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4-30 10:46 수정 | 2022-04-30 10:46
<I>지난 4월 15일과 16일,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아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갈 곳 잃은 세월호 기억 공간′, ′″우린 잊지 않았어″ 8주기 기억식′, ′고통 속에서도 ′연대′하는 이유′를 연속 보도했습니다.
특히 트라우마를 승화시키는 ′외상 후 성장′을 방송에서 처음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피해자들의 고통이 끝났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타인을 돕고 힘이 되려는 이들의 노력과 비교했을 때, 8년 동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답해 왔는지, 대체 어떤 부분이 나아졌는지를 묻고 돌아봐야 한다는 부끄러움이 컸습니다.
방송에 다 담지 못한 그분들의 이야기를 사흘간 취재 후기 형식으로 이어갑니다.</I>
경기도 안산 ′마음토닥 정신건강의학과′의 김은지 원장을 4년 만에 만났습니다.
김은지 원장은 2010년부터 소아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고,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7월 1일부터 2016년 6월 30일까지는 단원고에서 생존 학생들을 치료하는 ′스쿨닥터′로 일했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연구하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승섭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트라우마를 경험한 집단을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보며 장기간 치료에 전념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김은지 원장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저는 4년 전 ′세월호 참사 특별취재 TF′에 있을 때 김은지 원장을 촬영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방송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어떤 내용이 기사에 담겨야 하고 어떤 내용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지를, 기꺼이 시간을 내어서 기자인 저에게 진심으로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연락했습니다. ″단원고 생존 학생들을 도저히 섭외할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줄 수 있는 분은 지금 원장님밖에 없다.″
단원고 생존 학생은 75명. 8년이 지난 지금도 김은지 원장은 그 중에 50명 안팎을 최소 1년에 1~2번씩 만나면서 추적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B>(기자: 8년이란 시간은 생존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B>
<B>″참사 이후 1년,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은 트라우마 급성기 증상들을 많이 보이는 상태였어요. 학교라는 환경 자체가..거기서 만났던 친구들을 내가 잃어버린 거잖아요. 그래서 고등학교 안에서의 트라우마 증상들, 이런 것들이 주된 문제였죠.″</B>
그러다 대학교로 넘어가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또 다른 공간들에서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는 불안감. 그리고 특별전형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불안들. 그런 게 대학 초기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합니다.
<B>″사실 이 친구들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2학년 정도까지 한 번도 쉰 적이 없어요. 트라우마를 입었는데 치료도 받고, 공부도 하고, 대학교에서는 거기서 또 적응하느라 전력을 다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이 너무 많이 지친 상태였고 3학년쯤 휴학을 많이 하고 조금 쉬는 시기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나의 마음, 스스로 뭐가 힘든지를 돌아보고 마음 안의 것들을 해결하는 시간이 있었죠.″</B>
고3은 원래 그냥 있어도 힘든 시기입니다. 그 시기에 학생들은 너무 많은 것들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김은지 원장님에게도 눈코 뜰 새 없는 시기였을 거라 짐작해 봅니다.
<B>(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B>
<B>″사실 그 전에도 다양한 재난들이 있었지만, 세월호 참사 때까지도 제대로 만들어진 체계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원래 재난이 일어나면 중앙부처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자원을 내려 보내고, 지역사회 자원들이 결집하고, 지역 안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줘야 해요. 중앙과 지역이 손발을 맞추는 그런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당시 우리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선의는 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안타깝고 혼란스러운 상황도 있었죠.″</B>
<B>(기자 : 지금은 좀 달라졌나요?)</B>
<B>″안산만 놓고 보면, 많은 민간 단체들이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들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래서 최소한 이제는 이런 재난 혹은 트라우마가 있을 때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단체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어요.″</B>
<B>″저는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국가 트라우마센터′가 처음으로 생겼잖아요. 그래서 재난이 발생하면 국가 트라우마센터가 개입하고, 가이드라인을 주는 게 서서히 익숙한 일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런 것들도 세월호 참사 이후에 변화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고요. 우리 스스로도 앞으로 어떤 걸 더 바꿔나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도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B>
외상 후 성장. 사고로 정신적인 충격을 겪은 피해자가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타인의 아픔에 더욱 깊이 공감하고 연대하게 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방송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이 개념을 다룰 수 있었던 건, 실제로 세월호 생존 학생들이 이러한 성장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B>″제가 아이들을 보면서 굉장히 놀라운 몇 가지 경험들을 했는데..우리는 아이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 ′피해자니까 얘들은 늘 우울하고 악몽을 꾸고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이런 생각들만 하고 있었는데, 사실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마음 속에서 내가 어떻게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어느 순간 ′내가 이 불완전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내가 다른 사람한테 안전함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 나는 비록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또 그런 위험한 처지에 처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힘을 보태는 사람이 돼야겠다′ 하는 그런 전환이 일어난 거예요. 굉장히 놀라운 순간이죠. 그런 걸 외상 후 성장이라고 합니다.″</B>
이제 20대 중반이 된 그들 중 상당수가 경찰, 간호사,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등 남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하나같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느냐′였다는 겁니다. 요새 흔히 얘기하는 ′돈을 얼마 벌 수 있냐, 얼마나 재미있게 살 수 있냐′가 아니었습니다.
<B>(기자 : 세월호 참사는 원장님께도 어떤 변화가 됐을 것만 같습니다.)</B>
<B>″제가 진료하는 많은 아이들이 아동 학대를 당하거나 학교 폭력을 당하거나 하는 그런 어려움, 정말 캄캄하고 힘든 순간에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한테 누가 감히 ′너의 삶은 괜찮아질 거야. 앞으론 괜찮을 거야′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렇게 말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너무 중요한 증거가 생겼어요. 세월호 생존 학생들이 정말 너무나 엄혹한 그런 참사를 경험하고도 대학에 가고, 대학에서 살아남고, 그리고 직장을 얻고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는 정말 희망의 증거인 거죠.</B>
<B>세월호 참사 당시에는요. ′쟤네들이 과연 살 수 있겠어? 쟤네들이 사회에 나갈 수 있겠어?′ 그런 시선들로 어른들이 많이 봤습니다. 어른들이 너무 자만했던 거죠. 그렇죠?
생존 학생들은 그 과정을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서 이겨내서 이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쟁취하고, 그리고 트라우마로 인한 어려움들이 아직은 있지만 그걸 이겨낼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만들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그게 제가 많은 환자들을 볼 때 ′당신한테도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한 걸음씩 가다보면 그 순간이 올 거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너무나 중요한 근거가 됐습니다.″</B>
참사 이후, 노란 리본과 촛불을 들고 아주 많은 어른들이 ″얘들아, 너희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게″라고 약속했습니다.
생존 학생들은 트라우마와 싸우면서 ′친구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 힘이 있고 그래야 할 책임이 있는 어른들은 그 약속을 지난 8년 간 실제로 지켰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