. 미국은 무력 선택이 아닌 반군을 훈련시켜 지원하는 쪽을 택해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를 써서 1천 4백여 명이 희생됐음에도, 오바마는 끝내 보복을 하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시리아에서 손을 떼려고 할 때 오바마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내전에 개입할 의무가 없다. 중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미국 대통령의 일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2015년 7월 15일 기자회견)
<a href=″http://www.cnn.com/TRANSCRIPTS/1507/15/cnr.05.html″><b>http://www.cnn.com/TRANSCRIPTS/1507/15/cnr.05.html</b></a>

그리고 6년 뒤 바이든은 아프간에서 발을 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내전에 전념해 미국의 국익도 아닌 갈등 속에서 무한정 싸우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지난 8월 16일 대국민연설)

중동의 내정에 반세기가 넘게 숱하게 개입해온 미국이지만, 빠져나올 때의 논리는 같았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오래된 생각…″가망 없으면 빨리 빠져나와야″</strong>

일부에선 바이든이 이라크 공격때도 찬성하는 등 매파 외교노선을 갖고 있었지만, 갈수록 해외 문제에 개입을 꺼리는 쪽으로 변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보면 오래 전부터 ′개입주의′와는 거리를 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직전 32세의 초선 의원이던 바이든의 입장이 최근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조명합니다.

그는 그때도 가망 없는 전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하고, 무분별하게 해외에 군사적 개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최근엔 오바마 행정부시절 아프가니스탄 특사였던 리처드 홀브룩의 전기(′Our Man′)에 실린 언급도 회자됩니다.

바이든은 홀브룩 대사에게 미국이 아프간 여성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 걸로 나옵니다.
과거 미국의 캄보디아 원조를 반대할 당시 바이든의 언급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그의 지역구인 델라웨어주의 지역신문인 윌밍턴 모닝 뉴스 1975년 3월 18일자를 보면, 그의 지원 반대 논리가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바이든은 ″도덕성, 도덕적 의무에 대해 듣는 것에 신물이 난다.″(I’m getting sick and tired of hearing about morality, our moral obligation)고 말했습니다.
<a href=″https://www.newspapers.com/clip/66037251/1975-03-18-sen-biden-makes-sense-on/″><b>https://www.newspapers.com/clip/66037251/1975-03-18-sen-biden-makes-sense-on/</b></a>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개입주의′의 포기?</strong>
바이든이 넌더리를 냈던 ′도덕′은 사실 미국 외교에서 오랜 축 가운데 하나인 ′개입주의′의 핵심입니다. 미국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전파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며, 그 때문에 해외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흐름으로 나타났죠.

이렇게 보면 바이든은 ′개입주의′와 비교되는 ′고립주의′, 그것도 전임자인 트럼프가 되살린 ′미국 우선주의′에 가까워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굳어질 법도 합니다.

소련의 붕괴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의 외교 전통이 뒤섞이면서 초당적으로 수렴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국 외교에서는 개입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개입의 범위와 패권을 행사하는 방식을 조정한 경우도 많습니다(권용립, <미국 외교의 역사>).

그래서 바이든 행정부가 해외 개입을 자제하고 국내에만 집중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바이든은 아프간 철수를 정당화하는 연설에서도 아프간에 무한정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으면 중국과 러시아한테만 좋은 일 아니겠냐고 했습니다.

아프간에서 어서 손을 떼고, 앞으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